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ream, My way

Rock will Never Die!! 신대철
사실 ‘미소년’의 원조를 논할 때 이분 빼면 섭섭하다. 1986년 발매된 데뷔 앨범 ‘Heavy Metal’의 타이틀이 제아무리 의기양양했어도 기타리스트 혹은 ‘시나위’ 리더 신대철이라 하면, 한 시절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미소년의 포스와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했던 ‘오빠’이자 ‘형’이었다. 정식 음반 데뷔 후 27년. 소년의 팽팽한 이마엔 연륜의 깊이가 스며들었지만 ‘美’라는 접두사는 여전히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대한민국 록밴드의 전설 시나위, 그리고 서른 해가 가깝도록 밴드와 기타를 놓지 않고 있는 살아 있는 전설, 신대철.
Rock will Never Die!! 신대철
始 beginnings

기타리스트 신대철이란 이름 앞엔 언제나 ‘신중현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열한 살 꼬맹이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1974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집에선 뵙기 힘든 어른’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음악 듣는 걸 좋아했어요. LP가 굉장히 많아 매일 들었죠. 아버진 어쩌다 집에 계셔도 주무실 때가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아예 외출하지 않으시더군요. 어느 순간 기타를 치고 싶어 ‘가르쳐달라’ 했더니 순순히 들어주셨어요. 아마도 아들이 음악 하길 바라셨던 거 같아요.”

LP의 매력이 아날로그가 뿜어내는 노이즈에만 있는 건 아니다. 빽빽히 늘어선 음반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빼내는 순간, 미지의 세계와 처음 조우하는 설렘.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도 앨범 재킷 사진과 음악이 던지는 교집합의 매력은 세상 무엇보다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이제 막 싹튼 음악이라는 취미, 호기심… 뭐 그런 거였죠. 그러다 우연히 집은 앨범이 지미 헨드릭스였어요. 완전한 새로움, 굉장한 충격, 기타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나. 상상도 못했던 신비로운 소리였죠. ‘나도 이렇게 연주하고 싶다,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때부터 미치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셈이네요.”

손가락이 아픈 줄도, 굳은살이 박이는 줄도 몰랐다. ‘무엇을 하겠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 서기 전에 무작정 기타가 좋았다. 제 손에서 울리는 소리에 신기해하며 기타 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삶이 30년을 훌쩍 넘겼다.
Rock will Never Die!! 신대철
1983년. 고등학교 스쿨밴드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 장르인 헤비메탈에 끌렸다. 학교 멤버들과의 수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주위 음악 하는 선배나 친구들을 끌어모았다.

“밴드 결성을 마음먹은 후 이것저것 많은 이름을 생각해봤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그러다 음악 수업 시간에 ‘시나위’란 이름을 책에서 보게 됐죠. 남도 지방 무악의 한 종류였는데, ‘이거다’ 싶었어요. 어감 자체도 좋고, 밴드가 가려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고요.”

밴드 결성 후 30년이 흘렀지만, 스스로 느끼는 시나위의 이미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칠고 투박하며 자유롭지만, 한편으론 정교한 음악. 고려청자의 아름답고 정교한 곡선보다는 조선의 질그릇 같은 느낌을 주는 음악. 마음 가는 대로 휙 그은 획 속에 대가의 혼이 담겨 있는 그림 같은 음악. 잘될 때도 있었고 상심한 적도 있었지만, 신대철과 시나위의 음악은 30여 년간 그렇게 한 궤를 관통해왔다.
Rock will Never Die!! 신대철
Rock will Never Die!! 신대철
1980년대 중반 이태원 ‘록월드’ 클럽은 한국 록밴드의 메카였다. 시나위 역시 아버지가 적자를 보며 힘들게 운영했던 록월드 무대에 서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운명의 날은 1986년 1월이었다. 임재범을 보컬로 영입해 활동하던 차에 당시 메이저 음반사 중 하나인 킹레코드사 사장의 눈에 띈 것. “너희들 곡 있지”란 말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그 상황에선 무조건 ‘있다’ 해야죠. 녹음 날짜가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에서 자작곡이라곤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뿐이었어요. 보름을 남기곤 밤을 새워서 곡을 썼죠. 그렇게 만든 데뷔 앨범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평단에서도 호평 일색이었어요.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까지 받았죠.”

