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련 송원그룹 회장

김해련(52) 회장은 25년 경력의 베테랑 최고경영자(CEO)다. 1999년 국내 최초 트렌드 연구소 에이다임을 창업해 한때 월 25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한 여성 벤처사업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랬던 그가 올 6월 돌연 화학소재 중심 중견그룹인 송원그룹 회장에 올랐다.

김해련 ‘대표’가 올 3월 타계한 김영환 송원그룹 전 회장의 외동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깜짝쇼’ 같은 취임식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40년 전, 고(故) 김 전 회장이 정성스레 심고 가꾸어온 작은 묘목을 거대한 ‘소나무 동산(松園)’으로 키우는 것, 그것이 ‘야생’에서 살아 돌아온 김해련 송원그룹 회장의 미션이다.
[SUCCESSOR] 2세 경영인, 25년간 야생에서 경영 수업 받은 사연
송원그룹은 1975년 설립한 태경산업(옛 한국전열화학공장)에 뿌리를 둔 화학소재 중견그룹이다. 합금철과 중질탄산칼슘(GCC) 등을 만드는 태경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용 가스를 생산하는 태경화학, 석회석 가공회사인 백광소재 등 9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 밖에도 문막, 서산, 충주 등 6개 고속도로 휴게소를 운영하며 창업한 지 40년 만에 연간 54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알짜 기업으로 성장했다.

올 3월 창업주 김영환 회장이 타계하면서 외동딸인 김해련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김 회장은 취임식에서 2020년 비전으로 ‘새로운 성공, 도약 1·3·5·7’을 제시했다. 2020년까지 매출 1조 원, 신규 사업 매출 3000억 원, 상장회사 5개, 세계 최고 제품 7개를 달성하겠다는 것. 잘나가던 벤처사업가에서 2세 경영인으로 변신한 그를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좀체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일정이 미뤄지기를 3개월, 김 회장 측으로부터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며 연락이 왔다.


도요타자동차에 할로겐전구 납품, 세계 톱 기술력 인정받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0월 2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송원그룹 집무실에서 만난 김 회장의 얼굴은 밝았다. 그는 송원그룹 핵심 계열사인 남영전구가 10월부터 도요타자동차에 안개등용 할로겐전구 ‘H16’을 납품하기로 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스람, 필립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3개 회사가 장악한 전 세계 자동차용 할로겐전구 시장에 국내 전구조명업체로는 처음으로 남영전구가 진출했다.

“자동차용 할로겐전구 시장은 진입장벽이 꽤 높습니다. 특히 완성차 부품의 경우 소비자 리콜이 들어오면 기업 입장에선 치명적이어서 불량률을 제로로 만들어야 합니다. 콧대 높은 일본차, 그중에서도 도요타와의 납품 계약 체결은 남영전구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조 매출 목표에도 한 걸음 다가선 것이지요.”

회장에 취임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이룬 실적치고는 대단했다. “역시 벤처사업가 출신답다”고 했더니 손사래를 친다. 그는 “40년간 한 우물만 판 아버지의 뚝심과 진심이 이제야 하나씩 빛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질탄산칼슘(태경산업), 고농도 중탄산 슬러리(백광소재), 반도체 세정용 액체탄산·친환경농업용 그린탄산(태경화학), 초미립 액상소석회(경인화학산업) 등 송원그룹이 기술력을 자부하는 9개 계열사의 소재와 제품은 모두 국가 기간산업의 필수 원료이지만 국내 산업계에 거의 경쟁 상대가 없는 독특한 사업군들이다. 특히 종이를 만들 때 첨가되는 중탄산 슬러리의 경우 생산하는 회사가 스위스의 오미야 등 전 세계에서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창업주인 고 김영환 회장의 혜안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버지께서는 뭘 하나 붙들면 끝까지 가는 성격이었어요. 사업가로서 한 번 시작하면 그것이 경쟁력을 가질 때까지 가져간다는 신념을 지니셨죠. 30년 전 광산 사업을 시작했던 분들 중엔 아직도 돌멩이를 팔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아버지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망한다는 것을 알고 꾸준히 고부가가치 산업을 좇아왔습니다. 저는 그동안 송원이 만들어온 핵심 역량을 글로벌 감각으로 잘 포장해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기업으로 키워나가야죠.”

