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
[비즈니스 포커스] “당신이 마지막으로 지폐를 사용한 때는 언제였나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이다. 지금은 버스를 타도 가게에 가도 ‘현금 없는 버스’, ‘현금 없는 가게’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지갑을 들고다니지 않아서 현금을 써야 하는 순간에는 ‘계좌이체 할게요’란 말이 통용되는 요즘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디지털 결제 수단에 의존하고 있고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한 기관이 있다. 바로 화폐를 만드는 ‘조폐공사’다. 화폐 매출 24%, 조폐공사의 영업기밀“아, 현금 없는사회인데 내가 위기의 순간에 가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처음엔 있었죠.”지난 6월 14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조폐공사 오롯디윰관에서 만난 성창훈 사장은 2023년 조폐공사 사장 공모에 응모하던 첫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2016년 국가적으로 추진된 동전 없는 사회 캠페인에 따라 2021년 기준 현금결제 비중은 14.6%까지 축소됐다. 동전 수요는 90%나 줄었다. 화폐를 만드는 조폐공사의 화폐 사업량도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웬걸, 공사의 위기감은 이미 10~20년 전부터 팽배했어요. 조폐공사는 일찌감치 업의 전환을 추진했죠. 화폐 제조의 기본 사업을 바탕으로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발빠르게 변화했어요.”
1951년 공사 출범 당시 매출의 100%를 이뤘던 화폐 비중은 2023년 24%로 급감했다. 생사를 가르는 위기는 오히려 발 빠르게 업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전통 제조사업 중 하나인 신분증 제조 매출이 화폐와 비슷한 24%를, 나머지 52%는 신사업이 채웠다. 70년 역사의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사업을 다변화한 것이 주효했다. (사진=한국경제매거진 서범세 기자)
하지만 현재의 매출 비중에 안주할 수 없다. 현금 없는 사회는 이제 막 본궤도에 올랐다. 앞으로는 현금비중이 더 줄어들 전망이다. 이는 곧 조폐공사의 현재 매출비중 24%를 차지하는 화폐 사업량도 추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제가 던진 어젠다는 ‘조폐가 산업이 된다’는 거예요. 혹시 오만원권에 얼마나 많은 기술이 적용되는지 아시나요. 띠형 홀로그램과 입체형 부분노출은선 등 22가지의 첨단 위변조방지장치 기술이 적용됩니다. 디지털로 전환하는 시대에 필요한 기술을 누구보다 많이 가진 곳이 바로 조폐공사인 셈이죠.”
성 사장은 선임 CEO들이 시작한 기본 사업의 틀에서 약간의 변주를 주는 것만으로도 사업의 다각화를 이룰 것으로 내다봤다.
그가 첫째로 주목한 것은 볼록인쇄 기법으로 만든 그림인 ‘요판판화 사업’이다. 요판화는 은행권 화폐를 찍는 기계를 사용해 미세한 선이나 점으로 명암을 구현하는 게 특징이다. 화폐를 제조하는 고도의 인쇄기술을 판화에 적용해 볼록한 질감을 살리면서 제작하는 게 특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조폐공사만 제조 가능한 기술이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기념선물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우리 기술로 만들었던 거예요. 비매품이었죠. 그런데 굉장히 좋아하시는 거예요. 구매할 수 없냐는 제안을 많이 받으면서 ‘아 이거다’ 싶었죠.”
현재 조폐공사가 제조한 요판화 제품들은 반 고흐, 모네, 이중섭 등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없는 유명 작가들의 그림이다. 앞으로는 국립박물관 등과 협업을 맺고 우리나라의 전통 예술품이나 문화재를 요판판화로 제작해 판매할 계획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판을 뜨고 제작하는 데에만 약 2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매출 확대의 의미보다는 문화사업의 일환이다. 공사는 희소성을 부여해 한정판으로만 하반기부터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사진=조폐공사가 제조한 요판화 제품들 조 단위 예술형 주화로 도약 기대조폐공사의 매출을 늘릴 ‘성 사장표’ 핵심 사업은 예술형 주화다. 예술형 주화란 국가 상징물을 주제로 정부 또는 중앙은행에서 금, 은 등 귀금속 소재로 발행하는 법화를 의미한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독수리, 캐나다는 메이플, 호주는 캥거루, 중국은 판다를 새겨 예술형 주화로 판매한다.
