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판타스틱한 여름방학 보내기] 산티아고 순례길 걸은 홍예슬 씨 “준비해야 할 건 오직 마음뿐”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여자. 하지만 그림보다는 대학 신입생 때 우연히 만난 연극에 빠져 4년 내내 연극쟁이로 살았다. 음향, 매표, 기획, 마케팅, 홍보, 디자인 등 배우만 빼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남들은 통과의례처럼 지나치는 휴학 한 번 없이 4년을 보낸 후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곳도 연극·뮤지컬 기획사. 지난 2007년에 졸업해 4년간 일했으니 도합 8년간을 공연에 푹 빠져 지냈던 셈이다.

“어느 날, 정말 갑자기 ‘나 이거 왜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연극을 좋아하는데 일에 치여 정작 공연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더군요. 공연을 사랑하는 건 맞지만 과연 평생을 두고 하고 싶은 일이 맞는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거예요.”

회사에 거짓말을 한 후 하루를 오롯이 내 시간으로만 채웠다. 그러면서 즐거웠던 일, 잘했던 일, 아무리 노력해도 잘하지 못했던 일을 곱씹었다. 결론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사실. 그러다 불현듯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가 궁금해졌고, 서른을 코앞에 두고 워킹홀리데이를 마음먹었다.
[판타스틱한 여름방학 보내기] 산티아고 순례길 걸은 홍예슬 씨 “준비해야 할 건 오직 마음뿐”
걱정하기 전에 출발부터 하라

2012년 2월, 드디어 아일랜드로 떠났다. 1년 계획의 외국 생활이었지만 온전히 아일랜드에만 적을 둔 건 아니었다. 반년은 꼬박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을 여행했다. 특히 2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서곡이 됐다.

“아일랜드에 있을 때였어요.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문자 하나를 받았죠. ‘나는 지금 그 길을 걸을 수 없으니 너는 아일랜드에 간 김에 꼭 산티아고 길을 다녀오라’는. 골웨이라는 작은 시골마을로 이사했는데, 마침 먼저 살던 한국분이 두고 간 책도 산티아고 길 이야기였어요. 그러고 보니 운명이었던 것도 같아요.”

처음부터 산티아고를 목표로 하지 않았기에 ‘철저한 준비’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운동화 하나 사고, 그럴듯한 아웃도어 대신 평소 입던 옷이면 족했다. 스페인 현지에서 침낭을 사고, 걷다가 너무 힘들어 나무 지팡이 하나 산 게 준비의 전부였다.
[판타스틱한 여름방학 보내기] 산티아고 순례길 걸은 홍예슬 씨 “준비해야 할 건 오직 마음뿐”
“알베르게(순례길 코스에 있는 여행자용 숙소)는 공립은 5유로, 사립은 비싸도 10유로예요. 가는 길 곳곳에 마을이 있으니 슈퍼나 약국도 있죠. 순례길이 지나는 마을 레스토랑에는 ‘순례자 메뉴’도 따로 있어요. 10유로에 전식·본식·후식이 코스별로 나오고 와인까지 마실 수 있죠.”

그녀가 선택한 길은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코스였다. 보통 종주 코스가 800km인 데 비해 300km의 비교적 짧은(?) 코스. 하루 평균 20km 정도 걸음을 옮겼고, 30km 가까이 움직인 날도 있었다.

“겨울에는 눈비가 많고 문을 닫은 알베르게도 있어 주의해야 해요. 고생이 더하다는 뜻이죠. 저도 해가 진 후 도착한 알베르게가 문을 닫아 캄캄한 산길을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내려온 아찔한 순간도 있었어요.”
[판타스틱한 여름방학 보내기] 산티아고 순례길 걸은 홍예슬 씨 “준비해야 할 건 오직 마음뿐”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기에 준비가 철저하진 못했다. 하지만 막연히 꿈만 꾸는 대신 한 걸음이라도 먼저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내기엔 오히려 편했다.

“막연하게 꿈만 꾸지 말고 첫발을 내디디세요. 저 같은 저질 체력도 걸었는걸요. 좋은 장비도 필요 없어요. 너무 많은 생각, 준비보다는 간절한 꿈을 실행하는 첫걸음이 더 중요해요.”

지난해 12월,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홍예슬 씨는 ‘프리랜서 문화기획자’라는 꿈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산티아고 순례를 웹툰으로 그린 김용진 작가와의 대담이었다. 꿈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되,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가는 길. 앞으로의 인생 항로와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렇게 닮아 있었다.



글 장진원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