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정 기자가 2022년부터 연재한 '여자야구 현주소' 시리즈와 국내 단독 취재로 전한 2023 여자야구 아시안컵, 2024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 보도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여자야구 선수들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냈다. 이와 같은 공로로 황 기자는 '제2회 최고의 야구 기자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또한, '황혜정의 두리번@@' 시리즈를 통해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티켓 시스템, 응원 도구의 지속가능성, 시각장애인 실시간 음성 중계 등 야구계의 사각지대에도 꾸준히 질문을 던져왔다. 감독과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세심하게 담아내며 팬들의 궁금증에 응답하기도 한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스포츠의 또 다른 얼굴을 전해온 황혜정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안녕하세요, 황혜정입니다. 작년 가을 스포츠서울에서 퇴사한 뒤, 요즘은 오마이뉴스에 틈틈이 야구 기사를 기고하면서 야구를 손에 놓지 않고 살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여자야구 현장을 꾸준히 취재해 오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어요. 처음 여자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기자 초년생 시절에는 발제 때문에 늘 고민이 많았어요. 인맥도 없는 신입이다 보니 '새로운 취재처를 뚫어보고 싶다, 좀 더 색다른 기사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러다 문득 여자배구, 여자농구, 여자축구 기사는 많은데 여자야구 기사는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국 여자야구연맹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취재해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마침, 그 주 주말에 여자야구 대표팀 훈련이 있다고 하길래 어머니 차를 얻어 타고 현장에 갔어요. 가보니 훈련 분위기도 너무 좋고 재밌더라고요. 남자야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공이 느린 만큼 선수들의 플레이를 더 집중하게 되고요. 그날 이후로 여자야구에 푹 빠져서 취재를 이어오게 됐어요.
2023년 홍콩에서 열린 '여자야구 아시안컵' 대회에서 대표팀이 '난적' 필리핀을 꺾고 세계대회 티켓을 따낸 순간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사실 여자야구는 국가대표 선수라도 인지도가 낮고, 후원도 부족하잖아요. 그런데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몸이 부서지라고 뛰더라고요. 선수들의 투혼에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울면서 더그아웃을 뛰쳐나오는 모습을 보니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그때 찍은 사진은 지금도 제가 가장 아끼는 사진 중 하나예요.
선수들과 나눈 인터뷰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면요?
베테랑 외야수 신누리 선수와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아요. "왜 그렇게까지 야구하세요?"라는 질문에 "사랑하면 뭔들 못할까요?"라고 답하더라고요.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어요.
여자야구 기사를 쓸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자야구의 '열악함'만 강조하지 않으려고 해요.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독자들이 그런 이야기는 잘 읽으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여자야구 선수들의 재미있는 스토리나 감동적인 일화, 남자 프로야구 선수들과의 인연같이 흥미로운 포인트를 담으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여자야구 국가대표 신누리 선수는 롯데 자이언츠 팬인데, 답답해서 내가 뛴다는 마음으로 20대 후반에 야구를 시작했다고 해요. 또 내야수 박주아 선수는 유명 가수와 절친한 사이지만 그 친구의 실명은 기사에 넣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자야구 선수들도 충분히 매력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흥미로운 스토리를 더 많이 찾아내서 대중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여자야구를 다루는 매체가 많지 않다 보니, 매번 기삿거리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기사 소재는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선수들의 SNS를 자주 살펴봐요. 은근히 기사로 풀 수 있는 소재가 많거든요. 최근에 쓴 '2024 MLB 서울시리즈 연습경기 볼걸(ball-girl)' 기사도 여자야구 선수들이 현장에서 찍은 셀카를 SNS에 올린 걸 보고 '이게 뭐지?' 싶어서 취재하게 됐어요. 이건 MLB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내용이라, 선수들의 SNS가 아니었다면 기사화되지 못했을 거예요.
맞아요. 손가은 선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다가 봉황대기 경기에 출전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여자 선수가 봉황대기에 뛴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기록을 문의했고, 손가은 선수가 고교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대회에 출전한 여자 선수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런데 정작 대회를 주최한 한국일보조차 기사로 다루지 않았더라고요. 현장에 기자가 있었는데도 말이죠. 저는 여자야구를 꾸준히 취재해 왔기에 이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단독 기사로 쓸 수 있었어요.
기자님이 계속해서 여자야구를 취재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사실 여자야구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취재예요. 대중적인 관심도 크지 않고, 조회수를 노리고 쓰는 기사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냥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돼요. '왜 아무도 이걸 기사로 안 쓰지? 나라도 써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거든요. 프로 스포츠는 팬이 많으니까, 기자가 굳이 떡밥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정보가 넘쳐나요. 여자야구는 그런 팬층이 없다 보니 직접 발로 뛰면서 기삿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저는 오히려 이런 과정이 즐거워요.
