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속제도

부모들의 자녀 걱정은 나라님도 못 말린다고 했던가. 자녀들의 판단 능력이 떨어져 상속 재산을 흥청망청 써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미국에서는 이 같은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낭비자신탁’을 설정해 운영하고 있다.
[BIG STORY] 자식 걱정에 잠 못 드는 부모 美 ‘낭비자신탁’ 아시나요
상당한 부를 축적한 자산가들 중에 자녀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녀가 성실근면하고 경제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면야 걱정이 없겠으나, 모든 자녀가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녀가 판단 능력이 매우 떨어지거나 낭비가 심할 경우 자녀에게 남긴 상속 재산을 사기 당해 순식간에 전 재산을 날려 버리거나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상속 재산이 이렇게 사라져 버리게 되면 그 재산을 모으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부모의 인생이 허무해질 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가 바람과 달리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처럼 자녀가 믿음직스럽지 못할 때 어떻게 하면 안심하고 자녀에게 상속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럴 때 자녀에게 상속한 재산을 자녀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거나 자녀의 채권자가 압류할 수 없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속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법정상속이나 유언을 통한 상속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법정상속은 민법에 정해진 대로 상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피상속인(부모)의 의사를 전혀 반영할 수 없다.

그나마 유언장을 작성하면 어느 정도 유언자의 의사를 반영한 상속이 이루어질 수 있으나, 유언법정주의(법률에 규정된 사항에 관해서만 유언이 가능하다는 원칙) 등으로 인해 이 역시 유언자의 구체적인 의사나 소망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경우에 신탁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신탁은 위탁자(부모)가 원하는 사항을 모두 담아 둘 수 있는 매우 융통성 있는 상속의 수단이다.


못미더운 자녀, 낭비자신탁으로 해결
미국에서는 낭비가 심해서 재산을 탕진하거나 채권자들로부터 재산을 모두 빼앗길 위험이 높은 자녀를 둔 경우에 ‘낭비자신탁(spendthrift trust)’을 설정한다. 신탁의 수익자는 원칙적으로 자신이 신탁으로부터 받을 이익(수익권)을 양도할 수 있다. 그러나 위탁자는 수익자가 신탁으로부터 얻게 될 이익을 마음대로 양도하지 못하게 하거나 수익자의 채권자가 신탁 재산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를 원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신탁 유형이 바로 낭비자신탁이다.

수익자가 신탁 재산을 낭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신탁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자신의 자녀가 경제적으로 무책임하다고 느끼는 부모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위탁자는, 수익자가 신탁으로부터 얻게 될 이익을 양도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다.

낭비자신탁 설정 시 수익자는 신탁의 수익을 양도할 수 없게 되며 수익자의 채권자는 신탁 재산을 압류할 수 없게 된다. 신탁 재산 그 자체 또는 신탁으로부터 얻게 될 이익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매매되거나 양도될 수 없고, 담보로 제공될 수 없으며, 수익자의 채권자가 이를 집행(압류)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낭비자신탁의 키워드는 ‘양도 금지’와 ‘집행 면제’다. 그러나 일단 수익자가 낭비자신탁으로부터 이익을 분배받고 나면, 그 분배받은 이익은 이제 더 이상 낭비자신탁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수익자가 자유롭게 양도할 수도 있고 수익자의 채권자가 압류할 수도 있다. 낭비자신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탁 재산의 이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낭비자조항(spendthrift clause)’을 신탁증서에 포함시켜야 한다.

수익자의 채권자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낭비자신탁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경우에는 법률이나 판례로써 낭비자신탁에 대한 압류를 인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위탁자가 스스로를 수익자로 지정하는 ‘자익신탁(self-settled trust)’의 경우까지 집행면제를 인정할 경우에는 위탁자가 채무면탈을 목적으로 낭비자신탁제도를 악용할 소지가 높기 때문에 자익신탁의 경우에는 낭비자조항의 효력을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낭비자신탁의 수익자를 상대로 부양료 또는 생계비 청구를 해 승소판결을 받은 수익자의 자녀 또는 배우자는 낭비자신탁에 대해서도 압류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 오리건 주에 사는 그랜트 셸리(Grant Shelley)는 두 번 혼인하고 두 번 이혼했는데, 낭비자신탁의 수익자였다. 셸리의 자녀들과 전처들이 그를 상대로 부양료 및 이혼수당을 청구해 승소판결을 받아서 그의 유일한 재산인 낭비자신탁에 대해서 압류를 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오리건 주 대법원은 낭비자신탁이 셸리의 자녀들과 전처들의 부양료 청구 및 이혼수당의 집행 대상이 된다고 판결했다. 또한 신탁 수익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서비스를 제공한 채권자에 대항해서는 낭비자조항의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
[BIG STORY] 자식 걱정에 잠 못 드는 부모 美 ‘낭비자신탁’ 아시나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슈라이버 대 켈로그(Schreiber v Kellogg) 사건(1995년)에서 변호사인 슈라이버는 낭비자신탁의 수익자인 켈로그를 위해 법률 자문을 해주고 주식매매를 통해 신탁 재산을 증가시키는 등 서비스를 제공했으나 그 대가를 지급받지 못했다.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신탁의 수익자를 위해 제공한 서비스가 수익자의 이익을 유지하거나 증가시키는 것이었다는 점이 입증되면 신탁으로부터 대가를 지급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다. 다만 낭비자신탁의 수익자로부터 불법행위를 당한 피해자도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낭비자신탁으로부터 집행할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 미시시피 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윌리엄 슬라이(William Sligh)는 1993년 1월에 진 로렌스(Gene Lorance)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의해 사고를 당했는데, 당시 로렌스는 무보험 운전자였을 뿐 아니라 약물에 중독된 상태였다. 슬라이는 척추손상으로 인해 전신마비가 됐고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됐으며 모든 성기능을 상실했다.

로렌스는 이 사고의 책임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슬라이와 그의 아내인 러키는 로렌스를 상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500만 달러의 배상판결을 받아냈으나, 로렌스에게는 이를 지불할 재산이 없었다. 다만 로렌스는 두 개의 낭비자신탁으로부터 수익을 얻고 있었는데, 이 신탁은 로렌스의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인 1984년과 1988년에 낭비가 심한 아들을 위해 설정한 것이었다.

미시시피 주 대법원은 낭비자신탁의 효력을 유지하려는 정책적 이유가 불법행위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면서 불법행위의 피해자는 낭비자신탁으로부터 수익자가 받는 이익을 압류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미시시피 주 대법원은 불법행위의 피해자를 낭비자신탁의 예외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미시시피 주를 제외한 많은 주에서는 불법행위의 피해자도 낭비자신탁의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있으며, 미국의 많은 법령들이 불법행위의 피해자를 낭비자신탁의 예외 사항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신탁을 통한 상속이 가능하다. 특히 2011년에 전면 개정된 신탁법에 따르면, 상속을 위해 생전에 미리 재산을 신탁하는 유언대용신탁이나 수익자를 아내에서 장남으로, 장남에서 장손으로 연속해서 지정할 수 있는 수익자연속신탁이 가능하다.

우리의 경우에도 미국과 같은 낭비자신탁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에 관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식 신탁제도를 받아들인 이상 자식 걱정으로 인해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부모들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제도가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