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대기업 인사 키워드
국내 주요 그룹이 사장단과 임원 인사를 마무리했다.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기술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만큼 변화와 생존을 위한 인적 쇄신에 돌입했다.공통점은 위기 대응이다. 임원 승진은 축소됐고 트럼프 2기를 대응하기 위한 인재도 등용됐다. 각 기업의 현안과 미래 전략을 반영한 특징도 뚜렷하게 구분된다. 현대차는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찍고 트럼프 2기 대응에 적합한 인재를 등용했다. LG는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조직 개편에 집중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 경쟁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인사를 진행했으며 재무라인의 존재감이 커졌다. SK는 재무구조 개선과 조직 효율화를 목표로 리밸런싱에 나선다.
내수 부진으로 업황이 악화된 유통업계는 큰 변화를 꾀했다. 빠르게 생존 전략을 짜고 새로운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파격적인 결정이 두드러졌다. 신세계는 정유경 총괄사장이 9년 만에 회장단으로 올라서면서 계열분리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롯데는 비상경영 체제를 선언하며 경영 안정화를 핵심 목표로 삼았다. 신유열 미래성장실장 전무의 부사장 승진도 이번 인사의 핵심 포인트다. 신 부사장은 바이오 CDMO 등 그룹의 신사업과 글로벌사업을 직접 이끌 전망이다. 롯데그룹이 본격적인 3세 경영의 신호탄을 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차, 트럼프 2기 대응 위한 전문가 결집 현대차그룹에서는 첫 외국인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했다. 3년 전 사라졌던 부회장직도 부활했다. 성과·능력주의, 글로벌 최고 인재 등용이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인사 기조에 따른 것이다.
지난 11월 15일 현대차그룹은 장재훈 현대차 사장을 부회장으로 선임했고 대미 통상 대응을 위해 호세 무뇨스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사장을 외국인 첫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두 사람 모두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수익성을 끌어올리고 기민한 시장 대응에 나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외교 관료 출신인 성 김 현대차 고문역은 글로벌 경제안보 위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사장으로 영입한다. 성 김 사장은 부시·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핵심 요직을 맡아온 국제 정세에 정통한 전문가다.
미 국무부 은퇴 후 지난 1월부터 현대차 고문역으로 합류해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통상·정책 대응 전략, 대외 네트워킹 등을 지원해왔다. 성 김 고문역은 사장으로 승진 후 글로벌 대외협력, 국내외 정책 동향 분석과 연구, 홍보·PR(공중관계) 등을 총괄한다.
북미 시장은 현대차 판매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내년 트럼프 2기에서 자동차 산업이 관세정책의 타깃일 될 수 있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축소나 폐지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만큼 대미 전략에서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들로 최고위직을 꾸린 것으로 풀이된다.
최대 실적을 달성한 기아에서는 국내 생산 담당 및 최고안전보건책임자인 최준영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현대글로비스 이규복 대표이사 부사장은 재무건전성을 대폭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장으로 승진한다.
반면 건설업 불황으로 실적 쇼크를 겪고 있는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 대표는 바로 교체됐다.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로는 그룹 대표 재무전문가로 불리는 주우정 기아 재경본부장이 선임됐다.
SK그룹도 12월 초 사장단 인사를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올초부터 사업 전반에 리밸런싱을 내건 SK의 인사 기조는 ‘조직 슬림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부회장 4명이 일선에서 물러난 만큼 인사 폭이 크지 않을 거란 관측도 있지만 사업 재편에 따른 인력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SK는 계열사 임원 수를 최대 20% 줄일 것으로 전해졌다. LG, 승진자 줄었지만 R&D는 역대 최대LG그룹은 안정에 초점에 둔 인사를 진행했다. 주요 계열사 대표가 유임됐고 신규 부회장 승진자는 없었다. 전체 승진자는 121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3%가량 줄었다.