소수의 마니아들이 클럽이나 콘서트장을 찾아 듣던 록(헤비메탈) 음악은 이후 부활, 백두산 같은 걸출한 밴드들이 등장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공중파에서 머리 기른 로커들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그야말로 찰나의 전성기였다.
Rock will Never Die!! 신대철
의도한 건 아니지만 1990년대 접어들며 시나위 역시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보컬 김종서와 베이스 서태지의 탈퇴, 이후 비슷한 불운들이 겹치며 정신마저 소모돼 가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놀았어요.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 세션 활동을 많이 했죠. 90년대 초중반까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많은 가수의 음반에 참여했어요. 가요 작곡도 하고요. 당시만 해도 음반 판매량이 100만 장 단위여서 제작자나 가수들이 돈을 엄청 벌던 시절이에요. 신대철이 연주한다고 하니 불러주는 데가 많더라고요.”

전문 연주자 같은 생활을 이어가던 즈음 ‘이건 아니다’는 판단이 섰다. 내가 연주한 음악을 들어도 모를 지경, 그건 차라리 음악인보다 직업인에 가까웠다. 전문 세션맨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 길이 나와는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자’ 마음먹었다. 1995년 보컬 손성훈을 영입해 5집을, 이듬해 6집을 냈다. 보컬 김바다와 함께한 6·7집은 시나위의 부활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도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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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me

“아버지요? 당연히 부담스럽죠. ‘신중현의 아들’이란 꼬리표는 평생 달고 가는 건데…. 어릴 땐 잘해야 본전이었어요. 싫었죠. 근데 언제부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됐어요.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죠. 음악이요? 60~70년대에 그런 음악을 만드셨다는 건 천재라는 뜻이에요. 감히 얘기하기도 어렵죠.”

내로라하던 서양 밴드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감성과 개성. 기술은 몰라도 감각에선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돌연변이 천재. 아버지의 아성을 넘을 순 없을지 몰라도 신대철의 음악 역시 지향점은 있다.

“미국에서 배운 사람은 미국 음악이, 영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영국 음악을 최고라고 해요. 미국 스타일로 꾸미고 연주해야 훌륭하다 생각하는 거죠. 음악을 하고 배우는 환경이 좋아지면서 이런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게 사실 우려돼요. 영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자유로움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 테크닉은 뛰어나지만 독창성이 떨어지는 음악을 생각해보세요. 서구의 시선으론 ‘재밌는 음악’ 정도에 불과하겠죠.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가 절실한 시대예요.”

11세, 9세 아들딸을 둔 아버지로서도 마찬가지다. 음악이든, 다른 무엇이든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로서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답안이다.

“뭐든 억지로 하는 건 질색이에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몇십 년 기타를 쳤는데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고 불행하겠어요. 지금 행복하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 아닐까요?”

행복한 인생과 음악을 좇는 후배들을 챙기는 것도 어느덧 ‘큰 형님’의 몫이 됐다.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 ‘톱밴드’에서 멘토 활동을 하며 연을 맺은 ‘게이트 플라워즈’도 얼마 전 그가 대표로 있는 레이블(에코브리드)에서 정식 데뷔 앨범을 냈다. 물론 프로듀싱은 그의 몫이다.

록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보컬 오디션’ 역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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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나가수’에서 함께한 김바다는 사실 소속사가 달라요.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었죠. 회사가 다르다 보니 비즈니스도 쉽지 않았고요. 새로운 보컬을 찾아야 했어요. 대신 전혀 새로운 얼굴, 미지의 인물을 찾자 마음먹었어요. 당장은 부족해 보여도 이 친구가 어떻게 변하는지, 발전하는지 보여주자 생각했죠. 남들 다 하는 건 재미없잖아요.”

일종의 실험이었다. 나이, 성별, 지역을 따지지 않은 ‘묻지 마’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보컬을 영입했다. 최종 오디션은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라이브로 중계됐다. 늦어도 올 상반기 안에는 새로운 시나위를 선보일 예정이다. 보컬 공개 오디션과 더불어 밴드의 형식 역시 새로운 실험에 나설 작정. 이른바 오픈 플랫폼이다.

