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를 맛보며 지중해의 햇살 속을 거닐다
“본 주르노! 케스토에 시칠리아(Buon giorno! Questo e sicilia: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시칠리아입니다).” 로마 테르미니 역을 출발한 기차가 밤새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에 닿았을 때 열차에서는 이렇게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찾은 까닭은 진정한 이탈리안 파스타를 맛보고 고대 그리스의 유적을 답사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영화 ‘대부’에서 보았던 시칠리아의 낭만적인 이미지와 니노 로타의 음악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다. 괴테가 극찬한 아름다운 도시시칠리아 하면 사람들은 마피아를 떠올리나 보다. 시칠리아로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마피아를 조심해.” 그럴 만도 했다. 인터넷으로 시칠리아를 검색하면 마피아와 연관된 항목이 주르륵 올라온다. 실제로도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이탈리아 최대 마피아 조직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이탈리아 노인(약간 마피아풍이기도 했다)에게 “요즘에도 시칠리아에서는 마피아가 길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나요”라고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가끔씩 일어나긴 하는데 다 옛날 일이죠.” 그리고 덧붙였다. “시칠리아는 이제 이탈리아인들이 여름 휴양지로 즐겨 찾는 곳입니다. 경치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시칠리아는 노인 말대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교회 건물과 고풍스러운 거리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물씬 뽐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음식도 맛있었다. 유럽의 어느 곳보다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시칠리아였다.
시칠리아 여행의 출발점은 주도인 팔레르모다. 팔레르모의 볼거리는 대부분 중앙역 근처에 몰려 있는데 한나절쯤 팔레르모를 돌아보고 나면 괴테가 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시 곳곳에 가득한 유럽과 아랍 양식이 어우러진 건축물들,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 크고 작은 성당으로 가득한 골목. 팔레르모의 모든 것이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팔레르모 여행의 출발점은 프레토리아 광장(Piazza Pretoria)이다. 광장 주위로 스페인 바로크풍의 집들이 펼쳐진다. 광장 서쪽에 있는 노르만 왕궁(Palazzo dei Normanni)도 꼭 찾아볼 것. 아랍풍의 천장과 비잔틴식 모자이크가 조화를 이룬 멋진 건물이다.
팔레르모의 중심 거리는 ‘비아 로마’다.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분위기다. 꽉 끼는 스키니진을 입고 보잉 선글라스를 쓴 멋진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비아 로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한적한 골목길이 이어지는데 스페인과 아랍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선 풍경이 독특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골목을 산책하는 다정해 보이는 부부와 수레 가득 꽃을 담아 팔고 있는 멋진 반백의 할아버지. 모퉁이 빵가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 여행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단연 시장이다. 가공되지 않은, 현지인들의 날것 그대로의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팔레르모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은 부치리아 시장이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크다. 갖가지 해산물과 과일, 치즈, 농산물 등 없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5일장처럼 떠들썩하다. 팔레르모 사람들은 “만약 부치리아 시장 바닥이 마른다면”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말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뜻이다. 여행 전문서 ‘론리 플래닛’에는 팔레르모가 이렇게 소개돼 있다. “재래시장, 북적대는 비좁은 골목 어귀에서 박동하는 사람들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름다운 골목과 시장이 있는 곳. 그리고 친절한 시칠리아인들의 미소와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 팔레르모는 꼭 한 번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다.
팔레르모를 나와 찾은 도시 모디카. 시칠리아 남동부에 위치한 이 자그마한 도시는 기원전 400년 무렵 시쿨리족이 건설했다고 한다. 12~17세기에는 매우 부유한 곳이었지만 1613년과 1693년 발생한 지진, 1833년의 홍수로 인해 파괴됐다. 하지만 모디카는 곧 도시를 재건했다. 모디카는 칼타기론, 밀리텔로 발 디 카타니아, 노토, 파라졸로, 라구사, 시클리 등 히블라이아산 기슭에 위치한 이웃 8개 도시들과 함께 ‘발 디 노토 지역의 바로크 후기 마을(Late Baroque Towns of The Val di Noto)’로 불린다. 지진과 홍수로 파괴된 이들 도시들은 재건 사업을 하면서 파괴된 도시가 있던 자리나 그 근처에 세워졌는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7세기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로크 양식이 절정을 이루었던 당시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 도시의 바로크 후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돼 200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모디카는 마음먹고 돌아보면 하루면 충분히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도시는 삼면이 절벽으로 막혀 있어 천혜의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자그마한 광장이 나온다. 도시는 이 광장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다.
