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화재 사건으로 전기차 불신 높아져
"아직은 전기차 구매 시점 아니야"라는 인식 확산

전기차 안전 위한 대책 마련 시급

[비즈니스 포커스]
인천 서구 청라동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 현장에서 합동 감식을 마친 경찰이 화재가 발생한 전기차를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인천 서구 청라동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 현장에서 합동 감식을 마친 경찰이 화재가 발생한 전기차를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전기차 구매 취소를 요청하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벤츠코리아의 한 수입사에서 딜러로 일하고 있는 A 씨는 “계속되는 전기차 화재 사건으로 인해 전기차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진 모습”이라며 이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A 씨에 따르면 그가 근무하는 지점만 해도 전기차를 구매하기로 했던 다수의 고객이 계약을 취소하거나 이를 보류하고 나섰다. 그는 “특히 최근 화재 사건이 일어난 차량이 우리 브랜드(벤츠)이다 보니 벤츠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 불안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침체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기차 업계에 대형 악재가 터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며 소비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전기차 안전에 대한 ‘포비아(공포)’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이에 따라 현장에서는 전기차 주문 취소가 잇따르면서 당분간 전기차 판매가 더욱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안전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특히 최근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연출하며 전기차에 대한 공포를 더욱 키우고 있다.

지난 8월 1일 오전 인천 서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벤츠 전기차(EQE 모델) 화재 사건’은 전기차에 불이 나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고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충전 중인 차량에 불이 삽시간에 번지면서 주변에 있던 차량 140여 대가 불에 타거나 그을렸다.

또 화염으로 주차장 내부 온도가 1000도 넘게 치솟으면서 지하 설비와 배관 등이 녹아 수돗물과 전기 공급이 끊겼으며 일부 주민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전기차 화재, 계속 이어질 것”구체적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당초 업계 일각에선 해당 차량이 탑재한 저가 ‘중국산 배터리’가 화재를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추측은 빗나갔다.

지난 8월 6일에는 충남 금산에서 주차돼 있던 기아 전기차 EV6에서도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차량은 SK온에서 생산한 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모델이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중국산 배터리라고 해서 안전에 더욱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로 벤츠와 같은 수입차뿐 아니라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만드는 일부 전기차에도 가격을 낮추기 위해 중국산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다.

한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현재 상황만 놓고 봤을 땐 모든 전기차 배터리 자체가 일정 부분 화재 위험을 안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국산 배터리라고 해서 화재 위험이 더욱 크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그는 “내연기관차에서도 종종 화재가 발생하는 것처럼 전기차 수가 늘어나면서 일부 차종에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며 “국내산 배터리가 더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일시적으로 수요가 감소하고 있지만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차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늘어나는 전기차 수에 비례해 비슷한 화재 사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연식이 오래된 전기차의 경우 화재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전기차 화재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전기차는 특성상 화재 발생 시 불이 순식간에 확 붙는 일명 ‘열폭주’ 현상이 발생해 내연기관차보다 불길을 잡기 어렵다.

무엇보다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전기차 충전소의 위치를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번에 인천에서 일어난 벤츠 전기차 사고에서도 나타난다. 스프링클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지하에 충전소가 위치했던 것이 애초부터 큰 피해가 난 원인으로 분석된다.
‘캐즘’에 이어 ‘포비아’까지...더 멀어지는 전기차 시대
소방 당국에 의하면 소방차들이 좁은 지하 주차장에 진입할 수 없어 빠르게 불을 진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재 진압에 8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경우 보통 천장에 전기배선과 같이 화재를 더욱 키울 수 있는 위험 요소들도 많다.

실제로 인천 전기차 화재로 여러 아파트 단지에선 전기차의 지하 출입을 금지하는 경우가 속속 나타나며 전기차 차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나친 조치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대처가 적절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교수는 “대부분의 해외 국가들이 안전 문제 때문에 지상에서만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며 “지하에 전기차 충전기가 설치된 국가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경우 도시의 인구밀집도가 높아 지상에서 주차 면적 확보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많은 아파트나 빌딩에서 지하에 전기차 충전소를 설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인데, 전기차 화재로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이런 시설들을 어떻게 지상으로 옮길지 정부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전기차 차주들도 배터리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급속 충전보다는 완속 충전을 이용하면 전기차의 화재 위험이 훨씬 낮아진다.

잦은 급속 충전은 배터리 내부 전극 구조에 자극을 줄 수 있어 배터리 수명과 성능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배터리를 보호하고 성능을 유지하기 위해선 가급적 완속 충전이 좋다.

100% 충전을 하는 것도 배터리에 부담을 줄 수 있어 가급적 피해야 한다. 충전율을 80~85% 수준으로 설정해 과충전만 예방해도 전기차 화재를 큰 폭으로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방법이 전기차 화재를 100%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전기차 화재 사고가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부와 국회도 부랴부랴 전기차 안전을 위한 법안들을 내놓고 있지만 전기차 업계가 더욱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지는 것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번 사고 이후 “아직 전기차를 구매할 시점이 아닌 것 같다”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완성차 업계에서도 올해 전기차 시장 확대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제기된다.

전기차 업계가 반등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선 결국 배터리 성능이 더욱 개선되는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전기차의 판매 둔화는 배터리 업계에도 큰 타격인데, 이를 잘 알고 있는 배터리 업체들은 화재 위험을 낮추는 배터리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폭발 위험을 현저히 낮추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이 한창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인화성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한 제품을 의미한다. 전해질은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이온을 전달하는 물질이다. 현재 생산되는 배터리는 전해질이 액체 형태를 띠고 있어 새어 나올 경우 발화 위험이 높다. 이를 고체로 대체하게 되면 배터리 폭발과 화재 위험성을 줄이면서도 에너지 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어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다만 현재로선 양산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내외 배터리 업체들에 따르면 전고체 배터리가 시장에 등장하는 시점은 빨라야 2027년경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성능 개선 없이는 전기차 대중화는 사실상 어려울 수 있다”며 “현재로선 전기차의 대중화가 요원해 보인다”고 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