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응전!’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역사의 연구’에서 밝혀낸 역사 발전의 키워드다. 21세기가 직면한 문제의 근간에는 인구고령화가 있다. 고령화라는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는 셈이다.

초기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거의 완벽한 자급자족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식량이 부족할 정도로 인구가 늘어나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이런 위기에 스파르타는 이웃나라를 정복해 땅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전쟁 속에서도 뚜렷한 효과를 얻지 못하자 국민의 생활을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감시하는 군국화로 나아갔다.

이에 반해 아테네는 무역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즉 수출을 위해 농업생산물을 특성화하고 수출을 위한 수공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결과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고, 이들에게 정당한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정치제도가 발전한다. 이런 해결방법을 찾아낸 아테네는 뜻밖에도 그리스 사회 전체, 나아가 서구 사회 전체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셈이 됐다.



인구고령화에 따른 근본적인 문제

이처럼 도전 과제에 대한 응전의 차이는 매우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럼,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무엇이고, 거기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응전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는 과제는 사회 양극화의 심화, 경제민주화, 복지 경쟁, 청년과 장년의 실업 문제, 불특정인에 대한 범죄의 횡행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각양각색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런 문제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공통분모는 아마도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직면했던 인구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인구문제는 그 양상이 다르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직면한 인구문제가 인구 과잉이었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인구고령화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인구문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과잉’과 ‘고령화’로 다른 모습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겪은 ‘과잉’이 양적인 문제라면 ‘고령화’는 질적인 문제다. 따라서 고령화에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고령화라는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기 위해서는 고령화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령화는 낮은 출산율과 평균수명 증대라는 이중주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를 생애시계로 표현하면, 밥벌이 시계는 그대로인데 인생 후반의 생체시계는 늘어져 느릿느릿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생체시계가 늘어지는 만큼 밥벌이 시계도 늘어지면 좋은데,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 오늘날의 고민이 있다. 밥벌이 시계를 늘어뜨리는 방법은 보다 일찍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보다 늦게 노동시장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고학력화와 각종 스펙 쌓기로 학교에 머무르는 기간은 길어지고 있다.

20대 후반이 돼서야 밥벌이 전선에 뛰어드는 게 우리네 평균적인 삶이다. 노동시장에서 물러나는 시점은 별반 변화가 없다. 이러니 밥벌이 기간은 오히려 줄어들 수밖에. 이처럼 짧아진 밥벌이 기간 동안 우리는 가계를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며 기나긴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고령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도전과제다.

우리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 도전과제를 극복해야 한다.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집단에 긴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도전과제가 없는 사회는 응전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선택받은 이들처럼 행동하고 있을까. 선거의 해를 맞이해 정치권에서 범람하고 있는 복지 논쟁의 관전자로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없을까 기대하고 있지는 않나 반성해볼 일이다.
부조적 복지에 대응하는 개념이 자조적 복지다. 자조적 복지란 본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책임지되 국가에서는 당사자들의 자조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부조적 복지에 대응하는 개념이 자조적 복지다. 자조적 복지란 본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책임지되 국가에서는 당사자들의 자조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부조적 복지가 아닌 자조적 복지에 무게 둬야

복지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무조건 퍼주는 식의 부조적(扶助的) 복지로는 나라의 곳간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말 것이다. 이는 현재의 인구구조를 감안하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나라의 곳간이 바닥나게 되면 나라의 곳간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중장년층의 생체시계에 악영향을 미침은 물론 청장년층의 밥벌이 시계에도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결국 고령화시대의 부조적 복지는 서로 돕는 윈-윈(win-win)형 정책이라기보다는 제로섬(zero sum)을 넘어 선배와 후배 세대 모두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자멸형 정책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부조적 복지에 대응하는 개념은 자조적(自助的) 복지다. 자조적 복지란 본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책임지되 국가에서는 당사자들의 자조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그야말로 스스로 돕는 복지인데, 스스로를 돕다 보면 자신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궁상스런 부모의 인생 후반은 자녀에게 커다란 압박을 준다는 점에서 자녀에 대한 재무적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 스스로를 돕다 보면 이런 문제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경험한 선진국의 사례와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볼 때 자조적 복지의 실천에 연금만큼 좋은 것은 없어 보인다. 선진국일수록 노후 생활비에서 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서양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초인(超人)의 등장을 갈구하며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낸 니체의 생활을 지탱해준 것 역시 숙모에게서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과 연금이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시스템을 빨리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밥벌이 기간 동안 열심히 연금자산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국민연금만으로 노후를 지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결국 노후에도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 이외에 별도의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으로 대변되는 사적연금이다. 이 사적연금을 두텁게 쌓아야 한다.

그러나 내 집 마련에다 자녀 교육까지 신경 쓰다 보면 내 노후를 위한 연금 쌓기는 언감생심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자녀 교육보다 노후 준비가 우선시돼야 한다. 그것이 고령화시대에 적합한 자녀 사랑 방식이다.

니체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에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보라”고 말했다. 지금 당장 불편하다고 해서, 또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부모와 자식 모두 고령화의 파고에 휩쓸려 숨조차 쉬기 힘들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개인들에게 맡겨놓아서도 안 된다. 국가는 건전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개인들의 노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고 널리 이용될 수 있도록 확산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연금 중산층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자조적 복지를 통해 연금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데에는 연금 세제만한 정책도 없다.

지금의 연금 세제가 과연 연금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부족하다면 더 늦기 전에 연금 중산층 확대에 친화적인 방향으로 과감한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령화의 파고를 넘어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하고 나아가 그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시대라는 점을 국가와 개인 모두 절실히 깨달을 때다.


일러스트 김영민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