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식물 구조해 ‘졸업’까지 함께, ‘공덕동 식물유치원’ 운영자 백수혜 씨

△ ‘공덕동 식물유치원’ 운영자 백수혜 씨.
△ ‘공덕동 식물유치원’ 운영자 백수혜 씨.
[한경잡앤조이=강홍민 기자/서진 대학생 기자] 공덕동, 연희동, 노량진… 버려진 채 끝을 기다리는 식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플라스틱 우유 바구니에 작은 모종삽과 컵, 물뿌리개 등을 담은 구조 키트를 스쿠터에 싣고, ‘공덕동 식물유치원’ 운영자 백수혜(서울 마포구.35)씨는 식물 구조를 위해 재개발지구로 향한다.
공덕동, 연희동, 노량진···버려진 식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그녀
어릴 때부터 식물을 좋아했던 백 씨에게도 식물 키우기란 늘 어려운 일이었다. 아파트라는 공간의 한계인지, 햇빛이나 바람처럼 작은 요인에도 식물들은 생사를 달리하곤 했다. 그러던 중 백 씨는 작년 6월경 지금의 ‘공덕동 식물유치원’이 위치한 공덕동의 한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엔 ‘마당이 생겼으니 식물을 키워 봐도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게 전부였다.

“어느 날 집 근처 재개발지구 쪽으로 산책하러 갔는데, 쓰레기장 앞에 식물이 자라는 화분이 있었어요. 며칠 전에 비가 왔었거든요. 그 빗물을 맞고 버려진 화분에서 새싹이 촉촉하게 올라오고 있었던 거예요.”

현재 공사가 한창인 공덕1구역 재개발지구는 당시만 해도 주택가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빈집에는 버려진 물건만 가득했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려지고 깨진 화분 가득한 곳은 그야말로 식물 천지였다. 이름 모를 다육식물, 장미허브… 화분만 챙겨간 것인지 화분 모양대로 굳어진 흙에서 자라던 식물도 있었다. 공사가 시작되면 이들 모두가 꼼짝없이 죽게 될 운명이었다. 안쓰럽다는 마음 반 ‘한 번 키워볼까’하는 마음 반으로 집에 데려온 식물들이 어느덧 마당의 빈자리를 차곡차곡 채워갔다.

“유기견, 유기묘도 입양을 보내잖아요. ‘유기식물’에게도 새 가족을 찾아주고 싶었죠.”

백 씨의 발상은 코로나19 상황과도 맞아 들었다.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반려 식물’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졌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식물들의 반려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을 듣고, 백 씨는 작년 8월경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공덕동 식물유치원’이라는 계정 이름에는 버려진 식물에 대한 안타까움 대신 유치원에서처럼 식물들을 잘 돌봐 무사히 졸업시키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계정 프로필. 사진출처=’공덕동 식물유치원’ 트위터 페이지
△‘공덕동 식물유치원’ 계정 프로필. 사진출처=’공덕동 식물유치원’ 트위터 페이지
백 씨는 지난 1년간 공덕동, 연희동처럼 우연히 알게 된 곳을 중심으로 식물 구조 활동을 이어왔다. 요즘은 활동을 나가기 전 검색을 통해 서울 내 재개발을 앞둔 지역을 찾아보거나 SNS 계정으로 제보받기도 한다. 백 씨는 개중 스쿠터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장소를 추리고, 바쁘지 않은 날마다 틈틈이 동네를 둘러보면서 구조할 만한 식물을 선별한다.

“한 해 살이 식물이면 웬만해서는 구조를 안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달개비랑 여뀌는 1년생이어도 자꾸 눈에 밟혀서 결국 데려왔지만요.”
공덕동, 연희동, 노량진···버려진 식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그녀
△식물로 가득한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마당.
△식물로 가득한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마당.
선별작업을 마치면, 백 씨의 스쿠터로 함께 달려온 구조 키트가 빛을 발할 때다. 조그만 삽으로 뿌리를 캐 올린 식물들은 흙과 함께 컵에 옮겨 담긴다. 유치원까지 가는 길에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려주는 일도 잊지 않는다.

구조돼 유치원에 온 식물들은 백 씨의 정성 아래 차츰 건강을 회복해 간다. 꼼꼼한 관리로 무럭무럭 자라난 식물들은 이제 유치원을 졸업해 새 가족을 찾을 일만 남겨두게 된다. 지금까지 유치원에 합류한 식물은 100여 개, 구조된 식물들에게 찾아온 새 가족은 5~60명에 달한다. 이들은 이따금 백 씨에게 SNS를 통해 식물의 근황을 전해 오기도 한다.

“몇 천 원 주고 화원에서 예쁘게 자란 식물을 사 올 수도 있는데, 버려졌다가 구조된 식물에 관심을 두신 분들이잖아요. 잘 키워주실 거란 믿음이 있죠.”

백 씨는 원래부터 누군가 버린 것을 재사용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식물유치원 마당 한 편에 놓인 의자와 테이블 역시 공덕동 재개발지구의 버려진 가구들을 백 씨가 가져온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백 씨는 영수증이나 담뱃값, 버려진 천에 그림을 그리는 작품 활동도 종종 해왔다. 그래서였을까. 유기된 식물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 또한 백 씨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을 조금 더 소중히, 오래도록 아껴 쓰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해요.”

물건을 쉽게 사고 쉽게 버리지 않는 것, 식물을 사기 전 어딘가에 버려진 식물들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는 것. 백 씨가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게 전부다. 꽃가게에서 식물을 사들이는 게 백 씨에게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된 것처럼 활동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버려지는 식물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 백 씨의 기대이자 바람이다.

유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식물이 있냐는 질문에, 백 씨는 처음으로 구조한 알로카시아부터 무심코 데려왔는데 쑥쑥 자라 주었다는 여뀌까지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식물 얘기에 눈을 반짝이는 그는 코로나19 유행이 잠잠해지는 대로 다양한 식물 교류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식물을 보다 잘 키울 수 있는 법을 함께 고민하고, 식물유치원의 식물들이 졸업할 기회도 더 많이 마련하기 위함이다.

“가끔 죽은 줄 알았던 식물도 데려와 키워 보면 다시 살아나고는 했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이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활동을 보고 ‘나도 버려진 식물을 한 번 키워볼까?’ 생각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