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소재 압구정3구역 전경. 사진=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소재 압구정3구역 전경. 사진=연합뉴스
한동안 잠잠했던 재개발, 재건축 시장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로 여겨지는 시공사 선정을 둘러싼 대형 건설사 간 경쟁이 다시 불붙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택경기 불황과 공사 원가 상승에 부담을 느낀 건설사들은 출혈경쟁을 피했다. 2019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오르기 시작한 건설 원자재 가격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등하기 시작했다. 안정성이 높은 정부, 지자체 공사조차 단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유찰되기까지 했다.

마침 미국발(發)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분양시장 역시 가라앉으면서 건설사들은 신중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재개발이나 재건축 사업을 수주한다고 해서 당장 착공이나 분양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공권 확보를 위해 투입돼야 하는 수백억원대 입찰보증금과 홍보비용, 금융비용 등은 전국 곳곳에 미분양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화 문제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건설사들에 부담이었다.

최근에는 점차 다른 기류가 읽힌다. 송파구 가락프라자 재건축, 여의도 한양 재건축 이후 뜸했던 시공권 경쟁입찰이 다시 성사될 분위기다.

이 같은 분위기에는 달라진 시장 환경이 작용하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원자재 수요가 줄면서 공사 원가 상승 압력이 낮아진 데다 서울 등 일부 지역은 주택수요도 회복되고 있다. 무엇보다 대형 건설사들이 탐낼 만한 핵심지역 대단지 재개발, 재건축이 시공사 선정을 앞두고 있다. ‘삼성 vs 현대’ 각축전에 주목
올해 시공사 선정이 예정된 곳은 한남뉴타운과 ‘진정한 대장주’ 압구정 재건축이다. 한남뉴타운에선 대우건설과 롯데건설이 한판승부를 벌였던 2022년 한남2구역 시공사 선정 총회 이후 2년 만에 한남4구역과 한남5구역이 시공사 선정 입찰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치열한 경쟁입찰이 예고된 곳은 한남4구역이다. 입찰 전부터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상대는 매년 종합시공능력평가 1, 2위를 기록하는 삼성물산 건설부문과 현대건설, 그리고 몇 년 새 주택시장에서 몸값을 높인 포스코이앤씨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특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대기업 그룹사이기도 한 양사의 수주전이 현실화할지 주목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업계 최초 프리미엄 주택 브랜드인 ‘래미안’을 바탕으로 2000년대 주요 정비사업을 휩쓸었으나 2015년 신반포3차·경남아파트 재건축 이후 주택 수주를 멈춘 뒤 몇 년의 공백기를 거쳤다.

삼성이 주택시장을 떠난 사이 현대건설은 적극적인 수주 전략은 물론 기존 ‘힐스테이트’와 차별화한 하이엔드 브랜드 ‘디에이치’를 활용해 강남과 용산 핵심 재건축, 재개발을 휩쓸었다. 내로라하는 경쟁사와 경합했던 한남3구역과 반포1·2·4주구가 대표적이다.

2019년 반포3주구 수주전 참전과 함께 재건축 시장에 돌아온 삼성물산은 ‘클린 수주’, ‘선별 수주’ 전략을 통해 사업성이 높은 강남 사업지의 시공권을 집중 확보했다. 반포3주구(래미안 트리니원)와 신반포15차(래미안 원펜타스), 방배5구역(래미안 원페를라) 등이 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2022년 울산 중구 B-04 재개발 시공권을 따내기 위해 각자 공을 들였으나 컨소시엄 형태로 해당 사업을 수주한 바 있다.

그러나 다가오는 한남4구역과 압구정 수주전에서는 컨소시엄 수주가 어려울 전망이다. 당장 한남4구역만 해도 입찰지침서에 ‘업체 간 공동참여(컨소시엄) 불가’ 문구가 포함될 예정이다.

