[EDITOR's LETTER]
흔들리는 한국 대표 기업들, 리더십은 어디에[EDITOR's LETTER]
세계 최초로 전자사전과 개인용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회사를 아십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럼 세계 최초로 노트북 컴퓨터를 출시한 회사는 아시는지요.

첫 번째 문제의 답은 ‘스미스코로나’입니다. 듣도 보도 못했지만 1906년 휴대용 타자기 개발을 시작으로, 1989년 휴대용 워드프로세서까지 수많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100년간 세계 제일의 타자기 업체로 군림했던 회사입니다.

노트북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회사는 일본 도시바입니다. 지금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1984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록도 있습니다. 이 회사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요.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을 도시바에서 배웠고, 대한전선과 대우전자는 TV와 가전제품을 도시바 기술로 만들었으니까요.

도시바와 스미스코로나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한때 세상을 주름잡았지만 순식간에 몰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새로운 기술의 힘이었습니다. 타자기는 PC에 그 자리를 내줬고, 도시바는 삼성의 높은 생산기술에 밀려 원전사업 등등을 전전하다 상장폐지 당했습니다.

기술의 급격한 변화는 기업의 운명만 바꿔놓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세계 패권국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3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석유왕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 그리고 자동차의 아버지 헨리 포드입니다. 이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동차와 석유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유럽에 있던 세계경제의 패권을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가져오는 기반이었습니다. 이 패권은 100년을 이어왔습니다.

요즘 또 다른 100년이 시작되는 느낌입니다. 인공지능(AI)과 전기차, 그리고 플랫폼 등 세 가지 산업이 미래 기술 패권을 둘러싼 전쟁의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 시장을 장악하는 자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기술 패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미국의 기업들이 맨 앞자리에 서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어떨까 돌아봤습니다. 제조업의 시대, 특유의 리더십과 팔로어십으로 선진기업을 따라왔지만 새로운 판에서는 불안감이 듭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1위 기업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삐걱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엔씨소프트, LG엔솔, CJ ENM, 네이버, 카카오 등입니다.

물론 한국 대표기업들도 거대한 물결에 올라타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뭔가 약간 엇나가 있는 느낌입니다. 시장에서 주가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어려움에 처한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는 자만, 혁신의 실종, 경직된 전략, 성공 경험에 매몰, 미래를 보려는 노력의 포기, 리더십의 실종 등입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한국의 기업들이 성장한 패스트팔로어 전략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게 된 시대에 퍼스트무버도 없는 진공 상태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비관론자들은 “한국 산업이 퇴조기에 들어섰다”고 평합니다.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은 어디로 갔나’라는 책에서 기업 몰락의 5단계를 설명합니다. 성공으로 자만심이 생기는 1단계, 원칙 없이 욕심을 내는 2단계,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3단계, 구원을 찾아 헤매는 4단계, 유명무실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5단계 등입니다. 하지만 그는 “4단계까지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일시적일지, 아니면 보다 근본적일지 모르는 어려움에 처한 한국 1등 기업들을 다뤘습니다. 누군가는 질문합니다. “긍정적인 점을 부각시켜 희망을 줄 수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메가트렌드 변화의 파도는 한순간 어마어마한 대기업을 집어삼켜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낙수효과가 사라졌다 해도 국내 대표 기업들이 어려워지면 한국 경제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한국 기업들은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회복탄력성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 힘을 다시 작동시킬 시간입니다.

다만 그 힘이 작동하려면 한 가지가 필요해 보입니다. 리더십입니다. 시스템이 위기를 극복한 사례는 없기 때문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