조직 슬림화, 승진 규모 축소를 통해 의사결정의 속도를 높이고 대외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해나가겠다는 복안이다. 대신 미래 성장동력에 기술 인재를 대거 등용했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이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 분야에서 신규 임원 23%를 발탁했다. 그룹 내 R&D 분야 임원 수는 역대 최대인 218명으로 늘었다.
권봉석 LG 부회장과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내년에도 유임해 2인 부회장 체제를 유지하며 내년에 회장 8년 차를 맞는 구광모 회장을 보좌한다.
신규 CEO와 사장 승진은 ABC 분야에서 주로 이뤄졌다. 통신과 함께 AI 기반 신사업 확대에 나선 LG유플러스 신임 CEO에 홍범식 LG 경영전략부문장이 선임됐다.
LG전자는 ES(Eco Solution)사업 본부를 신설하고 신임 본부장에 이재성 부사장을, LG화학은 석유화학사업본부장과 첨단소재사업본부장에 각각 김상민 전무와 김동춘 부사장을 선임하며 세대교체에 나섰다. 또한 미래 성장 모멘텀을 만들어 온 LG전자 한국영업본부장 김영락 부사장과 AI 기반 디지털전환(DX)을 이끌고 있는 LG CNS CEO 현신균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1980년대생 임원도 늘었다. 이문태 LG AI연구원 어드밴스드 ML 랩장(수석연구위원)과 이진식 엑사원 랩장(수석연구위원), 조현철 LG유플러스 상무 등 AI 분야에서 글로벌 수준의 연구 역량을 갖춘 1980년대생 3명이 임원으로 신규 선임됐다. 이번 인사를 통해 LG 내 80년대생 임원 수는 모두 17명이 되며 5년 새 3배로 늘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수요 둔화를 겪고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24명이던 승진자가 올해는 40%가량 줄었다.
신세계그룹은 정유경 총괄사장이 신세계 회장으로 승진하며 계열분리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룹을 백화점 부문과 이마트 부문이라는 두 개로 분리해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으로, 이번 인사를 시작으로 계열분리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위기엔 ‘재무통’…다시 등판한 해결사들 위기 때마다 그룹의 ‘해결사’ 역할을 했던 재무 전문가의 존재감은 커졌다. GS는 홍순기 GS 대표이사 사장을 그룹 내 유일한 부회장으로 내정했다. 오너가를 제외한 전문경영인으로서는 2019년 말 정택근 부회장 퇴임 이후 5년 만의 부회장 탄생이다. 홍 부회장은 LG 구조조정본부를 거쳐 2004년 (주)GS 출범과 함께 자리를 옮겨 업무지원팀장과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을 역임했다.
홍 부회장은 GS가 LG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20여 년간 그룹의 성장을 지원해 온 조용한 조력자이자 재무와 사업, 조직 전반에 대한 전문성을 보유한 허태수 GS 회장의 ‘믿을맨’으로 통한다. GS그룹의 에너지 관련 계열사 경영진으로 관료 출신 정책 전문가들이 전면에 나섰고 건설 부문 조직은 슬림화했다.
CJ그룹 역시 ‘재무통’인 허민회 CJ CGV 대표를 지주사 CJ 경영지원 대표로 선임했다. 허 대표는 그동안 경영에 위기를 겪는 계열사를 맡아 재무개선에 나서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2012년 위기에 처한 CJ푸드빌의 대표로 발탁돼 경영 정상화를 진행했고 이후 2014년 CJ올리브네트웍스의 대표를 맡아 CJ올리브영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2016년에는 CJ온스타일의 대표를 맡아 CJ ENM 합병을 주도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적자 위기에 처한 CJ CGV 대표로 자리를 옮겨 1조원 규모의 자본조달을 주도했다. CJ는 그룹 최초로 30대 CEO를 과감히 발탁하는 등 젊은 인재 선발 기조도 이어갔다. CJ CGV 자회사 CJ 4DPLEX 신임 대표에 1990년생 방준식 경영리더를 선임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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