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d 목표, '물가안정'과 '최대 고용'
일주일 전 까지 '골디락스' 얘기 나왔던 미국 경제
전문가, "매도 타이밍 기다리던 투자자에게 지표가 '트리거' 된 것"
CPI, 엔캐리트레이드 등 변수 남아
지난 7월 25일까지만 해도 미국 경제가 ‘골디락스’(물가상승 없이 높은 성장을 이루는 이상적인 경제 상황)에 접어들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
미국 상무부가 이날 발표한 올해 2분기 경제성장률이 2.8%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난 1분기 경제성장률(1.4%)의 두 배였다. 고금리 환경에서도 소비 지출, 기업 투자 등이 늘면서 시장 예상보다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기업의 투자도 가계의 소비도 늘면서 경제가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 일주일 만인 8월 2일 전 세계 증시가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로 뒤덮였다. 경기의 바로미터인 미국 고용시장과 제조업 지표에서 침체 신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8월 5일 코스피는 2400선까지 떨어졌고 닛케이지수는 12% 급락하는 ‘블랙먼데이’가 펼쳐졌다. 양국 증시는 한때 거래중지 조치까지 내려졌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코스피와 닛케이가 다시 급등하며 손실 일부를 회복했다.
증시 하락의 논리는 복합적이었다. 고용시장과 제조업 지표가 둔화했고 두 달 전부터 빅테크 기업들의 실적이 발표되면서 ‘AI 거품론’이 고개를 들었다. AI에 들어가는 막대한 투자금에 비해 수익을 내는 기업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트럼프 변수, 엔캐리트레이드(일본 엔화를 빌려 전 세계 주식·채권 등에 투자하는 것) 청산 우려, 중동 긴장감 고조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뉴욕증시와 일본 증시가 사상 최대 낙폭을 보일 정도의 지표였냐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전문가들이 많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처럼 금융시장의 붕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코로나 팬데믹 때처럼 실물경제에 위기가 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달 전까지는 뜨거웠던 미국 고용시장경기침체설을 촉발한 가장 큰 화살은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도 우려한 고용시장의 급속한 냉각이다.
Fed의 목표는 ‘최대 고용’과 ‘물가안정’이다. 한국은행을 비롯해 많은 나라 중앙은행이 물가안정 외에 다른 목표를 법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것과 다른 지점이다. Fed가 금리를 올리고 내리며 통화정책을 조절하는 이유가 ‘고용’과 ‘물가’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다. Fed가 정한 미국 물가 상승률 목표치는 2%다. Fed는 장기적으로 2%의 인플레이션이 최대 고용과 물가안정을 잡으려는 목표와 가장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
Fed는 통화정책을 조절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경제지표를 꾸준히 관찰한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소비자물가지수(CPI), 생산자물가지수(PPI), 개인소비지출(PCE) 등 물가지표 3대장이 쥐고 있다. 그런데 지난 4월 이후 3개월 연속 물가가 둔화세에 접어들었다. 시장에서는 4월부터 금리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번졌다.
하지만 파월은 지난 5월 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고용’을 걸고 넘어졌다. 물가를 잡으려고 기준금리를 5% 넘게 올린 긴축 국면에서도 5월까지는 미국 고용시장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르면 소비가 줄어야 하는데 가계는 소비를 줄이지 않았고 일자리는 빠르게 증가했으며 경제는 탄탄하게 성장했다. 3월 한 달에만 신규 고용은 30만3000명을 기록했다.
그러자 파월은 5월 정례회의에서 “지금까지 Fed의 이중 책무인 물가안정과 최대 고용 중 물가안정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최대 고용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동시장이 둔화하면 금리를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고용과 경기가 좋은 상황에서 금리를 인하하면 물가를 다시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파월의 예상보다 노동시장이 빠르게 식었다는 것이다.
올 7월 ISM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가 전달(48.5)보다 떨어진 46.8을 기록한 것은 실물경제 침체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에 충격을 더했다. PMI는 4개월 연속 기준점인 50을 밑돌았다. ‘침체’의 시그널은 보이지 않는다 시장에 가장 크게 작용한 지표는 실업률이었다. 실업률은 지난 7월 4.1%에서 4.3%로 크게 상승했다. 2년 9개월 만의 최고치다.
