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배준성 작가

배준성 작가는 호쾌하다. 그림도 그를 닮아 즐겁다.

작품이 즐거운 이유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작업을 통해 변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작품의 화두를 던지고 그 안에서 몰입하며 스스로가 변화해가는 과정을 즐긴다. 그것이 바로 화가의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ARTIST] 캔버스를 떠나 자유를 얻다
인터뷰 약속을 잡은 서울 연희동 프로젝트 사무실 1층에 들어섰을 때 처음 시선을 끈 것은 전시를 마치고 돌아온 배준성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비닐 포장에 싸인 채 전시장 벽에 기대어 선 작품들은 그 크기만으로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촬영을 위해 작품의 포장을 벗기자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다. 전시장 이곳저곳에 놓인 조각상들과 그 조각상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소녀. 고요하고 평온한 느낌의 그림을 바라보는데 순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작품의 일부분인 발광다이오드(LED) 화면 속에서 손톱만한 사람이 나무 사이를 꼬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돼 있는 박물관, 그러나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 그림 속에서 다이빙을 시작하는 순간 작품은 무궁무진한 상상의 공간으로 바뀌어버렸다. 배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이처럼 정지된 화면에 끝없이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내면서 시작된다.
[ARTIST] 캔버스를 떠나 자유를 얻다
‘움직이는 정물(Moving-Still-Life)’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계십니다.

“작가가 작업을 시작할 땐 항상 개인적 담론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대를 졸업했지만 ‘그림이란 무엇일까’가 항상 궁금했어요. 그런 의문에서 시작된 게 지금의 작업들이죠. 일반적으로 그림은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비닐이나 플라스틱, 모니터를 이용해서 작업을 합니다. 그림 그리는 작업을 일종의 ‘달리기’라고 본다면 운동장에서 빙판으로 ‘경기장’을 옮겨보는 거죠. 같은 달리기라도 육상 경기가 있고 스케이팅 경기가 있듯이 말이에요. 전통적인 의미의 페인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니 이런 삐딱한 페인팅이 나오게 됐네요. 때로는 미술에서의 비전이 이런 쪽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초기엔 어떤 작업들을 주로 하셨나요.

“미대를 졸업한 뒤 작업 방향을 고민했었어요. 내가 잘하는 쪽으로 가야 할지 내가 잘 못하지만 궁금한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과 정반대되는 작업을 해보기로 했죠. 그동안 짧은 호흡으로 속도감 있게 작업을 했었다면 그때는 두 달 동안 꽃 그림 하나만 그렸어요.

7~8m짜리 캔버스를 꽃 그림으로 채우는 지루한 작업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저절로 재밌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떠오른 게 ‘화가의 옷’이란 비닐을 이용한 작업이에요. 누드 사진 위에 비닐을 덧대고 옷을 그려 넣는 작업이니까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재미있었거든요.”

정물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악이나 영화 같은 장르는 매체 그 자체로 능동적이고 동물(動物)적이죠. 관객이 수동적이어도 어느 정도는 작품을 즐길 수 있어요. 그런데 그림은 움직이지 않는 정물(靜物)이잖아요. 보는 사람이 반영되는 부분이 많아질 수밖에 없죠.

예를 들면 ‘화가의 옷’ 작품은 관객이 이미지를 읽어내려면 비닐을 움직여야 합니다. 정지 화면이 움직이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 저는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움직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계속 하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The Costume of Painter-Museum Tp, legs’, 렌티큘러와 유화, 2009년
‘The Costume of Painter-Museum Tp, legs’, 렌티큘러와 유화, 2009년
지금 하고 계신 작업은 어떤 것들인가요.

“비닐을 이용해서 작업을 하다가 2008년부터는 렌티큘러(renticula) 작업을 시작했어요. ‘렌티큘러’라는 표현이 다소 생소하죠. 그림을 찍은 사진 위에 여러 겹의 시트를 붙여 홀로그램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도록 만드는 작업이에요. 한쪽에서 볼 때 명화인데 반대쪽에서 보면 아이가 그린 그림이 나오기도 하고, 누드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도 하죠.

최근엔 렌티큘러 작업과 함께 영상 작업도 해오고 있어요. LED 화면에 움직이는 그림을 넣는 작업인데요, 이 작업은 비닐이나 렌티큘러 작업과 달리 품이 많이 들어갑니다. 초당 7개 프레임이 들어가는데 그걸 일일이 손으로 그려 넣어야 하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요.”

기존에 해오던 작업과는 다른 방향의 작업을 계속 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작가적 성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림을 만들기 전에 보면 이건 쉽게 표현할 수 있겠다 싶은 게 있고, 잘 안 될 것 같은 대상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잘 못할 것 같은 부분에 끌리고 도전해보고 싶은 의지가 생깁니다.

