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105.7㎡ 아파트의 작은 마루에 아내가 뻐득뻐득하게 말린 빨간 고추를 잔뜩 쏟아놓았다.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들어와 그 고추의 붉은색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가을이 갑자기 성큼 다가온 기분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마당에 펼쳐 놓은 고추 생각이 난다.

“이걸로 김장할 꺼야?”, “네.”, “이렇게 많은데, 김장하고 남아?”, “좀 남지”, “그럼 김장하고 남은 고춧가루도 있겠네”, “그럼요!”, “맛있겠다.”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배추가 트럭에 실려 들어온다. 어머니, 작은 어머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모여서 소금물에 배추를 절이고, 부엌 마루에 생굴, 갓, 명태, 온갖 젓갈과 채소를 무채와 함께 큰 고무대야 가득 고춧가루에 벌겋게 비벼 놓는다. 외할아버지와 겸상을 받으면, 김장 속을 넣은 노란 배춧잎이 밥상 위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이맘때, 수업을 마치고 어둑해지는 저녁 시간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중이었다. 서대문 충정로3가 미동국민학교 옆의 철길을 걷다가 후다닥 뒤로 돌아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김장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그 맛있는 김장 속을 버무리고 있었다. 늦으면 큰일이다. 김장이 끝나면 그 맛있는 배춧속을 못 먹는다. 현관 문을 젖히고 보니, 아! 다행이다. 엄마와 아주머니가 아직도 그 벌건 김장 속을 배추에 버무리고 있다. 배추와 무채는 물론 생굴도 그냥 있다.

지금도 그 맛이 생각난다. 침이 돈다. 어렸을 때 맛있었던 음식들. 외할아버지 반주상에 놓인 콩나물국과 김치, 어란, 어리굴젓, 석쇠에 구운 명태알, 장산적, 청진동의 빈대떡과 조개탕, 난지도로 캠핑 가서 먹던 양파와 감자를 넣은 꽁치 통조림 찌개, 처갓댁 제삿날에 뜨끈뜨끈하게 삶아 놓은 돼지고기, 함경도 친구 집 할머니의 특별 요리이었던 명태 순대, 그리고 돌아가신 장모님이 셋째 사위를 위해 담아 주셨던 도수 높은 약주. ‘수호지’의 양산박 술꾼들이 “그 맛이 입에 달라붙는다”며 마셨던 그 술 같았다. 맛은 향수(추억)다. 그 음식을 먹던 그때의 기억. 사람들, 배고픔, 웃음, 넉넉함, 인자함…. 지금도 그런 것들이 그 맛 속에 같이 있는 것 같다.

이제 찾기 어려운 음식과 추억들이다. 집전화가 휴대전화로 바뀌고, 인터넷으로 무엇이든 찾아 볼 수 있고, 서로 교감하고 물건을 주문하는 시대다. 10년 이상 타고 다녀도 새 차 같기만 하며 휘발유 소비가 반도 안 되는 고급 승용차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남산 높이만한 150층 건물이 생기고 섬만큼 넓은 선박이 건조되고 있다. 수백만 명을 일시에 괴멸시키는 무기들이 바로 근처에 있다.

우리 주변의 이러한 물건들은 기술 혁신 제품들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지 못하는 물품도 있다. 쌀도 인간이 재배하지만 인간의 창조물은 아니다. 채소도, 과일도, 비단도, 광목도, 양털도 그렇다. 목재 가구도 천연가죽 소파도 그렇다. 우리가 피부를 비벼대면서 먹고 입고 자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다. 기술혁명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런 자연의 창조물을 먹고 입고 쓰기를 좋아한다. 값이 비싸도 유기농 축산물의 소비가 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원래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파괴하기 전에 있었던 본래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찾고 있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변하고 있는 것일까?

아내가 김장을 하는 날이 다시 오지 않을까? 도시의 찬란한 가로등을 인간은 잠시 꺼버릴 것이다. 밤하늘의 별도 빛날 것이다. 인간의 DNA 속에 유전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자연의 추억을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기술 혁명과 함께 자연의 가치도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 아니다. 인간이란 지구의 한 생명체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ESSAY] 기술 혁명 시대와 김장하는 날의 추억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