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경제교사', 전 주미대사 조윤제 교수
사회 시스템 핵심은 '인센티브 구조'
보상유인체계가 인재의 흐름, 자본의 흐름 결정
인센티브, 한국 관료 전문성 뒤쳐지는 이유
한국 사회 갈등, 정치가 부추기고 이용해
'실사구시' 측면에서 정당·국가 지배구조 재편 필요
내각제, 지금 한국 정치에는 안 맞아
대통령에 강력한 자문기관 필요
조윤제 연세대 특임교수 인터뷰 “외환위기는 ‘위장된 축복’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큰 비용을 치르고 있는 계엄과 탄핵 사태 역시 ‘좋은 위기’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계엄과 탄핵으로 맞이한 위기를 국가시스템 개혁을 위한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으며 기업들의 재무건전성을 높이고 경제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선진경제로 진입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경험을 기반으로 “이번 계엄과 탄핵 위기 역시 양극화된 정당제도를 개선하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 지배구조를 개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금융, 외교, 경제정책 분야를 두루 거친 경제 전문가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지내 ‘노무현의 경제교사’로 불렸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제 자문가로 활약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주미대사로 일하며 한국 경제 안팎에서 독보적인 경륜을 쌓았다. 조 교수는 한국의 경제시스템 혁신을 위해서는 인사시스템과 인센티브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2기를 앞두고 한국의 ‘외교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상외교는 국가 정상끼리 하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정상이지만 정상외교를 선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입장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외교 스타일이 거래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만큼 조기에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게 상당히 중요한데 그 점은 아쉽다. 하지만 한·미 관계 자체는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동맹이 아니다."
-최근 많은 선진국이 한국과 반대로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도 미국이 하는 것처럼 산업지원금, 관세 등 산업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이고 개방적 무역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다. 우리는 다자간 교역질서의 강화 및 유지를 지향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가 미·중 대결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어느 한 편에 서서 다른 한 편을 견제 또는 위축시키려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우리 국익을 위해 도움이 될지 확신할 수 없다. 미국 산업정책에 대한 대응과 전략적 제휴와 관련된 판단은 기업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한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세계가 미·중 갈등을 관리해 나가도록 만들어야지 미·중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면서 각자 편을 가르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 퍼스트의 다른 해석은 신고립주의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중국 경제 상황을 두고 ‘피크아웃’이라고 해석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기술 및 경제 격차는 계속 줄고 있다.
얼마 전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가 발표한 ‘핵심 기술 추적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연구논문 인용 횟수를 기준으로 64개 핵심 기술 중 57개 부문에서 1위였다. 반면 미국은 7개에 그쳤다. 정부 주도 R&D가 민간 주도 R&D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장기적 자원을 관리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기술,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도 외교적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는 할 수 있다. 기업은 한국의 큰 강점이자 외교적 자산이기도 하지만 기업을 외교의 도구로 지나치게 이용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통령마다 정상외교를 할 때 기업 CEO들을 끌고 다니면서 외교를 하는 장면은 선진국 외교 모습으로는 낯설다.
그들 중에는 법적 송사에 놓인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도 있다. 정상외교에 그들을 데리고 다닐 때 그들이 객관적 투자결정을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우리 경제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의 오래된 사회 경제 시스템이 수명을 다했다는 의견이 있다.
“모든 시스템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공감한다. 시스템 혁신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사회 경제 시스템의 핵심은 제도가 가진 인센티브 구조, 즉 보상유인체계라고 생각한다.
