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선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에 대한 기대감이 형성됐다. 하지만 김 수석은 부양책 대신 과감한 안정책을 들고 나왔다. 임금과 농산물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민영화되기 이전이었던 은행을 활용했다. 임금 인상률이 높은 기업에 대출을 제한한 것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81년 10~15%였던 주요 대기업 임금 상승률이 1년 뒤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25%였던 추곡수매가 인상률은 10%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했다. 야당은 물론 농수산부에서도 반발했다. 국회 및 당정 협의를 통해 1981년 추곡수매가 인상률은 14%로 결정됐다.
물가를 잡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유권자인 근로자와 농민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수행하기 쉬운 과제가 아니었지만 김 수석은 물가를 잡기 위해 ‘인기 없고 저항 심한’ 정책을 고집스럽게 끌고 나갔다. 1981년 물가상승률은 21.6%였다. 1년 뒤 7.1%로 떨어졌다. 1980년대 말까지 2~3%대를 유지했다.
경제 리더십으로 자칫 수렁에 빠질 뻔한 1980년대를 먹고살 만한 시대로 바꿔준 것을 보여준 사례다.
2025년, 안 그래도 부진했던 내수(국내 소비)가 계엄 사태와 탄핵정국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커져가는 불확실성에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며 골목 상권은 꽁꽁 얼어붙었다. 정치권의 공방 속에 리더십이 실종됐다. 조타수를 잃은 공무원들은 일손을 놓았다. 2025년 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과장된 얘기로 치부하기엔 부동산에 묶인 가계부채 문제와 트럼프발 고율관세, 강달러, 산업 경쟁력 약화 등 뇌관이 도처에 깔려 있다.
침체 우려에 빠진 한국 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 리더십이 어느때보다도 절실하다. 우리 경제의 고비 때 해결사 역할을 수행한 김재익, 이헌재, 윤증현 등 역대 경제수장들의 리더십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다.
혁명적 발상
김재익 전 경제수석
김재익 전 경제수석은 그 시절 빼놓을 수 없던 관료였다. 경제 안정화와 자유화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물가를 잡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꿨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가 고속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0년대 한국은 정부 주도 성장으로 만성적인 재정적자였다. 그는 재정 건전성을 확보해 물가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당시 대통령 전두환을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제도가 ‘영점 기준 예산’이다. 전년 금액을 기준 삼지 않아 항목에 따라 삭감하는 것이 가능해져 전체 예산 규모를 줄이는 효과를 냈다. 1984년엔 아예 예산을 동결해 버리기도 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해소는 물가안정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 산업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독과점법 제정, 수입 자유화를 추진했다. ‘경쟁이 살아나면 가격은 잡히고 인플레 요인이 사라진다’는 철학이 바탕이 됐다. 당시 공정거래담당관이었던 전윤철(2002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 역임)에게 공정거래제도 도입의 추진을 지시했다. 외국 상품을 국내에서 살 수 있도록 규제로 닫혀 있었던 소비 시장도 활짝 열었다. ‘양담배 피우고 외제차 끌면 매국노’ 소리를 듣던 당시로는 혁명 같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 1983년 10월 발생한 아웅산 테러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외환위기 극복의 주연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역대 경제수장 중 존개감 최고는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전 부총리는 보통 사람들은 한 군데도 경험하기 어려운 청와대·행정부·대선캠프·대기업 등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 경제수장을 맡았던 이 전 부총리는 재임기간 내내 경제가 어려웠지만 위기를 개혁의 기회로 삼았다.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초대 금융감독원장과 재경부 장관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대주주와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하고 기업 스스로 재무구조를 개선하며 은행권과 합의해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원칙을 세웠고 흔들림 없이 추진해 조기 국제통화기금(IMF) 졸업에 기여했다.
그의 별명은 ‘(부실기업) 저승사자’였다. 대기업 계열사를 업종별로 맞교환하는 대규모 사업교환(빅딜)과 대형은행 통폐합 등을 혹독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재계 서열 2위였던 대우그룹이 해체됐고 시중은행은 14개에서 8개로 줄어들었다. 이 전 부총리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당시 칼을 뽑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아무도 장담하긴 어렵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설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엔 카드사 부실 사태를 직면했다. 이른바 카드 대란 사태로 경제가 흔들렸을 때 신용불량자 대책과 중소기업 지원, 벤처 활성화, 종합투자계획을 통한 건설경기 연착륙 대책 등 정책을 쏟아냈다. 청와대 내부에서 견제와 반대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물러서지 않고 정책을 관철시켰다.
이 전 부총리는 시장을 중시했다. 한국 경제의 고비고비마다 “경제는 내가 책임진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로 극심한 혼란이 일었을 때도 “경제는 내게 맡기라”며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주말에도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열어 향후 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를 직접 찾아가 신용등급 하락을 막기도 했다. 시장에 믿음이 생겼고 경제 회복으로 이어지면서 ‘이헌재 효과’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는 앞서 금융감독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기자실을 새롭게 정비했다. 그리고 공보관에게 “기자 2명이상 모이면 언제든 불러라. 달려가서 정책을 설명하겠다”고 했다. 이는 언론과 제대로 커뮤니케이션 하지 않으면 대기업과 은행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대책이다. 언론은 대부분 그의 우군이 됐다.
카리스마 리더십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 4분기 한국 경제성장률은 -4.6%까지 곤두박질쳤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임명됐다. 그는 2009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에서 –2%로 낮추는 일부터 시작했다. 내부 반발이 있었지만 “솔직하게 얘기하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사상 최대 추가경정예산(28조4000억원)을 짰다. “위기 돌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며 직접 정치권을 설득했다.
2009년 성장률은 0.3%를 기록했고 2010년 6.3% 성장으로 ‘V’자 반등에 성공했다. 해외 언론들은 “교과서적 경기 회복”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윤 전 장관은 특유의 배짱과 추진력으로 경제관료들 사이에서 ‘윤따거(큰형님)’로 불린다. 역대 경제수장 가운데 화통하고 선이 굵은 경제관료로 정평이 나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정권에서 장관직을 역임하는 관운이 따른 것도 이런 평판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그의 리더십은 2011년 파리에서도 통했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현장에서 윤 전 장관은 막판까지 기 싸움을 벌이던 중국과 선진국 사이에 대화의 징검다리를 놨다.
당시 윤 전 장관은 의장국인 프랑스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재무장관과 중국의 셰시런 재정부장을 한데 모아 점심을 먹으면서 막후 중재에 나섰다. 중국을 적극 설득해 극적인 타협의 계기를 마련했다. G20은 무역불균형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돼온 중국이 환율 관련 내용을 선언문에 포함하도록 양보한 점을 들어 세계경제의 균형잡기 문제가 큰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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