“공사의 연간 매출이 약 5000억원인데 예술형 주화 시장은 기본적으로 조 단위 사업이에요. 이 시장에 해외 6대 주요국이 있는데 미국은 4조9000억원, 중국은 4조3000억원, 캐나다는 3조원 등 연평균 3조원 수준이에요.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죠. 해외 6대 주요국의 전체 매출 규모가 2019년 7조원에서 2022년 20조원으로 늘었으니 150% 이상 성장하는 시장입니다.” 한국의 경우 국가적 행사나 기념일, 역사적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하지만 예술형 주화는 없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세계 주요국에서 외국의 예술형 주화를 역수입해 들여오는 실정이다.
한국이 낳은 피겨선수 김연아를 모델로 한 기념주화는 2010년 남태평양 투발루에서 발행됐고 2009년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기념주화가 발행되어 국내로 역수입됐다.
한국에서 발행하는 기념주화마저도 연 1~3회, 연간 3만~5만 장 발행 수준으로 인구 규모가 비슷한 호주(1650만 장), 스페인(116만 장) 등과 비교하면 발행 규모가 현저히 적은 수준이다. “소량 발행하고 가격이 고정되어 있는 기념주화와 예술형 주화는 달라요. 자국의 대표 상징물을 새겨 예술형 주화를 발행하는데 부가가치 창출은 물론 문화 홍보를 통한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하죠. 오히려 예술형 주화를 만드는 국가에서 우리에게 역으로 물어봅니다. 예술형 주화를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과 잠재력이 있는데 왜 만들지 않냐고요.”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 K팝, K드라마 등 K-문화, 유구한 역사 등. 성 사장은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예술형 주화의 잠재력이 매우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예술형 주화는 안전자산으로서의 기능도 갖췄다. 안전자산인 금·은 등 귀금속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예술형 주화가 유통될 경우 금 보유량 확대로 국가 안전자산 포트폴리오를 강화할 수 있다.
“국부 창출과 국가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큰 역할을 하는 만큼 예술형 주화의 발행을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어요. (지리적·문화적으로 라이벌인) 일본이 예술형 주화를 시작하지 않은 지금이 우리나라가 예술형 주화를 도입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해요.”
현재 사업 검토를 위한 관련 연구가 진행 중이며 세미나도 앞두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승인과 발권당국인 한국은행과의 협업이 필요한 사업이다.
이 밖에 전통시장 및 상점가 전용 상품권인 ‘온누리 상품권’의 통합사업자 선정 입찰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전국의 가맹시장에서 현금처럼 사용 가능한 온누리 상품권은 조폐공사의 특수 보안기술로 제작했다. 그런데 10% 할인, 세제혜택이란 상품가치에도 불구하고 지류, 카드, 모바일 제작업체가 각기 달라 서비스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최근 중기부에서 서비스 확산을 위한 통합사업자 선정 설명회를 열었고 조폐공사도 도전장을 던질 생각이다.
“통합 사업자라면 제일 잘하는 곳이 선정되어야겠죠. 조폐공사는 지류부터 카드, 모바일까지 ICT(정보통신기술)를 모두 갖춘 곳이에요. 민간에서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공사가 정책 목적을 실현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발로 뛰면서 서비스 확산, 잘해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오는 8월이면 임기 1년을 맞는 성 사장. 안팎에선 1년도 채 안 됐는데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3년 임기인데 왜 100m 달리기를 하냐. 마라톤을 뛰어야 하는 사람이’ 그런 글이 블라인드에 올라왔더라고요. 제 생각은 달라요. 댓글도 직접 달았죠. 사장의 임무는 직원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하는 거예요. 내가 떠나기 전까지 적어도 10년 치의 할 수 있는 업은 만들어두어야죠. 그래야 직장이 불안하지 않잖아요. 공무원 생활만 하던 제게 조폐공사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에요. 이런 임무가 제게 주어진 게 너무 행복해요. 정말 다 쏟아내고 갈 거예요. 3년 금방 가잖아요.” 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은 1967년생으로 고려대 경제학을 나와 파리정치대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땄다. 1993년 제37회 행시에 합격했으며 기획재정부 경제구조개혁국장 및 장기전략국장,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선임행정관 및 주홍콩총영사관 재경관 등을 역임한 경제 전문가다. 탁월한 기획력과 업무추진력, 조직관리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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