제가 그걸 해내기 위해선 아마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해요. 새로운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다음 작품으로 연결되고 제가 변하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그림들이 ‘발생’하는 거죠. 그 과정이 저는 재밌어요.”
‘Diver of Lovre Museum’, LED 패널과 유화, 2012년
‘Diver of Lovre Museum’, LED 패널과 유화, 2012년
배 작가는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다. 작업을 통해 변해가는 것들에 주목하고, 작품 안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가 변해가는 과정을 즐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속 ‘움직임’은 관객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간다. 배 작가의 작품 속에는 움직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그림 속에 멈춰서 있는 그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반대로 그림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The Costume of Painter-Phantom of Museum O, sketch girl’, 렌티큘러와 유화, 2011년
‘The Costume of Painter-Phantom of Museum O, sketch girl’, 렌티큘러와 유화, 2011년
‘박물관(The Museum)’ 시리즈에는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어릴 적에 재밌게 봤던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을 모티브로 삼았어요. 루벤스 그림을 바라보던 네로와 아로하. 제가 유난히 좋아하는 장면이거든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내가 가진 내면의 것들을 모티브로 꺼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과거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에 대한 반향으로 아이들을 등장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소재를 선택할 땐 주로 무엇을 기준으로 삼으세요.

“가급적이면 내가 흥미 있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해요.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상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지만요, 외부의 반응만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가 힘들어지더라고요.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팔기 시작했는데 2006년쯤인가 제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있었어요. 2년 동안 작품 500여 개를 팔았다면 믿으시겠어요? ‘마치 컵라면 팔듯이 작품을 팔았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죠.(웃음) 근데 그 시기가 오히려 제겐 힘든 시기였어요.”
‘Tree-monkey’, LED 패널과 유화, 2012년
‘Tree-monkey’, LED 패널과 유화, 2012년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그림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내가 인정하는 작업과 외부의 반응이 일치되면 기쁜 일이죠. 그런데 내가 인정하지 않는 실험적인 작업들까지 과하게 반응이 오거나 판매돼 버리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고요. 작가로서 반성을 많이 했죠. 그래서 한동안 일부러 전시회를 열지 않기도 했어요. 3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금은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죠. 그때보다 마음은 훨씬 편해요.”

캔버스가 아닌 다른 소재를 찾는 일에도 많은 의미를 두시나요.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작업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트랙 밖을 달리게 됐네요. 하지만 마라토너가 달리기를 하면서 길가의 풍경을 마냥 감상하지 않듯, 제 관심도 트랙 그 자체에 있지는 않아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가끔씩 주변 풍경을 인지하게 될 뿐이죠. 그래도 캔버스 안의 그림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계속해서 캔버스 밖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야 그림이 무엇인지가 더 잘 보일 테니까요.”

작업을 계속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저는 작업을 ‘그림을 겪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림을 겪는다는 건 한 작품을 시작부터 끝까지 완결해내는 과정 그 자체를 뜻해요. 한바탕 진하게 그림을 겪잖아요? 그럼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이 바뀝니다. 작업을 시작할 때의 생각은 단순히 처음 던져진 화두일 뿐, 작품을 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걸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고, 많은 것들이 변하죠. 그 과정에서 마쳤을 때 돌아보면 내 자신이 많이 변해 있어요. 그 부분이 작업을 하는 매력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올해 가을에 영국에서 전시회가 있어요. 지금 하는 작업들로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고요. 또 다른 계획이 있는데 지금까지 해온 비닐, 렌티큘러, LED 작업과는 다른 ‘경기장’을 찾아 작업을 해보려고 해요. 지금 하고 있는 LED 영상 작업의 소스들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제가 구상 중인 경기장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The Costume of Painter-Phantom of Museum K, red wall sketch girl’, 렌티큘러와 유화, 2012년
‘The Costume of Painter-Phantom of Museum K, red wall sketch girl’, 렌티큘러와 유화, 2012년
배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라토너들이 겪게 된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떠올랐다. 오래 달리기를 하면 찾아오는 극한의 고통, 그것을 넘어서면 찾아온다는 무한한 행복감처럼 그 역시 작업에 무섭게 몰두하는 힘에서 스스로를 바꾸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경기장을 찾아 쉼 없이 달려온 그는 또다시 새로운 경기장을 찾아 떠날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그림을 더욱 잘 알리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끝나지 않는 달리기 경주가 삶이라면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그 경기를 즐기고 있는 주자인 것 같다.


김보람 기자 bramvo@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