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택스러운’ 홍경택

언뜻 보면 엄청난 변화가 느껴진다. ‘그린 그린 그래스(Green Green Grass)’라는 타이틀이 주는 색감만 떠올리더라도 이전의 작업들과 분명 경계를 긋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홍경택은 여전히 홍경택이었다. 다만, 정물에서 풍경으로, 그리고 작가 자신으로 시선이 다소 이동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 이와 같은 변화는 작가의 내면이 더 깊어졌음을, 사유가 확장됐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대화하는 내내 떠올랐던 국화꽃의 이미지는 서정주의 시 한 구절을 떠오르게 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재-에베레스트산 (Library-Mt. Everest)’, acrylic and oil on linen, 194×259cm, 2014년
‘서재-에베레스트산 (Library-Mt. Everest)’, acrylic and oil on linen, 194×259cm, 2014년
눈이 시리도록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것의 반복,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그간 홍경택 작가의 작품들에서 거론되던 표면적인 이야기들은 대략 그 범주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그 명료한 이미지 안에서 추출되는 담론들은 인간의 근원을 꿰뚫는, 보다 본질적인 것들이다.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욕망이라든가 그를 통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 같은.

그러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홍 작가의 작품은 일단 비주얼적으로 충분한 매력으로 자극을 준다. 알록달록한 펜들이 폭발하듯 화폭 가득 채워져 있는 ‘펜(Pen)’ 시리즈와 책과 다른 오브제들이 역시 빈틈없이 구현된 ‘서재’ 시리즈, ‘펑크(funk)’라는 음악 장르와 ‘오케스트라(orchestra)’의 합성어란 점에서 알 수 있듯 음악, 미술, 패션 등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조합한 ‘훵케스트라(Funchestra)’ 시리즈 등은 가볍고 또 즐겁다. 대중과 평단, 양쪽 모두로부터 확고한 존재감을 인정받는 건 그렇듯 형식과 내용, 혹은 외연과 내면 그 어느 하나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립해 있는 균형감 때문이 아닐까.

먼저 후자적 입장에서 그의 작품이 좋아졌고, 작품이 품고 있는 사유 때문에 더 열광하게 된 사람으로서(물론, 솔직히 홍콩 크리스티에서 ‘가장 비싼 한국 작가’로 통하는 것도 한몫한다), 대놓고 ‘달라졌다’고 말하는 홍 작가의 개인전을 기다리는 마음은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런저런 에피소드로부터 짐작되는 그의 캐릭터가 큰 변화를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인 터라 더욱 더.


국화꽃·우주, 그리고 40대 끝 무렵의 자화상
이름값에 비해 개인전은 드물게 하는 편인 홍 작가가 이번 전시에 들고 나온 타이틀은 ‘그린 그린 그래스’다. 톰 존스의 노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에서 떠올린 것으로, 눈에 보이는 풍경 이면의 현실과 욕망을 빗대었다. 한편으론 그간 작업해 왔던 시리즈들의 연장선이자, 일부 작품에선 그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는 회고의 느낌마저 들게 했다. 마흔 중턱을 넘어 후반을 향해 있는 홍 작가는 “젊음을 마감하면서 그린 자화상”이라고까지 표현했지만, 달라진 오브제를 같은 형식을 빌려 더 깊어진 내면을 고백하는 것으로 들렸다.

전시 오프닝이 열린 지난 12월 5일, 인기를 증명하듯 오프닝 몇 시간 전부터 북적대던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 한쪽에 그와 마주앉았다. 2013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2014년 초대전이 끝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섯 개의 하늘(six celestial bodies)’, oil on linen,  195×195cm, 2014년
‘여섯 개의 하늘(six celestial bodies)’, oil on linen, 195×195cm, 2014년
한 달 만에 또 전시라 정신 없으셨겠네요. 2014년 12월 말까지 홍콩 크리스티에서도 전시가 열렸었죠.
“그러네요. 홍콩에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작가에게 제일 중요한 건 개인전이니까요. 대구에서 열린 이인성 미술상 수상 초대전은 규모가 커서 마치 중간 평가 같은 느낌이었어요. 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하룻저녁의 이벤트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평론가 분들과 전문가 집단이 선정해주셨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입니다.”


작품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작정하신 건가요.
“저보다 앞서 전시를 열었던 김기라·권오상 작가(2014년 페리지 아티스트로 선정된 작가들의 전시가 차례로 열리고 있다)가 워낙 센 변화를 보여줘서 자극을 많이 받았죠. 그것 때문에 더 정신없었던 것 같아요.”