보상 체계가 그 사회 인재의 흐름과 자본, 물자의 흐름을 정하고 성장동력을 이끈다. 시장에서의 인센티브 구조는 결국 시장의 가격시스템으로 형성된다. 국내 시장 가격은 글로벌 시장에 맞춰져 있는데 한국의 정치, 사회 운용 방식은 1970~80년대의 낡은 시스템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공 부문의 인사보상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인재의 흐름을 주관하는 것은 단순히 임금수준뿐 아니라 그 직에 종사하는 인재들의 자존감, 명예, 그들이 기대하는 평생 소득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 공공부문, 특히 중앙부처 관료들에 대한 인사보상시스템으로는 이 부문에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에나 국가와 행정관료의 역할은 중요하다. 바뀐 시대에 맞는 인사보상제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사보상 구조 개혁만으로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그것만으로는 안되겠지만 중요한 요소다. 오늘날과 같이 기술과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정책 부문에 외부 전문가 수혈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연봉 수준에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낮은 공무원 임금 수준, 획일적 임금 수준으로는 앞으로 공공부문 전문성과 서비스 질은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
국가 운영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도 인사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 한국은 주요직의 임기가 너무 짧고 그들이 장기적 시각을 가지고 일하기 어려운 구조다. 심지어 임기가 있는 자리도 잘 지켜주지 않는다.
임기가 있는 직책은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한 것이다. 금융위원장, 공정거래위원장, 금융감독원장, 검찰총장 등은 정치적으로부터 중립성, 독립성을 요하는 자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임기를 다 채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 제도의 취지와 다른 운영을 하기 때문이다. 그 비용은 국가와 국민, 시장에 전가된다.
또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다른 선진국들 관료에 비해 한국은 전문성에서 뒤져 있다. 전반적 혁신을 위해서는 유능한 공무원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전문성을 쌓고 자식들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있을 만큼 보상을 해줘야 한다.”
-한국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세대, 젠더, 이념적 갈등이 한 시기에 응축돼 나타난다.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며 사회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정치도 거기에 따라 불안정해지고 있다. 우리는 특히 더 심하다. 우리의 '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서구사회가 2~3세기에 걸쳐 마주쳐온 변화를 불과 반세기에 걸쳐 소화해야 하는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압축성장의 빛과 그림자가 어느 나라보다 짙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과정을 불과 한두 세대에 거쳐오면서 우리 국민들은 높은 스트레스를 겪었다.
결국 전통사회에서 근대도시사회로 빠르게 변해오면서 그 변화에 맞는 새로운 자아관,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가치관은 혼란스럽고 물질주의가 만연했다. 성공과 행복의 잣대가 다양해지지 못하고 같은 잣대로 평가하다 보니 거기에서 나오는 경쟁 심화, 갈등 심화가 필연적이었다." "내각제, 지금 한국 정치에 안 맞아"
-정치는 갈등 해결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우리 정치는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증폭시켜 자신들의 권력투쟁에 이용하려는 면이 있다. 매사가 정쟁거리가 되는 오늘날의 몰가치적이고 극단적인 정당 대치가 바뀌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정당구조의 재편, 정당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국가 지배구조, 권력 구조의 재편이 필요하다.”
-정치구조 개혁 방안 중 내각제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내각제는 지금 한국 정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제도 문제는 있다. 국회도 직접 뽑아서 민주주의 정통성을 가진 기관이고 대통령도 직접 뽑은 헌법기관이다. 이 둘이 서로 다른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충돌하면 국가가 입법 교착, 정책 교착에 처한다. 대통령제의 가장 큰 문제다.
내각제는 의회 권력이 바로 행정 권력을 장악하는 만큼 정책 추진에 대한 효율성이 있다. 또 임기 내 인기가 떨어지면 언제든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책임성과 효율성에 대한 상당한 장점이 있다.
그런데 한 나라 정치체계는 그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시민들의 행동 양식, 국민 의식에 맞춰 제도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한국에 내각제를 그대로 갖다 놓으면 아주 독특한 변종이 생길 수 있다.”
-우리에게 맞는 정치 제도는 무엇인가.
“대통령제다. 프랑스 국기는 3색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한다.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국민들의 논쟁 과정에서 발전한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국기는 국가 형성 과정을 담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태극기는 우주 만물의 조화와 성리학 정신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사고와 행동양식, 인식의 저변에는 아직까지 성리학 교육의 유산이 남아 있다. 지금 우리나라 국가 지배구조 개편을 생각할 때는 ‘실사구시’적 측면에서 우리 스스로를 잘 알고 해야 한다.