양사는 벌써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조합이 마련한 시공사 선정 계획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삼성물산은 책임준공확약, 특화설계에 따른 공사비 증액 불가 등 일부 내용이 자사 내 사업심의를 통과할 수 없어 현대건설에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현대건설은 삼성물산이 조합 내부에서 결정한 입찰지침을 변경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지난 7월 현대건설은 한남4구역 조합에 “특정 시공사가 조합의 내부 검토자료인 시공사 선정 계획서를 입수해 조합 측에 입찰지침 변경을 요청했다”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합원과 대의원들의 불안감을 키워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는 공문을 전했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은 “경쟁입찰을 위한 여건 조성을 조합에 요청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한남4구역 대의원회를 통해 시공사 선정계획 변경이 결정됐지만 양사 간 갈등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 밖에 이르면 올해 시공사 선정에 돌입할 곳은 강남 최고 부촌인 압구정, 그중에서도 ‘구현대’로 불리는 최대 재건축 사업인 압구정3구역이다. 압구정3구역 역시 일찍이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현수막을 걸고 홍보전에 돌입했다. HDC현대산업개발도 3파전을 형성하고 있다.

압구정3구역에서도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을 유력한 라이벌로 보고 있다. 조합원들 사이에선 “조합이 어느 쪽에 기울었다”거나 “특정 집단은 누구 편”이라는 유언비어도 돌고 있다. 양사는 모두 이 같은 소문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면서도 시공권 자체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노른자 사업’ 일단 따내고 봐야
현대건설은 고(故) 정주영 회장 시절 주택사업의 상징적 업적으로 꼽히는 압구정 현대 재건축 수주에 사활을 걸고 있다. 1970년대 입주 당시부터 거주한 현대 임직원 출신 주민들의 선호도가 높다는 평이다.

반면 용산과 반포를 비롯해 서울 한강변 랜드마크 조성을 노리고 있는 삼성물산에 압구정3구역은 래미안 브랜드를 달아야 하는 필수 사업지다. 일부 조합원들은 “현대가 무혈입성을 못 하도록 해야 한다”며 삼성물산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남, 압구정처럼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밀집된 지역에선 한 구역을 선점하면 인접한 다른 구역을 수주할 가능성도 커진다.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반포자이’가 위치한 서초구 반포동 소재 재건축 단지 중 유독 삼성물산과 GS건설 시공 아파트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압구정4구역과 4개 지구로 나뉜 성수전략정비구역 역시 성수4지구를 필두로 시공사 선정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들 구역에서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외에도 주요 대형 건설사들 간 수주전이 벌어질지 주목된다.

재개발, 재건축 등 도시정비사업 수주액에서 1위 현대건설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포스코이앤씨와 대우건설, DL이앤씨는 다른 1군 건설사와의 경쟁을 피하며 조용히 알짜 사업을 따내고 있다. 포스코이앤씨는 노량진1구역 재개발, 대우건설은 신반포2차와 신반포16차 재건축 시공사로 경쟁 없이 선정됐고 DL이앤씨도 한남5구역에 단독 입찰해 수의계약이 유력시된다.

올해 들어 이들 시공사의 적극적인 수주활동을 방해했던 여건들도 개선되고 있다. 주택건설 원가 상승세는 둔화하고 있다. 크게 올랐던 철근 가격이 급락했고 시멘트 원재료인 유연탄 가격도 하락했다. 특히 2021년 톤당 130만원을 돌파했던 철근 가격은 최근 70만원대로 반토막 났다. 국내 철강업체들은 감산까지 해가며 가격 유지를 위해 애쓰고 있다.

반면 조합에서 제안하는 공사비 수준은 높아졌다. 한남4구역 도급비는 3.3㎡당 940만원 선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2019년 한남3구역 공사비로 책정됐던 3.3㎡당 598만원보다 대폭 올랐다. 시장에서 공사비 ‘뉴노멀’이 자리 잡으면서 더 이상 몸을 사릴 이유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택지비와 공사비가 함께 오르면서 분양가격도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일부 주요 건설사들은 위축됐던 주택사업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예전에 수주한 국내 현장은 프로젝트마다 100억원씩 손해”라면서도 “결과적으로 저가 수주가 돼버린 현장 대다수는 이미 착공을 한 상태라 이들 사업만 완료되면 힘든 시기를 지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개발 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조합이 설정하는 공사비 예가(예정가격)가 많이 올라 앞으로 적자를 볼 가능성이 크지 않다”며 “올해 들어 집값도 오르고 있어 주택실적이 필요한 건설사 입장에선 재개발, 재건축 수주 노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