같은 메시지인데 확장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간 정물 중심으로 작업했다면 풍경으로 넘어가면서 사유의 폭이 넓어진 듯해요. 위치 이동도 됐다고 생각하고요. 앞으로는 풍경을 좀 더 해볼 생각입니다.”


풍경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가 있나요.
“해보지 않았던 것 중 하나기도 하고요, 예전에 비슷한 의뢰가 온 적이 있는데 성향이 너무 달라서 거절했던 적이 있어요. 신작에 등장하는 푸른 풍경은 거의 골프장인데, 골프장이 굉장히 인공적인 공간이잖아요. 그간 제 그림에 등장했던 인공적인 오브제들과 매칭이 된다는 걸 깨달았죠. 또 하나는, 골프장을 그리면서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라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가사를 보면 한 죄수가 감옥에서 푸른 고향을 그리는데 꿈을 깨고 보니 온통 회색 벽이더라는 내용이죠. 노래는 고향을 그리는 아주 순수한 욕망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골프장은 많은 이들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욕망하는 공간이잖아요. 욕망이 다양한 사회가 건강한데 우리는 모두가 같은 공간을 욕망하니, 그걸 빗대서 표현하고 싶었죠.”
‘서재-골프장(Library-Golf Course)’, acrylic and oil on linen, 194×259cm, 2014년
‘서재-골프장(Library-Golf Course)’, acrylic and oil on linen, 194×259cm, 2014년
에베레스트 산도 등장하던데요.
“골프장을 그리고 나니 욕망을 자극하는 풍경이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에베레스트는, 물론 누군가는 순수한 마음으로 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복해서 모두를 굽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목숨 걸고 오르는 욕망의 대상 아닐까요. 사람이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게 욕망이잖아요. 국내외를 통틀어 인간의 공통 코드이기도 하고요.”


신작 ‘반추’도 홍 작가님의 달라진 관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영어 제목이 ‘리플렉션(reflection)’인데 ‘반추’라고 하셨어요.
“회고 조가 돼버렸는데, 그 자체로 제 나이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30대에 그런 제목을 달았더라면 어색했겠지만 지금은 제가 40대 끝 무렵이기도 하고요. 골프채를 모아놓고 보니 코스모스처럼 보였는데 코스모스가 ‘국화과’ 식물이거든요. 국화 하면 생각나는 것들도 있고, 드라이버 표면에 제 모습이 반사되는 것도 보이고, 여러모로 젊음을 마감하면서 그린 자화상이에요.”


국화라, 원숙미네요. 홍 작가님 모습이 등장하는 건 우연치 않게 얻어진 결과물이라고 들었어요.
“제가 골프를 전혀 몰라요. 이번 작품들에 골프장도 등장하지만, 실제로 골프장에 가본 건 딱 한 번이에요. 그나마 숙소가 거기 있어서 그랬던 거지 골프를 치러 갔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골프채를 자꾸 보니 구조나 모양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물론 처음 그리는 물체다 보니 이걸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처음엔 벽에 많이 부딪쳤어요. 그 와중에 제 모습이 반사되는 걸 봤고, 자화상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배경으로 우주가 등장하는 건, 코스모스(cosmos)가 우주를 뜻하기 때문이고요.”


오브제 하나로 시작되는 사유의 깊이가 대단하군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리진 않습니다. 일단 저지르는 편이죠. 다만 저는 제 작품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합니다. 학생시절에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림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항상 귀 기울이라고. 그 말씀이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Green Green Grass 1’, acrylic and oil on linen, 194×256cm, 2014년
‘Green Green Grass 1’, acrylic and oil on linen, 194×256cm, 2014년
‘반추’도 이제 새로운 시리즈가 되는 겁니까.
“다른 작품들과 병행하게 될 것 같아요. 작가는 원하는 시간에 하고 싶은 걸 해야 진짜 좋은 작품이 나오거든요. 그게 작가의 특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작업 방식이 들쑥날쑥해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면 하던 걸 다 접고 새로운 걸 하죠. 그 순간이 지나가면 생각이 안 나거든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리기도 하는 건 그래서예요. 개인적으론 그 방식이 좋아요. 지겨운 걸 참지 못하는데 지겹지 않거든요.”


