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림의 스타일이 있는 식탁
평소 손님 초대가 잦은 필자의 집 식탁에는 종종 19세기나 20세기 초의 앤티크 커트러리 세트가 놓이곤 한다. 커트러리(cutlery)는 플랫웨어(flatware)라고도 불리는데 두 단어를 합쳐보면 ‘납작하게 생긴 자르는 것들’이라는 말로 의미가 명확해진다. 우리말로는 식기류라 해석할 수 있겠다. 나이프, 포크, 스푼, 그리고 음식을 나눠먹는 데 쓰이는 각종 서버 등을 말한다. 대개 정찬 식탁에 놓이는 커트러리의 종류는 다양하며 무척이나 화려하다. 필자가 수집해왔던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커트러리는 스털링 즉, 92.5%에서 95% 이상의 순도를 가진 은식기류가 대부분이다. 커트러리로 세팅된 식탁은 품격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한 식탁을 자주 접하는 필자의 남편은 커트러리가 여러 개 놓인 식탁을 처음 대하는 손님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종종 감지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좌빵우물(左빵右물)! 그리고 바깥 것부터 사용하는 거 맞죠?”라는 말로 다소 낯선 식탁을 접한 손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 노력한다.소수 상류층이 향유한 은식기 문화
실제로 숟가락, 젓가락, 주걱, 국자 정도인 우리의 식기류에 비해 서양의 커트러리 종류는 상당히 세분화돼 있다. 커트러리의 종류는 당연히 음식의 종류와 관련성을 가지고 나뉜다. 특히 요리를 모두 식탁에 차려 두고 각자 덜어 먹는 방식에서 코스에 따라 음식을 순차적으로 내오고 각각 다른 식기로 먹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서양의 식기류는 ‘범람’ 수준에 이르렀다. 빅토리안 시대에는 ‘식기류의 천국’이라고 불릴 만큼 그 종류가 많아지게 된다. 정찬 코스에서 나이프만 해도 전채, 생선, 육류, 디저트 등의 코스에 따라 각각 다른 나이프를 쓴다. 여기에 버터 나이프, 치즈 나이프, 덩어리로 된 고기를 직접 잘라 서빙하는 카빙 나이프까지 더해진다. 스푼은 기본적인 것 외에 각종 과일용 스푼과 주스 스푼, 보기에도 앙증맞은 소금·겨자용 조미료 스푼, 티 문화와 관련된 티스푼, 봉봉 스푼 등 각각의 용도에 따라 그 종류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 외에도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샌드위치, 감자칩 등을 서빙하는 서버류와 각종 집게류, 국자류가 있다. 당시 수많은 종류의 은식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은 극소수 상류층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접하는 그 시대의 커트러리 세트에는 귀족 가문의 문장이 포크나 스푼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또 결혼식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용 커트러리인 경우에는 받는 사람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장발장’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그 당시 은식기는 교회나 귀족 가문에서도 상당히 귀한 것이어서 여러 하인들 중에서 경력이 많은 유능한 하인들만이 그것을 다루도록 정해져 있었다. 젓가락 문화인 아시아권 식문화에 비해 서양은 나이프와 포크의 식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언제부터 서양 사람들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놀랍게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특히 포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큰 덩어리의 고기를 넓은 통에서 삶고 로스팅할 때 쓰이는 부엌 도구로서의 포크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식탁용 포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조롱과 비난이 거셌다. 11세기에 역사상 최초의 포크가 등장한 이후로 1700년 무렵 유럽 전역에 포크가 퍼지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 모든 물건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용도가 있어야 하는데, 유럽 역사에서 15세기 중엽까지 중세시대는 말 그대로 찍어 먹을 만한 음식이 거의 없었다. 인구의 대부분이 농노였던 그 시대에는 먹을 음식이 오직 묽은 죽과 빵이 전부였으니 포크의 등장 자체가 무리였던 것. 16세기 무렵 극소수의 이탈리아 귀족층들 사이에서 비싼 비단옷을 더럽히지 않고 음식을 먹기 위해 포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크는 용도라는 측면 이외에도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식탁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신의 은총인 음식을 신이 만들어준 인간의 손 이외의 것으로 집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많은 종교인들은 포크가 식탁 위에 놓이는 것을 터부시했다.