그러자 실업률을 통한 경기 흐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삼의 법칙’이 거론됐다. 삼의 법칙은 실업률 3개월 평균이 직전 12개월의 저점보다 0.5%포인트 높아지면 경기침체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지표가 7월 0.53%포인트로 폭등했고 시장은 이를 경기침체 신호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 지표를 고안한 이코노미스트 클라우디아 삼 박사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8월 5일 CNBC 인터뷰에서 “우리는 불황 단계에 있지 않다”고 했다. 실업률이 높아진 이유에 대해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 이민이 급증한 것을 포함해 노동력 구성의 극적인 변화가 있어 실업률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업률은 현재 일자리가 없지만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다. 직장을 잃은 사람이어도 지난 4주 동안 일자리를 찾지 않은 사람은 이 측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경기침체기에는 일자리가 줄어들어 실업률이 높아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경기가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면 실업률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메리 데일리 샌프란시스코 연은 총재도 경기침체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미국 7월 고용보고서에 대해 “‘일시적 해고’가 많이 늘어난 점과 허리케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며 “영구적인 해고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며 “현재 노동시장이 지속적으로 둔화하고 있는지 또는 악화하고 있는지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시장 울고싶을 때 뺨 때려준 것” 이처럼 전문가들은 미국 경제가 침체를 논하기에는 우려가 과열됐다고 분석한다. 미국 경기가 둔화세에 접어드는 건 맞지만 주가가 폭락할 만큼 ‘침체’의 시그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임재균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주가가 과도하게 폭락을 할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며 “시장이 차익을 실현할 이벤트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주가가 너무 올라 ‘팔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주식을 내던질 명분을 고용지표가 마련해 줬다는 얘기다.
미국 증시가 과열되고 실적 대비 주가 수준이 높다는 지적은 올초부터 이어졌다. 지난 3월 CNBC가 월가 주요 전문가 300명에게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1%는 미국 증시가 2분기에 약세 전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분기 빅테크 기업의 실적 발표 후에는 전 세계 주가를 부양했던 AI 기술에 대한 회의감이 번졌다. 천문학적인 투자 대비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서비스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7월 고용지표와 제조업 지표는 차익실현 이벤트, 즉 명분을 기다리던 투자자들에게 매도 타이밍을 알리는 트리거가 됐다.
공포에 사로잡힌 매도는 다시 투매를 불렀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내다 팔자 이번엔 기계가 움직였다. 변동성 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에 활용되는 프로그램 매매다.
특히 펀드 매니저의 관여 없이 지수를 그대로 추종하는 패시브 투자 상품은 주가가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이상 신호가 발생하면 미리 설정한 규칙에 따라 주식을 매매한다. 최근에는 AI와 빅데이터 기술 발달로 알고리즘 매매를 도입한 대형 헤지펀드들이 늘었다.
이 때문에 지난 5일 아시아 주식시장 개장 직후 ‘투자자들의 차익실현을 위한 매도→주가 하락→지수 하락→프로그램 매도’로 인해 주가 하락과 지수 하락이 이어지는 악순환을 형성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5일 ‘주식을 팔겠다’는 주문이 너무 많아 프로그램 매매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사이드카가 발동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미 주가 밸류에이션이 높아진 상황에서 차익실현의 타이밍을 기다리던 투자자들이 경기둔화의 신호를 알리는 지표가 발표되자 주식을 내다 팔았고 이로 인해 프로그램 매매까지 투매가 이어지면서 증시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5일 하루 만에 국내에 상장된 ETF 시가총액 6조원 이상이 증발했고 10개 중 8개 가까운 상품이 손실을 봤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기준 국내 873개 ETF 합산 시가총액은 148조5900억원으로 집계됐다. 전 거래일(154조7072억원) 대비 6조1172억원(3.95%)이 빠졌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반도체 대표 ETF인 아이셰어즈 세미컨덕터(SOXX)가 지난 5일부터 3거래일 동안 14.1% 하락했다. 2020년 3월 18일 15.4% 하락한 이후 4년 만에 기록한 최대 낙폭이었다.
일본에서도 그간 수익률이 가장 좋았던 위즈덤트리 재팬 에쿼티(DXJP)가 지난 5일 하루 동안 11.7% 폭락했다. 이날 이 ETF가 추종하는 닛케이225지수는 12.4% 폭락하며 1987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시장 안정세? 낙담하기엔 일러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증시는 ‘블랙먼데이(8월 5일)’ 이후 3거래일 만에 반등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증시가 꾸준히 우상향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우선 8월 28일로 예정된 엔비디아의 2분기 실적 발표에 빅테크와 다른 반도체 기업의 주가 향방이 달렸다.
8월 14일 발표 예정인 미국 7월 CPI 등 경제지표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지표가 예상보다 양호한 것으로 확인되면 ‘R의 공포’도 어느 정도 진정될 것으로 관측된다. 8월 22일부터 열리는 잭슨홀 미팅에선 Fed의 통화정책 기조를 가늠할 수 있을 전망이다.
엔화 역시 변수다. 엔·달러 환율은 6월 160엔대까지 올랐다가 8월 5일 141엔대로 급락하며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우려를 키웠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에선 엔캐리트레이드 규모를 약 20조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김영은 한경비즈니스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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