“시나위라는 이름 자체가 무악에 바탕을 둔 즉흥 연주를 말해요. 할 줄 아는 고수들이 모여서 그냥 시작하는 거죠. 음악도 그렇게 해보자, 20세기의 전통적 밴드 개념을 벗어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키워드를 따라잡자는 생각이에요. 성공하길 바라지만 실패한다 해도 후회 없이 멋지게 만들어 보려고요. 아시다시피 시나위 멤버도 그동안 부침이 많았잖아요. 그걸 아예 장점화하자는 역발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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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앞에서 자존심과 개성이 무너지는 현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건 로커에겐 직무유기와도 같다.

We Band & Music

‘헤비메탈’로 데뷔했지만 음악적 변신은 계속해왔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제한을 두는 순간이 제일 무섭다’는 신념 때문이다.

“자기 제한이나 콘셉트에 너무 매몰되면 그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없어요.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더 가야 하는지 애매할 때도 많죠. 어릴 땐 매니지먼트와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정해진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면에선 자유로워요. 남자는 나이를 먹어야 남자가 되는 거예요.(웃음)”

음악을 대하는 자세엔 변함이 없지만, 음악을 만드는 환경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를 겪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장르음악의 틀을 벗은 ‘하이브리드’가 현재의 대중음악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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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음악 하는 사람들이 게을러졌어요. 악보 펴놓고 작업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컴퓨터를 켜놓죠. 툴을 잘 다루는 사람이 음악도 잘하게 된 거예요. 머리를 덜 쓰니 고민도 덜 하고, 단순히 조합하는 걸 더 편해 하죠. 창작이란 측면에서 마이너스예요. 음악의 라이프사이클 자체가 짧아진 이유예요. 불과 이틀짜리 노래도 나오잖아요.”

뜻 맞아 모인 청춘 말고 기획된 밴드가 속출하는 풍토에선 낭만 대신 자본이 들어서기 일쑤다. 존재조차 희미했던 밴드를 발굴해 궤도에 올리고, 그들의 음악을 인정받게 하는 ‘톱밴드’에 그가 애정을 듬뿍 쏟은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프리다칼로’나 ‘해리빅버튼’ 같은 노장들을 향한 순애보는 다른 심사위원들과 갈등을 빚을 정도였다.

“록음악이란 게 엄밀히 따지면 블루스의 하위 장르인데, 거기서 파생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거죠. 마찬가지로 록의 하위 장르도 엄청 많아요. 프리다칼로 같은 경우 완전 옛날, 아버지 세대의 원초적인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었어요. 진부해 보일지는 몰라도 진정성이 있었죠. 정말로 좋아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건 흉내내기와는 질적으로 달라요. 그래서 편애했어요.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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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음악뿐이 아니다. 성공과 희망보다는 좌절과 낙담이 익숙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당신들, 내가 보기엔 훌륭하다. 잘하고 있는 거다’고 말하고 싶었다. 밴드를 넘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모습을 모든 이에게 메시지로 주고 싶었다.

“사실 나이도 많고 상업성도 떨어지는 친구들이잖아요. 그러느니 파릇파릇한 친구들을 뽑는 게 어떠냐는 거죠. 그 말도 맞아요. 그렇지만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요즘 유행하는 힐링? 치유? 뭐 비슷한 개념 아닐까요?”

“록음악은 있지만 록밴드는 없다”는 일갈도 말랑말랑한 정서만을 좇는 요즘 후배들과 음악을 직설적으로 할퀸다. 자본 앞에서 자존심과 개성이 무너지는 현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건 로커에겐 직무유기와도 같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교육이 항상 문제라고 생각해왔어요. 교육 당국도, 학교도, 학부모도, 학생도 모두 미쳐 있는 거 같아요. 소위 ‘스펙 쌓는다’는 말 있잖아요. 게임에서 캐릭터 꾸며 아이템 구매하는 데나 쓰던 말 아닌가요? 이걸 사람한테 갖다 붙인다는 게 참….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스콧 니어링의 말, 요즘 대학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요.”


글 장진원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