최근에는 KBO 출신 인사들이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에 잇따라 합류하면서 여자야구에 대한 주목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자야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양상문 감독님이 부임하신 영향이 컸죠. 그 인연으로 정근우 전 선수도 합류했고요. 이렇게 유명한 분들이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에 모이다 보니 코치진 수급도 수월해졌어요. 양 감독님의 애제자였던 이동현 스포티비 해설위원과 kt 위즈 출신 유원상 투수 코치 등도 자연스럽게 함께해 주셨어요. '여자야구 국가대표'라는 타이틀, 그러니까 태극마크가 가진 상징성도 크다고 생각해요. 태극마크라는 자부심이 더해지면서 더 많은 분이 여자야구에 관심을 두시는 게 아닐까요? 여자야구의 발전을 위해 정말 반가운 흐름이에요.
야구계를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보도자료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여기서 더 취재할 수 있는 건 없을지 고민해 봐요. 작년에 썼던 디지털 소외계층 기사도 구단에서 낸 보도자료가 출발점이었어요. 구단 관계자나 선수들과 단독 기사를 쓸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료에서 불합리한 지점을 짚어내는 것 역시 기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내부 자료를 확보하기 전에, 우선 공개된 정보부터 꼼꼼히 들여다보는 편이에요. 공개된 자료라고 해서 늘 투명하고 공정한 건 아니거든요.
프로 스포츠의 이면에는 화려한 인기에 가려진 아픈 속살도 많아요. 스포츠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대개 스타 선수들의 멋진 활약에 열광하기 때문에 기자 입장에서 그 이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망설여지기도 하죠. 그래도 저는 그 속살을 들춰내면서도, 재밌고 흥미로운 기사를 쓰려고 해요.
이러한 시각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생 때 장애인 학우의 수업 도우미로 활동한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용돈벌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장애를 가진 학우들과 함께 수업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이 겪는 불편함에 눈을 뜨게 됐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졌죠.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내일은 뭘 써야 하지?' 막막하던 어느 날, 문득 '장애인 티켓 가격은 어떤 기준으로 책정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호기심이 취재로 이어졌어요.
말씀하신 야구장 휠체어석 티켓 가격 기사도 야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취재 과정은 어땠나요?
정말 우연히 시작된 취재였어요. 야구장 티켓 가격이 궁금해져서 찾아보다가, 휠체어석 가격이 구단마다 너무 다르다는 걸 발견했어요. 일반석 가격은 거의 비슷한데, 휠체어석은 최대 3.8배까지 차이가 나더라고요. 놀라웠던 건, 그동안 이 문제를 다룬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마침, 그다음 날 고척스카이돔으로 취재를 가게 되었고, 현장에서 휠체어석에 앉아 계신 관중분께 조심스럽게 티켓 가격에 대해 여쭤봤죠. 그분도 이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는지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들려주셨어요. '이분들에게도 스피커가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일반석과 휠체어석의 가격 차이가 가장 컸던 구단이 키움 히어로즈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동반자는 별도로 좌석 요금을 내야 했는데, 기사가 나간 뒤 '동반자 1인 무료'로 정책이 바뀌었더라고요. 그게 정말 뿌듯했어요. 기사 자체도 대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독자 반응도 좋았어요. 제가 지금까지 쓴 기사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기사예요.
기자로 활동하면서 특히 여성 기자로서 겪은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여성 기자로서 프로야구 선수들을 대할 때 조금 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예전에 부장님께서 "취재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선수한테 카톡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저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생각을 바꿔서, 여자 선수들을 많이 공략하는 편이에요. 같은 여자로서 여자 선수들에게 조금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면이 분명히 있거든요. 여자야구 선수들과는 인스타그램 친구도 맺어서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여자야구를 취재하면서 좋은 인연들이 많이 생겼어요. 여자 선수 중에는 오빠나 남동생을 따라 야구를 시작한 경우가 많아요. 이들이 건너 건너 야구하는 친구들을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저도 프로야구나 고교야구, 독립 야구 단독 기사도 하나씩 쓸 수 있게 됐어요. 자신 있는 길을 뚝심 있게 파다 보니 하나씩 외연을 확장할 수 있게 됐어요. 처음에는 여자야구 취재가 프로야구와 무관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 의미 없는 취재는 없다'는 걸 실감했어요. 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발굴해 세상에 내놓는 일이 그렇게 재밌고 뿌듯할 수 없더라고요. 비인기 종목을 더 많이 주목해야 할 개인적인 사명이 생겼어요.
이진호 기자/이다윤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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