의외네요. 태어난 천호동에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기에 꽤 규칙적인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변화를 싫어하는 편이긴 해요. 천호동을 못 떠나는 건 어쩌다 그리 됐는데, 일단 조용해서 뚝 떨어져 몰두하기에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좀 양면적인 것 같아요. 변덕스러움이 있는 반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변치 않는 게 있거든요. 초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금붕어를 키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음악을 좋아해서 음반을 사 모으는 것도 그렇고, 만화책도 많이 사는 등 몇 가지 그런 게 있어요. 그것들이 저를 쇄신하고 자극을 주면서, 작품 안에서 변화가 가능하게 하죠.”


종교와 세속, 정상과 비정상의 균형
작품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건 그렇듯 홍 작가에게서도 증명되는 바다. 미술가와 떼놓을 수 없는 연필도, 음악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도 홍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는 절대적 존재들이니까. 그렇듯 자기 자신이 투영된 작품들이 홍경택이라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해줬으니 ‘홍경택스러움’이 가진 힘은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스타작가’의 타이틀이 쉽게 얻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랜 무명 시절을 지내던 어느 날 눈에 들어와 그리기 시작한 펜 시리즈도 처음엔 좋은 평에 비해 판매가 잘 되지 않았을 정도다. 2013년 5월, ‘펜슬 1’이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수수료를 포함해 9억6800만 원의 낙찰가로 리세일된 것을 상기하면, 참 씁쓸한 대목이다.
‘연필그림-여섯 개의 하늘(Pens-six celestial bodies)’, oil on linen, 250×250cm, 2014년
‘연필그림-여섯 개의 하늘(Pens-six celestial bodies)’, oil on linen, 250×250cm, 2014년
‘펜’ 시리즈에 대해서는 만감이 교차할 것 같아요.
“솔직히 이제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간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고요. 물론 자식으로 치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해도, 특히 고마운 존재인 건 맞죠. 지금처럼 작업할 수 있는 베이스를 만들어준 건 사실이니까요. 연필이라는 게 화가에게는 신체의 일부이기도 하고요.”


신작 중에도 종교적 색채가 드러납니다만, ‘훵케스트라’ 작품들을 대표로 홍 작가님 작품 평론에서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삶과 죽음, 종교와 세속입니다.
“방점을 찍고 싶은 게 종교입니다. 수천 년간 인간의 삶을 지배한 게 종교예요. 그게 사람들과 멀어진 게 한 100년도 안 되지 않았나요. 사회가 아무리 고도로 발달해도 종교나 신앙은 인간 의식 속에 녹아 있고 또 밀접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희석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쩌면 지금 같은 물질의 시대, 영적인 것과 멀어진 시대야말로 사람들이 버티기가 더 힘들고, 해서 더욱 종교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균형을 잡아야 하니까요. 또 저 자신도 굉장히 세속적이면서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20~30대에는 그것 때문에 괴로웠는데 지금은 둘 다 인정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불안정하니까요.”


종교적인 인간이요?
“전 가톨릭 신자예요. 성당에 잘 안 나가긴 하지만,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종교가 없다면 제 그림은 굉장히 단순해지고, 복합적이지도 못할 것 같아요. 작가는 밖에서 보기엔 비정상적이고 사회와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좋은 작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균형 감각이 뛰어나요. 그렇게 미친 사람도 아니고, 또 완전히 세속적인 사람도 아니고,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롱런할 수 있죠. 작품도 삶도 균형이 중요하지 않나요.”
‘반추 2(Reflection 2)’, oil on linen, 200×200cm, 2013년
‘반추 2(Reflection 2)’, oil on linen, 200×200cm, 2013년
균형감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시나요.
“종교가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 제 스스로 목표를 만들어놔요. 어떤 특정한 목표가 되기도 하지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걸 되새기는 것으로도 도움이 되죠.”


일상의 중요성인가요.
“맞아요. 이전의 작가들은 내용이 거창했다면, 저는 보통 사람이 느끼는 고민과 관심사를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공감을 얻게 되고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군요.
“우리는 문화 안에서 다 같은 대중이에요. 그런데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커졌죠. 전에 봤던 짧은 문장이 강렬했는데, ‘대중은 스타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이었어요. 그들이 죽으면 시대의 종언이라고도 하고요. 이처럼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커진 시대다 보니 영향을 받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죠.”


홍 작가님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엔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을 텐데요.
“그랬죠. 그래서 제 그림을 폄하하던 사람도 있었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억압적 시대가 없었더라면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제 그림에 만족하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사람이거든요.”


홍 작가는 지금 자신의 위치에 대해 “운이 팔십 이상”이라고 했다.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세계가 짐작되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여전히 진정 열심을 다하는 작가였으니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