1600년대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은 손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었으니 우리나라로 말하면 임진왜란 후 선조 시대와 같은 시기인 셈이다. 16세기 종교개혁과 18세기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포크는 무수한 핍박을 이겨내고 이탈리아를 넘어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카트린느 왕비가 1533년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포크는 프랑스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게 된다.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17세기가 돼서야 그것은 귀족사회에서 비로소 갖고 싶은 선망의 물건으로 등극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의 화려한 식문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절대군주 태양왕 루이 14세가 이룬 베르사유 궁전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포크는 두 갈래에서 세 갈래, 그리고 네 갈래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포크는 금, 은 소재에 상아나 진주 등 보석으로 장식된 귀족이나 성공한 상공인의 신분과시용 사치품이었다. 이후 18세기 산업혁명기에 철 생산 라인의 획기적인 변혁은 철의 대량 공급을 가능하게 했으며 스털링(순은)이 아닌 은을 도금한 실버플레이트 포크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이는 포크의 대중화로 이어졌고 무수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아 비로소 사치품에서 일상용품으로 대중의 식탁에 안착하게 됐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탈리아로부터 포크를 받아들인 프랑스의 높아진 위상이다. 16세기 중엽 포크 도입 이후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절대왕정부터 루이 15·16세를 거치며 화려한 궁정 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모든 유럽의 왕실들은 프랑스의 궁정 문화를 선망하며 문화적인 모든 면에서 프랑스적 취향을 따라 하고자 노력했다. 식탁 문화의 발전이 전반적인 문화 선진국으로 프랑스를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 선진국으로서 프랑스의 입지는 현대 모더니즘 예술의 가교 역할을 한 ‘아르누보’라는 예술사조의 발원지가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집밥’있는 예쁜 식탁으로 가족을 초대하자
오천년 역사의 문화 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의 식탁 문화는 어떤가. 이런저런 불안정한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살림살이가 저마다 팍팍해졌다고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앞뒤 보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부모님 세대, 그리고 우리 모두 수고 많았고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포기하거나 잊고 살았던 많은 것들 중에서 꼭 다시 챙겨야 할 것도 되짚어볼 일이다. 단언컨대 우리의 식탁 문화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식탁이라는 공간은 식구들 모두가 모여 하루 일과를 얘기하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소중한 곳이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분명 정성껏 차린 ‘집밥’일 것이다. 요즘 우리는 과연 일주일에, 아니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족 모두가 모인 식탁을 마주하고 있는가. 아침에는 나가기 바쁘고 저녁엔 늦게 귀가한다. 그밖에 다이어트 등 이런저런 이유로 식탁에 온 식구가 둘러앉는 일이 쉽지 않다. 정작 온 식구가 모일 수 있는 기념일이라도 되면 적당한 식당을 찾느라 바쁘다. 그러니 어른들의 따뜻한 조언이나 음식 하나를 두고 형제간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배려도 찾기 힘들어졌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고, 그 언저리에는 아마도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이 있을 것이다.
2015년도 어느덧 한 달이 훌쩍 가버렸다. 이제 우리 집도 한 달에 몇 번 정성껏 마련한 ‘집밥’이 있는 예쁜 식탁으로 가족들을 초대해보면 어떨까? 19세기 시대에 귀족들이 썼던 화려한 은식기는 아니더라도, 집에 있는 가장 예쁘고 귀한 그릇을 꺼내고 예쁜 매트도 깔아 식구들을 화려하게 유혹해보자. 머그잔에 밀려 1년에 한 번도 바깥 구경하기 힘들었던 티잔 세트와 블링블링한 크리스털 물컵을 꺼내보자. 식구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티파티는 일류 호텔의 값비싼 티파티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봄을 알리는 홍매화 한 가지를 구해 운치를 더하면 금상첨화다.
백정림 이고 갤러리 대표 |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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