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노믹스’ 시즌2가 현실화되면서 국내 산업계가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반도체·2차전지·자동차·철강·신재생에너지 업종은 미국 정책 변화에 따라 투자 전략 수정까지 고려해야 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방산·조선·원전·건설산업은 바이든 행정부와 비교해 우호적 환경이 예상된다.
“녹색 사기·나쁜 거래”…보조금 삭감 가능성
산업계는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축소 또는 폐기 가능성에 주시하고 있다. 트럼프는 반도체법에 비판적 입장을 보여왔다. 트럼프는 최근 팟캐스트에 출연해 “정말 나쁜 거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반도체법은 중국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고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에 반도체 생산 보조금으로 총 390억 달러(약 52조3000억원), 연구개발(R&D) 지원금으로 총 132억 달러(약 18조원)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0조7000억원)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도체법에 맞춰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인공지능(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기지 및 R&D 시설을 건설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64억 달러(9조원), 4억5000만 달러(6200억원)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받기로 했다.
업계에선 반도체법이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준비됐다는 점에서 트럼프 2기가 반도체법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건 어렵다고 본다. 다만 보조금이 축소되거나 추가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은 있다.
산업연구원은 “트럼프 집권 시 보조금 및 세액공제 혜택 축소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며 “지원 혜택 대비 추가 투자 요구가 있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기업평가는 “대통령의 행정 권한에 따라 미국 반도체 업체에 대한 지원 비중을 더 높이거나 동맹국을 대상으로 가드레일 조항 및 보조금 지원을 위한 제반 요구 조건을 높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트럼프 행정부도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수출통제를 유지하거나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반도체, AI, 2차전지 등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중국 등 일부 시장에서 기회를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가 동맹보다는 이익 중심으로 외교 전략을 펼칠 것으로 전망되면서 더 이상 동맹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2022년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중 수출을 제재하면서 동맹국 기업에 제공한 ‘검증된 최종사용자(VEU)’ 지정이 취소될 가능성이다.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VEU 지정에 따라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첨단 초미세 공정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뺀 대부분 장비를 무기한 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2기에서는 대중 제재 강화로 VEU 지정을 취소하거나 새로운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 삼성전자의 시안공장은 전체 낸드 생산의 28%, SK하이닉스의 우시·다롄 공장은 각각 전체 D램의 41%, 낸드의 31% 수준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배터리 보조금, 불확실성 커져
배터리업계도 초긴장 상태다. 미국 정부는 배터리 기업에 셀 1킬로와트시(kWh)당 35달러, 모듈은 45달러를 지급한다. 배터리 양극재나 음극재를 미국에서 가공할 경우 생산 비용의 10%를 보전한다.
수익성이 둔화된 배터리업계는 IRA 첨단제조세액공제(AMPC)에 의존하고 있다. 올해 3분기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이 수령한 AMPC 금액은 각각 4483억원, 608억원이었다. AMPC을 제외하면 사실상 적자다. 보조금이 축소되면 실적은 더욱 악화될수 있다.
트럼프는 IRA를 가리켜 ‘신종 녹색 사기’로 규정하고 당선 후 이를 폐기하고 집행하지 않은 예산을 모두 환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전기차 등에 세액공제 형태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당초 IRA를 폐지하려면 현행법 개정이나 의회 승인이 필요해 전면 폐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공화당이 대선 승리에 이어 상원과 하원까지 장악하는 ‘레드 스윕’을 이루면서 바이든 정부의 주요 법안인 IRA, 반도체법 등이 폐지되거나 개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주민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한 상태에서 IRA를 폐지할 수 있지만 2차전지 투자가 집중되는 미시간·오하이오·네바다 등 지역구에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실제 공화당 내 하원의원 18명과 의장이 IRA 폐지를 반대하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는 1기 재임 시절에도 행정명령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행정명령은 대통령이 의회를 거치지 않고 연방법 입법에 준하는 효력을 낼 수 있는 수단이다. IRA 전면 폐기는 어렵지만 세액공제 혜택을 축소하는 행정명령 발동으로 법 자체를 무력화할 가능성도 있다.
자동차·부품 업계의 경우 IRA 축소 또는 폐지, 보편적 관세 도입 등으로 비우호적인 환경이 예상된다. 친환경 정책 후퇴로 전기차 시장 전반이 위축되며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수요·공급 측면의 니즈(요구)가 확대되면서 북미 빅3(GM·포드·스텔란티스), 현대차그룹, 도요타그룹 등 완성차업체 간 경쟁이 심화할 것이란 관측이다.
일각에선 현대차그룹이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기아 조지아 공장에 더해 조지아에 메타플랜트(HMGMA)를 준공해 현지 생산 능력을 확대한 만큼 부정적인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방산·원전·조선 수혜…철강·신재생에너지 ‘흐림’
철강산업은 트럼프 재집권으로 관세 인상, 국가별 수입 쿼터 축소 등 전통적 무역장벽이 한층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석유 등 전통적 에너지와 화석연료 기반 산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예고하면서 정유산업은 수혜주로 분류되고 있다. 반면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산, 조선, 원전, 건설산업은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정책이 관세와 분쟁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에서 방산, 조선, 원전산업은 관세 우려가 있는 일반 소비재와 달리 미국의 취약한 제조업 빈자리를 메울 수 있고 중국 규제의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조선업은 액화천연가스(LNG) 및 액화석유가스(LPG) 수요 증가로 인해 에너지 운반선 건조에서 강점을 보이는 한국 조선업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이며 트럼프 행정부의 화석연료 중심 정책이 국내 조선업체의 에너지 운반선 건조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가 당선 직후인 11월 7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선박 수출뿐만 아니라 보수·수리·정비(MRO) 분야에 있어서도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방위산업은 트럼프가 동맹국에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는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미 방산 협력에는 일부 불확실성이 예상된다. 그러나 글로벌 자주국방 강화 기조에 따라 한국 방위산업의 수출 확대 기회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원전산업도 훈풍이 불 것으로 기대된다. 트럼프는 원전 허가 취득 절차 간소화, 원자력규제위원회(NRC) 규제완화 등을 공약한 바 있다. 특히 중국·러시아 견제를 위한 FIRST(소형모듈원전 기술 기반 구축 지원) 프로그램이 확대되면 국내 업체들의 미국 진출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건설산업은 트럼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지속적으로 언급함에 따라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이 본격화할 경우 한국 건설사의 해외사업 기회가 확대되는 요소로 전망된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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