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브이로그] 파도를 이겨내는 법

아무래도 X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소설 <마션>의 첫 문장으로 유명한 표현이다. <마션>은 식물학자이자 기계공학자인 주인공이 화성 탐사를 나간 내용을 주축으로 이룬다. 앤디 위어는 주인공이 발화하는 시간의 상태를 간단히 표현하는 문장을 작품 앞에 배치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소설을 완독하지 않은 나조차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서울예술인지원센터의 재개관 행사를 다녀왔다. <2023 예술가의 인생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토크 프로그램에서 두 개의 강의를 연달아 들었다. 첫 강의는 ‘슬로우 파마씨’ 이구름 대표의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자연이 필요하다’였다. 강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바로 ‘스페이스 O’라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단편 영화는 주인공이 식물학자이면서 화성 탐사 프로젝트의 유일한 선발대라는 설정이었다. 화성에서 연구를 하던 주인공은 그곳이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임이 틀림 없고, 그러므로 인간도 살 수 없다는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지만, 상사는 “이미 가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내렸다. 아마 그 세계관에서는 어찌 됐든 화성엔 사람이 가게 될 것이다.

이구름 대표는 영화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파타고니아의 ‘NOT MARS’ 콘텐츠를 꼽았다. 한국어로는 ‘화성은 됐고’로 번역된 이 콘텐츠는 화성에 인류를 보내겠다는 모 회사의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아 떠날 생각 말고 지금 사는 지구를 살릴 생각을 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출처: 인스타그램 @patagonia
출처: 인스타그램 @patagonia
다수의 학자가 지구의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담론을 내고 있다. 크게 두 갈래인데, ‘이미 늦었다’와 ‘이번이 마지막이다’로 나뉜다. 어찌 됐든 인류가 마션의 주인공처럼 “아무래도 X됐다”라고 외치기 직전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세태는 넷플릭스 시리즈 <돈 룩 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주변에서 더는 뉴스를 보지 않거나 헤드라인만 읽고 지나가거나 날씨만 확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부분은 ‘피곤해서’, 혹은 ‘무력해서’라고 한다. 거칠게 말하면 점점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시 말하면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들만 뉴스에서 쏟아진다는 의미다. 물론 세상에 ‘인간과 연관 없는 것’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담론에 참여하고 있다는 효능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뉴스에 나오는 일에 일반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는 다르게 분석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강연은 한승재 건축가와 정지돈 소설가가 예술과 도시에 대해 나누는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허무할 수 있는 예술 작업을 계속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질문에, 한승재 건축가는 ‘그냥 하는 것’, 정지돈 소설가는 ‘일상 속 행복’이라고 답했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덩이를 깊게 파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파서 옮겨 다녀야 한다는 말과 유사하다.

허무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의 감정이다. 없을 무가 세 번이나 들어간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무가치와 무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웅덩이로 옮겨가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손흥민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보다 박명수의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중꺾그마)이 더욱 인기를 얻은 데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무력감과 걱정을 떨칠 수 있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많이 만드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나의 경우 그토록 바라던 드립커피 용품을 샀고, 커피 박람회에서 산 원두를 내려 먹기 위해 빨리 잠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일상을 위로하고 있다.


황태린 님은 지구종말론의 혼돈 속에서 태어나 자연에게 배우며 자랐다. 역사, 심리, 소설, 인간, 테크 등 다양한 분야를 ‘덕질’하던 유년을 지나 지금은 홍보대행사 2년차 막내 직원을 거치는 중이다. 문예창작 전공으로 글로 배운 건 글뿐. 세상을 온몸으로 버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