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직장인만 아는 치열함 속 짜릿함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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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잡앤조이=김인호] ‘늘 겸손하자’ 건설회사 구매담당자로 수년간 일하며 배운 나의 철학이다. 대기업 구매담당자는 갑의 위치에서 고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특히 건설회사의 경우 마초적 이미지까지 있으니, 구매담당자의 이미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다녔던 기억만 떠오른다. 담당 업무 중 계약서를 쓰는 일 외에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며, 언제나 사람을 만나 확인을 받고 업무를 진행했다. 늘 사람과 함께 하는 업무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내가 급할 때 도움을 받으려면 겸손한 자세는 필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나와 불편한 관계일수록 더욱 신경 써야 했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영업? 설계? 시공? 협력사? 아니다. 바로 검사담당자다. 검사담당자는 때론 나에게 저승사자같이 무서운 존재였다. 검사(Inspection)팀 업무가 구매팀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구매는 납기가 최우선이고, 검사는 품질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품질 확보에만 신경을 쓰면 납기가 지연되고, 납기만 신경 쓰면 품질 확보가 어렵다. 이렇듯 구매와 검사는 서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취한다. 따라서 납기와 품질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서로 유기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아니, 협조보다는 공조가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3년 전 나는 정유공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 구매담당자였고, 담당 품목 중에는 압력용기(Pressure Vessel)가 있었다. 압력용기란 쉽게 말해 압력밥솥을 생각하면 된다. 정유공장의 고압 운전 조건에서 견딜 수 있는 스테인리스 용기다. 공장에 설치되는 압력용기는 울산에 위치한 K업체에서 제작했다. 참고로 정유공장에 공급되는 기자재의 품질관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격하다. 물론 이유 없는 검사는 없다. 정유공장은 한번 조업이 가동되면 최소 1년 이상 조업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운전 중 문제가 발생하면 대처가 힘들며, 자칫 기자재 불량으로 사고가 발생한다면 끔찍한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그래서 제작 업체는 제작 주요 공정마다 검사원(Inspector)의 확인을 받아야만 다음 공정을 진행할 수 있다. 검사원의 합격 통보 없이는 그 누구도 업체에 제작 지시를 내릴 수 없다.

2019년 1월경, K업체는 제작 마지막 공정인 도장(Painting)작업이 한창이었다. 조금만 힘을 내면 납품이라는 달콤한 결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제작 막바지로 갈수록 업무 분위기는 상당히 예민하다. 모두가 몇 달간 열심히 제작하느라 지친 것도 있었고, 작은 실수가 곧 납기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K업체는 제작 마지막 공정인 도장을 마치고 드디어 검사 신청을 했다. 동시에 포장 작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달콤한 결실을 목전에 두고 K업체는 도장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도장 두께가 고르지 않고, 사양서에 명기된 최소 두께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상당히 뼈 아픈 불합격 통보였다.
△도장을 끝낸 압력용기의 모습.
△도장을 끝낸 압력용기의 모습.
도장 불합격이 뼈아팠던 것은 날씨 때문이었다. 도장은 추운 날씨에 잘 마르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 울산의 날씨는 영하였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검사담당자에게 출장 동행을 요청했다. 솔직히 말하면 제발 같이 가달라고 사정사정했다. 검사담당자의 도움 없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사담당자는 감사하게도 시간을 내어 주었고, 우리의 공조는 이렇게 시작됐다.

울산 공장에 도착하니 K업체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 도장을 다시 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추운 날씨에는 페인트가 잘 마르지 않는다. 때문에 겨울 도장작업은 여름보다 시간이 더 소요된다. 그래서 건조 시간 단축을 위해 페인팅 작업 후 열풍기를 틀어주어 주변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검사담당자는 K업체에 도착하자마자 작업 공간과 열풍기 확보에 주력했다. 나는 검사담당자가 열풍기를 확보할 것이라는 믿음 하에, K업체의 PM(Project Manager)과 함께 제작 일정 재산정에 들어갔다. 특히 도장 후속 단계인 포장 및 운송 일정은 시간 단위 계산을 할 만큼 우리는 납기관리에 진심이었다.

싱거운 결말이지만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검사담당자의 기민한 의사결정과 K업체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말이었다. 만약 나 혼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K업체를 방문했다면, 긴급히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헛되이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또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적 판단이 앞서기도 한다. 이번 사례에서도 만약 내가 검사담당자에게 불합격 통보에 대해 따지고 들었다면, K업체의 납기는 보나 마나 지연되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직면한 문제 해결의 키는 주변인들 손에 있다.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구매담당자는 언제나 마음 한 편에 ‘늘 겸손하자’를 새기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 겸손이 세 번이면 없던 동아줄도 생기는 곳이 나의 업무 생태계인 것이다.

김인호 씨는 국내 대형 건설사 구매담당자로 재직 중이다. 플랜트 해외 기자재 구매를 시작으로 국내 주택 및 건축 구매 경험이 있다. 업무 특성상 국내외 출장 경험이 많으며, 출장을 통해 몸소 배우고 느낀 다양한 문화와 사고의 방법을 인생의 보물로 생각하고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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