모디카의 옛 영화(榮華)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은 산 피에트로 성당과 산 조르조 성당이다. 산 피에트로 성당은 광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아직도 웅장한 18세기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 조르조 성당은 모디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모디카의 모습이 장관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정교하게 맞춰놓은 듯한 도시의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와는 또 다른 이탈리아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는 예전에 ‘사생활’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는 ‘프리바토(privato)’라는 말은 영어‘프라이버시(privacy)’에서 따온 말이다. 모디카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프라이빗’이 없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 삶의 특징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다 알고 지낸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거대한 신전과 만나다
시칠리아에는 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혹시 그리스에 온 것이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아그리젠토가 대표적인 도시인데 시칠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라고 할 수 있는 콘코르디아 신전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의 유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그래서 아그리젠토를 ‘신전의 계곡’ 혹은 ‘신전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 서부에 자리한다. 버스를 타고 아그리젠토로 가다 보면 시칠리아가 보여주는 광활한 풍경에 놀란다. 황량한 동부의 풍광과는 전혀 다른 풍요로운 풍경이 차창 너머로 펼쳐진다. 멀리 눈을 이고 선 에트나 화산이 보이고 도로 양편으로는 드넓은 목초지와 농장, 올리브나무 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가로이 거니는 소떼와 양떼는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기후도 화창해 동부보다는 섭씨 4~5도 정도 높다. 이마에 내리쬐는 햇살도 풍성하고 언덕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따스하다.
아그리젠토가 가까워지면 거대한 돌무더기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신전. 여행자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시칠리아와는 전혀 다른 풍경에 넋을 잃는다. ‘신전의 계곡’에는 디오스쿠리 신전, 주피터 신전, 테로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콘코르디아 신전, 주노네 신전 등이 모여 있다. 이 가운데 단연 압권은 콘코르디아 신전이다. 기원전 450∼400년에 세워진 도리아식 신전으로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멋이 그대로 살아 있다. 기단과 기둥, 정면의 지붕 부분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다음으로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콘코르디아 신전이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이 신전이 6세기경 기독교 교회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아그리젠토는 아몬드로 유명하다. 신전 주변은 온통 아몬드 농장이다. 곳곳에 아몬드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도 나 있는데 한가로운 산책을 즐기기 좋다. 아그리젠토에서는 해마다 2월이면 아몬드 축제가 열린다. 각국의 민속의상을 겨루는 대회도 함께 열리는데 한국 팀이 참가해 우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아그리젠토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결국 시칠리아 도시들 간의 치열한 관광객 유치 경쟁은 압도적인 한 장의 이미지를 가진 아그리젠토의 승리로 귀결된다.” 그 한 장의 이미지가 바로 콘코르디아 신전이다. 트라파니에도 가볼 것을 권한다. 섬 서북쪽에 위치한 트라파니는 팔레르모나 아그리젠토, 라구사, 타오르미나 등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시칠리아의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이들 도시들이 바로크풍의 건물들과 그리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로 가득한 반면 트라파니는 이들 도시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로맨틱한 풍경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염전과 염전 위에 서 있는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풍차다.
어쨌든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골목 저 골목을 유유히 걸어 다니는 것이다.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오래된 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햇빛에 기분 좋게 말라가는 빨래와 발밑을 재빨리 스치고 지나가는 고양이, 한가롭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다정한 시칠리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거대한 유적을 감상하는 것보다 때로는 더 큰 감동을 안겨줄 것이고 여행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Plus Info 대한항공이 인천~로마를 운항한다. 로마에서 항공편을 이용해 팔레르모나 카타니아로 갈 수 있다.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까지 연결되는 항공편은 국영 항공사인 알 이탈리아 홈페이지(www.alitalia.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에서 열차로도 갈 수 있다. 이탈리아 국영 철도인 트랜이탈리아 홈페이지(www.trenitalia.com)에서 시간표를 확인할 수 있다. 12시간 정도 걸리므로 침대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다. 섬 북부 왼쪽의 팔레르모에 도착, 섬 왼쪽으로 돌면서 트라파니와 아그리젠토를 보고 로마나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 방법은 섬 오른쪽으로 돌면서 카타니아, 시라쿠사, 라구사, 타오르미나를 여행하는 것. 되도록이면 한 방향으로 도는 것이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성 기후다. 겨울이지만 낮에는 그다지 춥지 않다. 하지만 밤과 아침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심한 일교차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시칠리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미슐랭 가이드에 올라가는 레스토랑들이 많다. 도시 관광 안내소에서 소개받아 즐겨볼 것을 권한다. 주요 식당들은 도시 관광안내소에서 정보를 얻고 예약할 수 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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