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형→무죄→유죄 파기환송
건설공사발주자·도급인 구별 기준 첫 제시
IPA는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업체이며 IPA의 안전보건총괄책임자인 최 전 사장에게 안전보건조치 의무가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을 통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따른 형사처벌 규정의 해석과 관련해 건설공사발주자와 도급인의 구별 기준에 관한 법리를 처음으로 내놓았다.
2심 “시공 수행 자격·능력 없어” 무죄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1월 14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IPA와 최 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상고심 재판부는 “원심 판결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건설공사발주자와 도급인의 구분,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조치의무 위반으로 인한 근로자 사망 및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의무위반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IPA는 2005년 7월부터 국유재산인 인천항 갑문 시설 관리를 위탁받아 유지·보수 등을 담당했고 다른 업체와 도급계약을 맺어 인천항에 있는 8개의 갑문을 매년 2개씩 정기적으로 보수했다. 2020년 3월에는 인천항 갑문 정기보수공사 입찰을 통해 선정된 A사와 공사계약을 맺었다.
최 전 사장은 이 무렵 취임했다. A사 근로자인 B 씨는 2020년 6월 아침 갑문 위에서 18m 아래 갑문 바닥으로 H빔 등을 내리는 작업을 진행하던 중 추락했다. B 씨는 119구급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치료 중 사망했다.
IPA의 안전보건총괄책임자인 최 전 사장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2022년 4월 기소됐다. IPA도 최 전 사장의 행위에 대한 양벌규정이 적용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최 전 사장 등이 공사 현장에 안전대를 안전하게 걸어 사용할 수 있는 안전대 부착설비를 설치하지 않고, 중량물인 H빔 취급 작업을 하면서 작업계획서를 작성하지 않는 등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봤다.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정기감독 관련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도 적용했다.
검찰은 사고 발생 후에도 사무실 앞에 놓인 비계강관 자재들에 대한 넘어짐 방지조치를 하지 않았고, 추락단부에 근로자 추락방지를 위한 안전난간 등을 설치하지 않은 것도 법에 어긋난다고 봤다.
또 내부 또는 하부 등과 같은 밀폐공간 작업 시 필요한 공기호흡기 또는 송기마스크 등을 갖춰 두지 않았고, 내부 또는 하부 등과 같은 밀폐공간 작업에 관한 프로그램을 수립·시행하지 않은 사실도 지적됐다.
재판에선 IPA를 도급인으로 볼 것인지, 산업안전보건법상 형사책임에서 제외되는 건설공사발주자로 볼 것인지가 쟁점이 됐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건설공사 현장에서 안전보건조치의무를 위반해 관계수급인의 근로자가 사망한 경우 건설공사를 도급하는 사업주 중 시공을 주도해 총괄·관리하는 자는 도급인에 해당해 형사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다만 시공을 주도해 총괄·관리하지 않은 건설공사발주자는 도급인이 아니라고 보고 형사책임을 부담하지 않도록 정하고 있다.
1심 재판부는 “IPA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건설공사발주자’가 아니라 ‘사업주’이자 ‘도급인’에 해당한다”고 보고 최 전 사장에 대해 징역 1년 6월, IPA에는 벌금 1억원을 선고했다.
구체적으로 인천항 갑문 공사가 IPA의 핵심 사업 중 하나라는 점, IPA의 인력이나 자산·시설 규모가 시공을 했던 민간업체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또 IPA는 갑문 공사에 대한 업무보고를 정기적·지속적으로 작성했고 갑문 공사 감독일지를 작성하거나 수급업체의 공사 공정률을 매주 단위로 점검한 점도 뒷받침이 됐다.
하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IPA가 건설공사 시공을 직접 수행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며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 “도급인으로서 실질적 영향력 행사”
대법원에서 또다시 판결이 뒤집혔다. 상고심 재판부는 “IPA는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른 건설공사 시공자격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갑문 정기보수공사의 시공을 주도해 총괄·관리하는 자”라며 “단순한 건설공사발주자를 넘어 수급 사업주와 동일한 안전보건조치의무를 중첩적으로 부담하는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IPA는 항만 핵심시설인 갑문의 유지·보수에 관한 전담부서를 두고 있고 갑문 정기보수공사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산업재해의 예방과 관련된 유해·위험 요소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갑문 정기보수공사에 관한 높은 전문성을 지닌 도급 사업주로서 수급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최 전 사장의 안전보건조치의무 위반과 B 씨의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도 인정했다. 사고 당시 최 전 사장은 안전보건기준규칙이 정한 중량물 취급 시의 사고 위험이나 근로자의 추락 위험 방지 조치 등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B 씨 등이 H빔을 내리는 작업을 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것이다.
이어 상고심 재판부는 “최 전 사장은 B 씨의 사망사고가 발생한 지 약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사고 현장에서 사업주가 근로자의 재해 및 건강장해 예방을 위해 취해야 할 안전보건조치를 다하지 않았다”며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돋보기]
도급인·건설공사 발주자 구분 기준 법리 선언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인지 건설공사 발주자인지 여부는 산업재해에 대한 원청의 유무죄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동안 두 가지를 구분하는 판단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 판례가 없어 산업 현장에서 혼란이 이어져 왔다.
앞서 울산지법은 “도급인과 관계수급인의 주된 업종, 안전교육 실시 주체, 안전교육 성격, 공사 특성 등을 검토해 도급인이 시공을 주도해 총괄·관리했는지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준을 제시했다.
다만 이 판결은 2심에서 항소 기각으로 종결돼 대법원 판단까지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인천항 근로자 사망’ 사건이 대법원 판단을 받으면서 판단 기준에 대한 현장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우선 건설공사를 도급하는 사업주가 자신의 사업장에서 사망한 관계수급인의 근로자와 관련해 산업안전보건법 제167조의 형사책임을 부담하는 도급인에 해당하는지는 법 규정의 해석과 함께 도급 사업주가 자신의 사업장에서 시행하는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재해 예방과 관련된 유해·위험요소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급 사업주가 해당 건설공사에 대해 행사한 실질적 영향력의 정도, 도급 사업주의 해당 공사에 대한 전문성, 시공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규범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건설공사 도급과 관련한 안전보건조치의무 및 그 위반에 따른 형사처벌 규정의 해석과 관련해 건설공사발주자와 도급인의 구별 기준에 관한 법리를 최초로 설시했다”고 설명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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