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100년 만의 무더위’라는 소식이다. 기상청이 100년 전에도 있었는지 의문이지 만 더위에 젬병인 나는 해마다 전해오는 무더위 공습 예고가 납량특집 공포영화만큼 무섭다. 유난히 여름을 심하게 타는 체질 탓에 여름의 8할을 선풍기 앞에서 누워 보내곤 한다. 그 모양새가 흡사 ‘죽’ 같다. 정말 ‘죽’겠다. 지난 정월대보름에 팔아놓은 더위는 올해도 씨알이 안 먹힌 듯싶다.

환자 같은 이 여름날이 그래도 반가운 이유가 있다면 내게 한 줄기 빛 같은 가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낱같은 냉면 가닥.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유일한 처방전. 그 면발을 잡고 여름을 산다.

외로워야 사람도 고프다. 그 시초가 한겨울 동치미에 말아먹는 이한치한의 겨울 음식이라지만, 사실 지난 겨울 냉면 거들떠도 안 봤다. 따끈한 호떡에 미쳤지. 사람 마음 참 간사한 것이다. 이내 날 뜨거워지고 세숫대야에 받아놓은 찬물을 보는데,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나듯 문뜩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이 떠올랐으니까. 받아놓은 찬물이 시원한 냉면 육수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계절이 오가고 사람 하는 일 다 때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고 다를까.

음식도 계절을 산다. 적시에 더 아름다운 음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더위 속에 만나는 냉면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그 만남이 칠월칠석의 견우직녀 같다.
C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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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면 한복을 입은 여인이 떠오른다. 초록, 빨강, 파랑의 색색 고명이 저고리 같고 단정하게 말아놓은 면 타래가 치맛자락처럼 보인다. 수줍어하면서도 다소곳이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우스운 소리일지 모르나 나는 이런 냉면을 만날 때마다 한국 고유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느끼곤 하는데, 간소하고 정갈한 모양새가 우리나라 특유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육수에서는 청아함까지 느껴진다. 화려하지 않은 담담한 구성이 음식을 더욱 세련돼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물론 외적인 멋이 전부가 아니다. 냉면은 멋과 맛을 두루 갖춘 음식이다. 심심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육수는 미미하고 소소하지만 담백함에 깊이가 있어 부족함이 없다. 입술을 간질이며 들어오는 평양식 메밀 면발은 뚝뚝 끊기지만 풍미가 있고, 고구마와 감자 전분을 사용해 보다 쫄깃한 함흥식 면발은 끊고 씹는 치감이 좋아 꾸덕꾸덕한 회 꾸미를 올린 비빔냉면과 궁합이 잘 맞는다. 육수와 면 두 가지로 어쩌면 이리도 다양하고 완벽한 맛을 만들어내는지 항상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여름날 냉면 육수를 테이크아웃으로 팔아도 참 좋을 것 같다. 맴맴 매미 소리 들으며 홀짝홀짝 담백한 육수를 목구멍으로 넘기면 아무리 덥다 한들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건강한 맛을 보여줄 수 있으니 관광 상품으로도 좋을 것인데, 어느 누가 좀 팔아줬으면 좋겠다. (이러다 내가 팔게 되는 건 아닐까?)

한 그릇 냉면 때문에 사람 구실 못해도 여름을 붙잡고 싶다. 또 언제 더웠냐고, 낙엽 떨어지는 날 금방 오겠지. 바람 좀 부나 싶어 밖에 나왔건만 금세 입이 마르고 스멀스멀 등 기운이 뜨거워진다. 그새 약발이 떨어진 것 같다. 자, 냉면을 만나러 가자.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을밀대
서울 마포구 염리동 147-6 tel : 02-717-1922

냉면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 담백한 맛에 매료되는 것 같다. 냉면 맛의 새로운 범주를 느껴보길 원한다면 이곳 ‘을밀대’에 들러보기를. 밋밋하면서도 무거운 보디감이 느껴지는 고기 육수는 냉면의 주가 육수인지 면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쫄깃한 면발이 그 육수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낚시질하여 빨고 끊고 씹어 먹도록 하자. 면의 맛과 육수의 맛을 균형적으로 느낄 수 있다. 비빔냉면, 자극적이지 않고 감칠맛 있다. 고소한 녹두전, 함께 곁들여도 좋을 것이다. (냉면 9000원, 녹두전 8000원)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황재코다리냉면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53-2 tel : 031-889-1817

밋밋한 물냉면이 지루하고 아쉽다면 여기 빨간 속옷같이 섹시한 비빔냉면이 있다. 황태를 매콤하고 달콤한 양념과 함께 비벼 먹는다. 꾸덕꾸덕한 황태살이 씹는 맛을 더욱 살려주니 이곳에선 비빔냉면 먹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물냉면 부럽지 않다. 3대째 대를 이어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맛집. 포장 불가. 분점도 없다. (코다리 비빔냉면 6500원)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경인식당
인천 중구 내동 154 tel : 032-762-5770

60년 동안 냉면만 만들었다. 그 긴 세월을 한 가지에 몰두했다니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세월의 깊이가 냉면 육수와 면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러한 깊이를 내공이라 부르는가 싶다. 허름한 식당에서 먹는 단출한 냉면 한 그릇에서 한국의 미가 느껴진다. 잡맛 없는 또렷한 육수. 이보다 맑고 개운한 육수를 만난 적 없다.

그 맛에서 청아함이 느껴진다. 탄력 있는 면발 두루 말할 것 없다. 한 그릇 냉면에서 하나의 세계가 느껴지는 깊이 있는 곳. (냉면 8000원)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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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피냉면(북촌손만두)
서울 마포구 합정동 414-16 1층 tel : 02-335-4414

작은 가게지만 원색의 독특한 인테리어 때문에 이색적인 느낌이 난다. 흡사 개성 있는 펍(Pub) 같은 분위기다. 냉면을 먹고 있는데 1980년대의 무거운 헤비메탈이 흘러나온다면 어떨까. 과연 냉면을 냉면답게 먹을 수 있을까. 갑자기 냉면이 헤비메탈처럼 느껴진다. 금속음악이 냉면의 맛을 더욱 차갑게, 더욱 이질적으로 만든다. 헤비메탈을 들으며 냉면도 먹는데 무엇을 못할까. 속이 꽉 찬 새우만두. 냉면에 쌈 싸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냉면 5000원, 매운맛 단계별로 조절 가능)
[마싣구론(論)] 냉면 冷麵 만세!
김삿갓(김필범)

세상의 모든 경험을 한 입씩 맛보길 원하는 극단적 경험주의자. 맛있는 일상을 블로그로 전하는 남자. 단국대 재학 중. 2010, 2011 NATE(싸이월드) 선정 파워블로거, 2011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KBBA) TOP100 블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