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민초들은 그렇게 해방을 이뤄냈다. 산업화도 마찬가지였다.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 월남 파병 용사들, 중동에 나간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산업화의 토대가 됐다. 암울한 군사독재도 민초들의 힘으로 걷어냈다. 그렇게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세계 유일한 나라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때도 그랬다. 그해 1월23일 재계 14위인 한보그룹이 부도처리됐다. 재계 26위인 삼미그룹과 진로그룹, 삼립식품, 대농그룹, 한신공영이 줄줄이 부도대열에 합류했다. 7월15일엔 재계 8위 기아그룹이 두 손을 들었다.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라는 수렁에 빠졌다. 졸지에 IMF(국제통화기금)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됐다.
이번에도 국민들이 나섰다. 1998년 1월5일 시작돼 4월에 끝난 금모으기 운동에 351만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모은 금이 227톤. 이 금을 수출해 22억달러를 마련, IMF구제금융 상환자금으로 썼다.
이에 감동받아서일까. IMF는 초고금리정책을 철회했다. 1998년 연23%이던 기준금리는 1999년1월 5.25%로 하락해 외환위기 직전을 밑돌게 됐다. 일부 대기업과 금융자본, 정치권력이 초래한 외환위기를 국민들의 힘으로 극복한 세계에서 보기드믄 사례다.
그렇다면 온통 잿빛 투성이인 2025년은 어떨까. 대통령이 던진 ‘계엄령 폭탄’의 잔해는 여전히 수북하다. 코스피지수는 뒷걸음질중이다. 그렇지 않아도 2024년 세계 꼴찌 수익률을 기록했던 한국 증시다.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460원을 넘나든다. 내수는 침체일로이고, 수출마저 주춤하고 있다. 기업 절반은 새해 경영계획을 세우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반도체특별법’ 조차 통과시켜 주지 않고 있다. 출범을 앞둔 트럼프 2기는 벌써부터 관세장벽을 높게 쌓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대응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번 위기도 국민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개방경제인 우리 경제 특성상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원·달러 환율을 보자. 환율은 두가지 영향을 받는다. 국내적 요인과 대외적 요인이다. 한보그룹이 부도난 1997년 1월23일 환율은 달러당 850원20전에서 그해 3월말 899원55전으로 오르더니, IMF 구제금융 신청이후인 12월23일 1995원까지 치솟았다. 순전히 국내적 요인이 작용했다.
최근엔 다르다. 계엄령 선포 전날인 2024년 12월2일 1401원70전이던 환율은 12월26일 1465원70전까지 올라 2009년 3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상승폭은 한보그룹 부도직후보다 더 가파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의 말을 빌리면 “(계엄과 탄핵사태라는) 국내적 요인과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강달러라는) 대외적 요인이 반반으로 작용한 결과”다. 국내가 불안해서 빠져나가는 달라도 많지만 강한 미국을 기대하고 빠져나가는 달러도 상당하다는 얘기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그래도 새해는 새해다. 수많은 국난을 극복해 왔던 우리 국민과 기업들이 이번에도 해낼 것으로 믿는 수 밖에 없다. ‘트럼프 피벗’으로 얘기되는 대외적 환경변화에 대처할 사령탑도, 혜안을 제시하는 지식인도 없다는 것이 큰 문제지만 말이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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