이념적, 이상적 제도만을 좇다 보면 우리에게 잘 맞지 않은 옷을 입게 되고 결국 원래 기대와 달리 형식적 제도로만 그치기 쉽다. 그런 면에서 나는 중임이 가능한 대통령제가 우리에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제의 문제, 정책 교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대통령에게 강력한 자문기관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생각이나 판단이 정제되고 견제돼서 정책으로 나와야 한다. 자문기관은 지금까지와 같이 형식적이고 보여주기 위한 기구여서는 안된다.
대통령이 정책 결정에 있어 반강제적으로 경청하고 심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 총리실의 경제정책 사령탑 역할을 하는 ‘경제 7인(경제재정자문회)’이나 독일의 ‘파이브 현인회’라 불리는 경제전문가위원회처럼 강력하고 실질적인 기관이 필요하다.”
-한국을 보는 외국인이나 외신은 특히 ‘경쟁’을 우리 사회의 갈등 요인으로 꼽는다.
“한국은 경쟁이 매우 치열한 사회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경쟁이 충분치 않은 사회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에게는 어쩌면 가혹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일부 기득권은 과보호되며 여전히 지대(rent)를 누리는 '지대사회'를 살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경쟁이 충분치 않다고 보나.
“어느 한 관문을 통과하기까지는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그 이후 전문성을 갖춰가는 과정에서의 경쟁은 충분하지 않다.
행정고시, 의대 시험, 사법시험 또는 법학전문대학원 등에 대한 입학 경쟁은 치열하지만 이런 문을 통과하고 나면 평생 그 지대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나라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대학에서는 조교수에서 부교수, 정교수로 승진하는 과정의 심사가 매우 엄격해 탈락률이 절반 이상이 되기도 한다. 영국은 장관도 역할마다 봉급이 다르다. 한국은 장관이든 교수든 봉급과 보상이 획일화돼 있다. 그 결과 전문성의 향상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부족하다.
OECD 통계에 의하면 대학 졸업 후 직장에서 향상되는 인적자본 수준은 우리나라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 또한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에서도 노동생산성이 아주 낮은 나라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5~10%의 엘리트가 국가를 끌고 간다. 그 엘리트들이 어느 정도의 정신적 소양과 도덕성, 헌신, 전문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국가 경쟁력이 결정된다.”
-2025년이다. 위기극복을 위한 희망의 단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이다. 한국이 가진 자산은 사람밖에 없다. 산업은 중국이 석유화학, 철강, 조선 등 거의 모든 제조업에서 저가 공세로 한국을 따라잡았다.
이제 한국에서 필요한 건 세대교체다. 한국의 2차 베이비부머(20대 후반~40대 초반) 세대는 전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고 정보 흡수력, 정보 수집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세대인 만큼 다양한 측면에서 훈련돼 있다. 거기다 상당한 자신감까지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정치도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위기 극복 역사를 써온 한국인만의 DNA가 있다고 생각하나.
“DNA보다는 기후나 풍토가 민족의 기질에 미치는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악산악인’이라는 말이 있다. 산악이 거칠면 사람이 거칠다는 의미다.
우리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서 내려다보면 ‘이 땅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참 강인해야 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리더도 중요하지만 한국은 국민이 강한 나라다. 위기가 닥쳤을 때 늘 국민이 먼저 나서서 극복해왔다. 2025년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윤제 교수는...
조 교수는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선임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했다. 귀국 후에는 한국조세연구원 부원장, 기획재정부 장관 자문관 등을 역임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 경제보좌관으로 발탁되며 본격적으로 정책과 행정 경험을 쌓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 캠프에서는 싱크탱크 소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다가 정부 출범 후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트럼프 1기 행정부를 경험했다. 2020년부터 2024년 초까지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내며 코로나19 이후 통화정책 설계에 기여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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