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전략 필요한 의정갈등, 신뢰 회복 가능할까[비즈니스 포커스]
느닷없이 던져진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서 시작된 의정갈등 사태가 어느덧 1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환자는 병원에 가지 못하고 병원은 의사 부족과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한때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를 수습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사태 봉합에 나섰다. 정부는 이미 확정된 2025년도가 아닌 내후년도부터는 의대 정원에 대한 협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물러섰다. 2025년도 증원 규모도 당초 계획보다 줄었다. 의료계도 대화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를 위해 꾸려진 여야의정 협의체는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전공의들이 양보 없이 강경한 입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정부 또한 의료계의 신뢰를 잃은 상태에서 ‘밀어붙이기’로 화해의 싹을 잘랐다는 평가다.
의사들 대화 창구는 일원화돼최근 의정갈등은 변곡점을 맞았다. 대한의사협회는 임현택 회장을 임기 시작 6개월 만에 탄핵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새로 꾸렸다. 11월 13일 진행된 투표에서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단국대 교수)가 비대위원장으로 당선됐다.

15인으로 구성된 의협 비대위에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전공의 3명과 의대생 3명이 포함돼 의정 간 대화의 단일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비대위가 꾸려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의료계 내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되던 임 전 회장은 올해 3월 의협 수장으로 선출됐다. 2월 정부가 2000명 규모의 의대 정원 확대를 포함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발표한 뒤 반발이 한창이었던 때다. 전공의들은 집단 사직을 이어가고 의대생들도 동맹 휴학하는 등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투쟁이 이어졌고 그는 ‘투쟁형 인사’로 비쳤다.

그러나 막상 임기를 시작하자 임 전 회장은 각종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켜 의사들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고 심지어 같은 의사 집단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내부에선 임 전 회장이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고 그의 임기 동안 의사들의 투쟁 동력도 오히려 약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와중에 정부는 의료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의대 증원을 일단 밀어붙였다. 3월에는 교육부가 의과대학별 정원을 발표했고 5월에는 전국 의대로부터 증원 감축 신청을 받아 2000명이던 2025학년도 증원 규모는 1509명으로 줄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제2차 대학입학전형위원회에서 각 대학이 제출한 전형계획을 통과시켰고 7월에는 12개 의대가 수시모집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8월 말 국회에선 진료지원(PA) 간호사를 합법화하는 간호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PA 간호사는 의사의 수술 집도 등을 보조하면서 의사의 처방하에 의료행위를 일부 담당할 수 있다. 정부에선 시행령 등을 통해 구체적인 업무를 정하고 내년 6월 시행할 계획을 밝혔다. 의정갈등에 앞서 같은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썼던 법안이다.

정부는 또 10월부터는 상급병원의 일반병상을 줄이고 중증환자·전문의 중심으로 바꾸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사업’ 지원 병원을 지정했다. 결국 임현택 전 회장은 11월 10일 탄핵을 피하지 못했고 의협 비대위가 구성됐다.
알짜 빠진 여야의정 협의체일각에선 낮은 수가 속에 입원환자 관리와 당직근무 등으로 인력부족을 메우던 전공의들이 한 해 내내 의료현장을 떠나도 되는 것인지 점차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당장 병원 정상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제는 이들에게 퇴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비대위 구성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각 수련병원 전공의 대표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는 등 ‘강 대 강’으로 나가던 정부도 의료공백 장기화로 여론이 악화하자 ‘당근’을 내밀었다. 6월 4일 전공의들이 복귀하면 면허정지 행정처분을 내리지 않는 한편, 사직서를 낸 기간 동안 수련 시간을 채우지 못해 전문의 자격시험을 보기 어려운 3~4년 차 레지던트들에게는 추가 시험을 보게 해준다고 밝혔다. 지난 10월에는 각 대학이 의대생 휴가를 승인하는 것을 허용했다.

정치권도 나섰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안한 여야의정 협의체가 9월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협의체에서 이미 입시를 시작한 2025학년도 의대 정원 외에 2026학년도부터 의대 증원 규모 협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애초에 제기됐던 ‘신뢰성’은 계속 협상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제는 다시 필수의료정책 패키지의 핵심인 ‘2000명 증원’으로 돌아간다. 매년 의대생 모집 규모를 2000명씩 늘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정당성 문제는 초기부터 제기됐다. 국회 청문회에서는 정책 발표 전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에서도 이견이 있었는데 추가로 논의하는 자리가 열리지 않고 기존 증원 방안이 신속히 추진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급증한 의대생을 교육할 시설, 인력 부족의 문제도 있다.

박형욱 신임 의협 비대위원장은 “직접 의협과 정부의 양자 협의체인 의료현안협의체에 직접 참여했었고 거기서 의대 증원 규모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는데도 정부는 19차례 협의했다고 주장했다”며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한 관계자 처벌을 요구했다.

박 위원장은 첫 비대위 출범 기자간담회에서도 “대다수 국민은 파행적 의료사태가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랄 것이며 의사들도 당연히 그렇다”면서도 “선배 의사가 전공의와 의대생을 설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정부를 믿으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가장 큰 의사단체이자 유일한 법정단체인 의협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전공의들은 여전히 2025년도부터 증원 수도 논의 대상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협상 요청이 ‘구색갖추기용’이 아니라는 확신을 줄 만한 ‘통 큰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의협 관계자는 “정말 결정권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서로 원하는 것을 툭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며 “아직 정부로부터 비대위가 대화 요청을 받지도 않은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의대생 증원 외에도 정부가 추진 중인 필수 의료수가 개선, 전문의 중심 병원 등을 그동안 몰라서 못 한 것이 아니다”며 “병원 수익이 낮은 탓에 임금이 상대적으로 싼 전공의들을 뽑아 최대한 일을 시켰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내 상급종합병원은 적자가 만연한 구조다.

받을 수 있는 환자 수가 대폭 감소한 상급종합병원들은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의정갈등이 예상보다 장기화하면서 경영 악화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총 3조원이 투입되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사업에는 소위 ‘빅5’ 중 삼성서울병원을 제외한 4개 병원(서울대병원·세브란스·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이 참여한다.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자세한 지원 규모나 방식은 모른다”고 말했다.

금기창 연세의료원 원장은 “의정갈등이 시작된 올해 상반기에만 1200억원이 넘는 손실이 예상된다”며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에 참여하며 체질 개선을 시도하고 있지만 경영 손실은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