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인생] "여러분의 꿈을 지켜드려요" 뼈방관 오영환

소방관 오영환. 사진 = 이승재 기자



“웽~~”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소방차와 구급차에 머물다 이내 각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 시각 누군가는 생사의 기로에서 1분, 1초를 헐떡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골든타임을 사수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사람들. 바로 119 구급대원이다. 이 힘겹고 숭고한 일을 운명처럼 생각한다는 오영환(28) 씨는 타칭 ‘현장바보’라고 불릴 만큼 뼈방관(뼛속까지 소방관)이다. 언제, 어디서나 타인의 삶과 꿈을 지켜주겠다는 멋진 청년 영환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족은 나의 힘, 나의 꿈

현재 성북소방서 현장대응단 소방교인 영환 씨는 긴급한 사고 현장에서 응급환자들을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다. 그의 주 이동수단도 일반적인 구급차가 아닌 서울 시내에서도 불과 20대밖에 없다는 최신식 응급구조 오토바이다. 이 오토바이를 통해 그는 교통체증이나 좁은 길목을 뚫고 골든타임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향한다. 실제로 인터뷰 도중 응급사고가 발생하자 그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사고 현장으로 쾌속 질주했다.


연예인 뺨칠 정도의 훈훈한 외모와 고운 말투와 달리 현장에서 그는 거침이 없었고, 매사 진지했다. 이런 그가 어린 시절 막연하게나마 소방관을 꿈꾼 것은 무엇보다 언제나 자신 삶의 방식을 지지해 주신 부모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됐다고 한다. 그 소중한 가치를 알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그것도 지켜주고 싶다는 것이 꿈의 시작이었다.


“저희 집은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었어요. 때문에 단칸방에서 살기도 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만 아르바이트를 족히 10개 이상 해봤어요.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에 불만을 품지 않았어요. 매사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시는 부모님의 사랑 덕분이었죠. 두 분은 제게 늘 ‘어떻게 살아라’ 하고 강요하신 적도 없었어요.”


그 부모님은 그저 자식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지켜주셨다. “그런 가족의 사랑을 받아서 그런지 타인의 그것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있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등굣길에 우연히 본 TV뉴스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죠. 화재현장에서 울부짖는 피해자들과 그들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제 맘을 사로잡았어요.”


그의 눈에 비친 피해자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한 순간의 화재가 누군가의 삶에 재앙이 되고, 또 그들의 가족까지 절망하는 현실을 보고 그들의 삶과 꿈을 지켜주고 싶다는 열망이 영환 씨에게 솟구친 것이다. 하지만 19세 소년에게 현실은 막막했다. 특별히 공부를 잘한다거나, 이렇다 할 재능도 많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던 것.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영환 씨는 마음속에 소방관을 품고, 일단 대학에 진입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촉망받던 나노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돌연 자퇴했다. 소방관이 되기 위해선 대학졸업장이 필수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대학에 입학을 하고 보니, 소방공무원 응시 자격으로 대학 졸업이 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자퇴를 결심했어요. 물론 소방 관련 학과나 응급 구조학과 등을 졸업하면 경력 경쟁채용 전형에 지원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의무 소방으로 입대하여 조금이라도 일찍 소방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꽤 전망이 밝은 학교와 학과에 입학했었기에, 자퇴를 결심했을 때 담당 교수님께서는 ‘말단 공무원 같은 소방관이 되려고 하냐?’면서 자퇴서를 그의 눈앞에서 찢어버렸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다시 찾아가니 결국 자퇴서에 도장을 찍어 주시더군요. 지금 이 순간까지 제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나의 꿈 나의 인생] "여러분의 꿈을 지켜드려요" 뼈방관 오영환

소방관 오영환. 사진 = 이승재 기자


꿈을 쓰고, 말하고, 지키는 일의 가치

자퇴 이후 그는 군 전환 복무 중 의무소방이라는 조직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곧바로 그 길을 선택했다. 의무소방은 부족한 소방현장 활동인력을 전환 대체 복무로 확충하기 위한 제도로, 화재 진압·구조·구급 등의 현장업무에 소방대의 보조역할로 투입되는 것이 주된 업무다. 군 복무 동안 그는 부산 해운대 소방서의 119 수상구조대와 119 안전센터의 구급대에서 현장 보조로, 전역 직전에는 부산소방본부의 행정업무 부서에 배치되면서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게 됐다.


“의무 소방 시절, 구급대원으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날이었어요. 야간 근무 중이었는데, 새벽에 아기가 숨을 안 쉰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하니 아빠가 아기를 거꾸로 들고서 잘못된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죠. 이미 얼굴이 파래진 아기를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심폐 소생술을 실시하며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응급실에 아기를 내려놓자마자 당직 의사는 가운을 덮어 버렸어요. 이와 같은 신생아돌연사증후군(SIDS)은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도 원인과 대책이 밝혀지지 않은 증상이에요. 그때 아기 엄마의 절규와 아빠의 무너져 내리는 어깨, 그 비극을 직접 바라보면서 소방관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무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죠.”


이런 생생한 경험들을 발판으로 그는 전역 뒤 응시한 서울 소방시험에 단번에 합격했다. 그 흔한 대학 졸업장도 없었지만, 소방관을 향한 한결같은 열정과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소방시험 경쟁률이 높을 때는 수십 대 일을 넘을 때도 있어요. 다들 쟁쟁한 스펙과 능력을 가진 분들이죠. 그런데 단기간에 제가 합격할 수 있었던 건 제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기보다 이 일을 오랫동안 꿈꿨고, 꾸준히 노력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그래선지 저처럼 한때 진로 결정으로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제가 조그만 응원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는 좀 내성적이라 잘 모르는 사람 2명만 모여도 쑥스러워서 말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근데 우연한 기회에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진로강의를 시작했다가, 또래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골든마이크’ 대회에 참여했는데, 덜컥 준우승을 하게 됐어요.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제가 하는 소방관 일 외에도 다방면에서 사람들의 꿈을 응원하고 지켜주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나의 꿈 나의 인생] "여러분의 꿈을 지켜드려요" 뼈방관 오영환

소방관 오영환. 사진 = 이승재 기자


실제로 영환 씨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비영리단체 행사를 통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자신이 5년간 소방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119구조대와 구급대원으로 최일선에서 활동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일들을 수기로 모은 책을 조만간 발간할 예정이다. 이처럼 그의 꿈은 계속 진화 중이다. 그리고 그 꿈의 핵심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의 삶까지 지켜주는 것이다.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매일같이 마주하며, 누군가를 구해내지 못할 때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오늘의 삶 지금 이 순간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여러분 역시 원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오늘, 그 오늘을 지켜드리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