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담당자! 여태 이것도 확인 안 하고 뭐 했어?!”

[한경잡앤조이=김인호] “계약 납품일 대비 며칠 단축/지연” 구매담당자가 자신의 업무 결과를 보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구매 업무는 모든 것을 결과로 평가받는다. 때문에 계약을 잘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약을 잘 관리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약 3년 전 일이다. 당시 정유 공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마린로딩암(Marine Loading Arm) 품목을 담당했다. 흔히 로딩암이라고 부르는데, 로딩암은 원유를 배에서 육지로 이송시키는데 필요한 설비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관절이 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관(Pipe)처럼 생긴 액체 이송장치다. 계약 상대는 로딩암 시장에서 Global Top 지위를 구축한 독일 업체였다.

Global Top 제조업체라고 해서 관리 역량 또한 Top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럽에 거점을 둔 많은 업체가 그러한데, 비싼 인건비 때문에 대부분 명성과 달리 아담한 사업장과 조직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산이나 관리보다는 영업에 주력하는 기이한 조직 형태를 보이는 기업들이 많다. 유럽인 관점에서는 핵심에 집중한 컴팩트한 조직도고, 내 관점에서는 일감대비 관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조직으로 보였다. 그래서 유럽 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후에는 계약 관리에 주력해야 한다. 유럽 업체의 특성을 간략히 설명했으니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로딩암 계약을 체결한 지 3개월이 흘렀을까. 나는 독일 업체의 프로젝트 매니저(PM)로부터 한 통의 E-Mail을 받았다.

“친애하는 H씨에게. 로딩암(Loading Arm) 제작에 큰 문제가 생겼어. 너희 설계 엔지니어가 OO설계 수치를 너무 늦게 확정해 주었어. 그래서 우리는 후속 공정에 큰 차질을 겪고 있어. 그리고 너희가 요구하는 설계 기준은 현재 트렌드에 맞지 않아. 우리는 로딩암 시장에서 글로벌 표준을 만든 기업인데, 너희는 우리 표준을 수용하지 않고 있어. 뻐꾸기처럼 너희 사양을 적용하라고 반복해서 강요하고 있어. 따라서 너희가 요구하는 사양을 반영할 경우 우리는 약속한 납품 일정을 맞출 수 없고, 납품 지연에 대한 귀책은 너희에게 있어.”

이런 메일을 받고 좋아할 구매담당자는 아무도 없다. 업체는 설계 사양을 빌미로 납기 지연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독일 업체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본사 실무자 미팅을 열고 회의를 시작했다. 실무자 회의 결과 업체가 주장하는 설계 수치 확정이 조금 늦은 것은 사실이나 전체 설계 일정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업체가 반영하기 싫어하는 설계 사양들은 발주처 요구사항으로 사양 변경이 불가했다. 뿐만 아니라 업체는 계약 전에 이미 발주처 사양을 모두 확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설계 미확정이라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결국, 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독일로 날아갔다.
△김인호 씨가 다녀온 프랑크프루트의 한 작은 마을. 한산하고 조용한 시골마을의 저녁 풍경이다.(사진제공=김인호 씨)
△김인호 씨가 다녀온 프랑크프루트의 한 작은 마을. 한산하고 조용한 시골마을의 저녁 풍경이다.(사진제공=김인호 씨)

프랑크푸르트 도착. 12월의 겨울이라 그런지 해도 짧고 날씨도 흐렸다. 공항에서 차를 렌트하고 한 시간가량 운전해 업체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레스토랑에서 슈니첼(돈까스)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호텔에서는 이번 출장에서 정리할 사항들에 대해 재점검했다. 현재 설계 진행 상황은 어떠한지? 우리가 요구하는 스펙을 반영하지 않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제작을 위한 자재 구매는 진행하고 있는지? 자재 발주를 완료하였다면 발주서는 보관하고 있는지? 설계 이슈를 계기로 출장을 왔지만, 계약 전반에 걸쳐 점검이 필요했다.


결전의 날의 밝았다. 이틀간의 미팅에서 이슈를 최대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업체 정문에 도착해 방문객 등록을 마치고 기다리니 족히 2m는 돼 보이는 PM이 나를 반겼다. PM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니 사무실에는 약 30명의 직원이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인사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매니저 직함을 달고 있었다. 마치 1인 1팀 구조의 조직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수많은 매니저와 인사를 하고 샵투어(Shop Tour)를 시작했다. 샵투어는 공장을 둘러보는 것을 말한다. 로딩암 제작 및 품질 검수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약 1,000평 남짓해 보이는 공장에서 전세계 물량의 30%를 소화하다니 새삼 업체의 기술력이 부럽기도 했다. 투어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와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현재 설계 현황 점검을 시작으로, 부자재 발주 내역 및 검수 일정 전반을 검토했다. 현황 파악을 끝내고 쟁점이 되는 사항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왜 발주처 사양을 적용 안하려고 하는지, 사양 미적용에 대한 대체안은 무엇인지, 대체 하면 추가 임팩트는 없는지, 대체 불가 시 어떻게 할 것인지, 현재 지연된 일정은 어떻게 만회를 할 것인지 등 하나씩 점검하며 회의록을 작성했다. 걱정과는 달리 미팅은 제법 부드럽게 진행됐다. 장시간의 미팅 끝에 A4용지로 5장 분량의 회의록과 납기 지연 만회를 위한 제작 일정이 완성됐다. 회의록에 양사 실무자의 서명을 끝으로 본 회의가 끝났다. 이제 본사로 돌아가 본 회의를 통해 약속한 사항에 대해 하나씩 이행만이 남았다.

구매 업무를 하다 보면 계약 이행 중 수많은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 원인 파악과 해결안을 찾는 데 능숙해진다. 하지만 경험이 아무리 많더라도 Global Top 기업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계약 조항을 통해 발주자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Global Top 기업은 계약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항에 대해 삭제를 요청하고, 설령 삭제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설계 표준 미적용 시에는 성능 보장(Performance Guarantee)을 할 수 없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또한, 일종의 세금 같은 것인데 Global Top 기업들은 밀려드는 일감으로 인해 납기 지연 리스크도 존재한다. 따라서 구매담당자는 계약 체결 후에 열심히 손품, 발품을 팔아야 한다. 업체 방문도 하고 제작 현황 보고서도 받아보며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관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주의의 맹점이긴 하지만 업체가 알아서 잘 해준다면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단 한 번의 문제라도 생긴다면 여러분은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담당자! 여태 이것도 확인 안 하고 뭐 했어?!”

김인호 씨는 국내 대형 건설사 구매담당자로 재직 중이다. 플랜트 해외 기자재 구매를 시작으로 국내 주택 및 건축 구매 경험이 있다. 업무 특성상 국내외 출장 경험이 많으며, 출장을 통해 몸소 배우고 느낀 다양한 문화와 사고의 방법을 인생의 보물로 생각하고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