송원그룹의 롤 모델은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 IBM이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만들다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나중엔 컨설팅과 솔루션까지 고객에게 원스톱으로 제공한 것처럼 토털 서비스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송원그룹의 신성장 동력 중 하나인 LED전구(남영전구)도 퀄리티 높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치, 판매, 사후관리(AS)까지 가정용 발광다이오드(LED) 패키지를 만들어서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10년 안에 국내 가정집의 모든 조명은 LED전구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격도 점점 떨어지는 데다 에너지 절감 측면에서 상당히 효율적이죠. 우리나라 가구 수가 대략 3000만 정도 됩니다. 이들이 집 안의 모든 등을 LED로 바꾸는 데 100만 원이 든다고 가정하면 30조 원 시장이에요. 분명 미래의 먹을거리가 될 것입니다.”


맨주먹의 벤처사업가, 중견기업 2세 경영인이 되다
김 회장은 맨 주먹으로 벤처기업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로 20여 년 전 이미 숱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89년 29세의 나이에 여성복 브랜드 ‘아드리안느’를 창업해 당시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15개 매장에서 연간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1999년에는 온라인 쇼핑몰 ‘패션플러스’와 국내 최초 트렌드 컨설팅회사 ‘인터패션플래닝’을 둔 트렌드 전문 그룹 에이다임을 만들어 월 매출 25억 원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이후 토종 패스트 패션 브랜드 ‘스파이시 칼라’를 론칭해 국내외 패션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 회장은 2012년 에이다임을 매각한 후 송원그룹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10년 전부터 송원그룹의 임원 회의에 꾸준히 참석해왔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 누구도 김 회장이 ‘후계자’인지 알지 못했다고.

“송원그룹으로 간다고 했더니 정말 가까운 지인들조차 깜짝 놀랐어요. ‘왜 감쪽같이 속였냐’고 야속해하기까지 했죠. 제가 반문했습니다. 나를 10, 20년간 만나면서 아버지 뭐하시냐고 물어본 적 있냐고요.(웃음) 저는 아버지와 별개로 저만의 사업을 해보고 싶었고 철저하게 을(乙), 아니 병(丙), 정(丁)으로 살았습니다. 1000만 원짜리 계약을 수주하려고 별 난리를 다 피워봤으니까요. 고객사 브랜드 영업부장에게 굽신거리고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면 다시 못할 일이죠. 아버지가 사업을 워낙 잘하시니 사업이 쉬운 것인 줄만 알았는데, 시작하고 나서는 ‘창업하는 건 지옥을 가는 길’이라던 아버지 말씀을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몰라요.”

김 회장은 그토록 처절하고 치열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특히 트렌드가 실시간으로 변하고 매출 관리가 까다로운 패션 비즈니스를 경험한 것은 기업가로서 행운이라고 강조했다.

“내 일을 직접 해보지 않고 아버지를 지원만 했다면 저는 절대 회사를 끌고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송원 같은 중견기업은 특히 오너의 역할이 중요하고 모든 의사결정을 오너가 내릴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들을 경험해보지 않은 채 이 자리에 앉았다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요즘엔 2세 경영인들이 기업을 물려받아도 못 하겠다고 파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야생에서 살아남으려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처음 맨땅에 헤딩할 때를 생각하면 자금도, 기반도 있는 지금이 훨씬 쉽죠. 지난 25년 동안 돈 주고도 못 살 그런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송원김영환장학재단 30주년 기념 가족 모임에 참석한 김해련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창업주 고 김영환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송원김영환장학재단 30주년 기념 가족 모임에 참석한 김해련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창업주 고 김영환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 회장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 ‘뼛속 깊은 사업가 기질’ 말고 또 있다. 바로 공존과 공영, 공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기업가 정신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대를 고학으로 졸업한 고 김영환 회장은 장학사업을 평생의 숙원으로 여겼다. 창업 3년 차인 1977년 회사가 손익분기점을 넘자마자 가장 먼저 사내 장학금 제도를 만들었고, 직원들의 자녀는 누구라도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비를 대줬다. 그것을 기반으로 1983년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설립, 30년간 573명에게 64억 원의 장학금을 쾌척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지독한 워커홀릭이었습니다. 늘 4000원짜리 점심을 드시고 어쩌다 여행을 갈 때도 비즈니스클래스를 단 한 번도 탄 적이 없어요. 그렇게 아낀 돈을 장학금으로 내셨죠. 지금까지 지급된 장학금이 340억 원 정도 되는데요, 때론 그 돈을 내가 현찰로 가지고 있다면 180억 원이 넘는 상속세 걱정은 안 했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수익을 내야 하기에 아버지는 그토록 이를 꽉 물고 달려왔을 테지요. 저 역시 부친께서 몸소 보여주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앞으로 기업을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