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명의 여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장을 차려 입은 여인들의 손에는 저마다 테니스 라켓이 들려 있다. 아마도 테니스 모임에 참석한 여인들인가 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여인들은 아무도 서로를 쳐다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다들 자기 자신에 몰두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뭔가 이상한 정황을 포착했을 것이다. 그렇다. 이 7명의 여자는 동일한 인물이다. 게다가 여자들이 서 있는 공간은 원근법이 사라진 비현실적 공간이다. 다만 녹색으로 채워진 점으로 보아 이곳이 테니스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림에 붙여진 제목은 ‘기억들(Memories)’이다. 어떤 이는 벌써 무릎을 칠지도 모른다.
‘기억들’, 1889년, 파스텔, 127×200cm, 브뤼셀 왕립미술관
‘기억들’, 1889년, 파스텔, 127×200cm, 브뤼셀 왕립미술관
그림을 그린 이는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인 페르낭 크노프(Fernand Khnopff·1858~1921)다. 크노프는 대대로 법관을 지낸 법조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까지 회색빛이 감도는 중세도시 브루게에서 살았고 이후 브뤼셀에서 성장했다. 고건축이 즐비한 고도 브루게에서의 기억은 두고두고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도 관례에 따라 법대에 갔지만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브뤼셀의 왕립미술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던 중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갔다가 귀스타브 모로, 에드워드 번존스, 존 밀레이 등 상징주의자들의 작품을 대하고 충격을 받아 상징주의 화파의 추종자가 된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산업의 발달 이후 만연한 물질주의와 과학 및 이성에 대한 맹신에 반발해 인간의 내면, 상상의 세계 및 감각에 탐닉해 들어간 새로운 경향으로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내향적인 성격의 크노프에게 이 새로운 사조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그는 현실의 순간적 인상에만 집착하는 인상주의에서 눈을 돌려 상징주의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특히 그는 외부세계로 향한 빗장을 모두 걸어 잠그고 내면세계에 자기만의 견고한 성을 쌓아나간다. 1889년 작품 ‘기억들’은 그런 그의 성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크노프의 여동생 마르그리트다. 내성적인 성격의 크노프는 중성적인 마스크의 여동생을 깊이 사랑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는 크노프에게 있어 제2의 자아라고 할 정도로 그의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마르그리트가 출가하기 전까지 크노프가 그린 여자의 대부분이 마르그리트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애착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그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마르그리트가 존재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크노프의 기억 속에 들어왔지만 기억의 저장고는 그들을 순서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마치 꿈속에서와 시공을 달리하는 존재들이 천연덕스럽게 뒤섞인 그 부조리한 상황처럼 말이다. 그래서 마르그리트에 대한 7가지의 기억이 한 장면으로 조합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 향하는 문을 잠갔네’, 1891년, 캔버스에 유채, 72×140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나는 나 자신으로 향하는 문을 잠갔네’, 1891년, 캔버스에 유채, 72×140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크노프의 내면세계로의 침잠 경향이 자폐의 길로 나아가리라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으로 향하는 문을 잠갔네(I Lock My Door Upon Myself·1891)’라는 작품은 마치 공개적인 자폐 선언처럼 보인다.

영국의 상징주의자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이 작품을 보면 한 젊은 여인이 음산한 분위기의 실내에 팔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다. 마르그리트처럼 각이 진 얼굴을 한 이 여인은 불길함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를 하고 눈은 밤 고양이처럼 불을 켜고 있다.

여인의 주변에는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맴돈다. 화면 앞에 놓인 세 송이의 꽃은 바싹 말라버렸고 벽에 덧댄 나무판에도 여기저기 갈라진 틈이 보인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실내를 지배하는 색채도 보라색, 밤색 등 생기와는 거리가 멀다.

자폐 선언 다음 단계는 뭘까. 크노프는 1902년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자아의 성전’을 쌓기 시작한다. 마치 교회처럼 생긴 이 건물은 혼란스럽고 끝임 없이 변하는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성전이었다.

흰색의 실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식이라곤 검정 선과 금빛 동그라미뿐이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추고 불안감이 사라진 공간이었다. 드물게 그곳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는 “이곳에서는 오직 나 자신만이 있을 뿐이에요”라고 우쭐댔다고 한다. 행인들은 “미친 놈이 사는 집”이라고 비꼬았지만 말이다.
‘버려진 도시’, 1904년, 파스텔과 크레용, 78×69cm,  브뤼셀 왕립미술관
‘버려진 도시’, 1904년, 파스텔과 크레용, 78×69cm, 브뤼셀 왕립미술관
크노프의 은둔과 고독을 즐기는 성향은 때때로 폐허로 변한 도시 풍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은둔의 집에서 그려진 ‘버려진 도시(Abandoned City·1904)’는 묵시록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박공이 있는 르네상스풍 벽돌집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어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른쪽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서서히 집의 한쪽으로 밀려들고 있다. 얼마 후면 집은 수면 아래로 잠길 게 분명하다. 이 음산한 도시 풍경화를 그리게 된 것은 조르주 로덴바흐의 소설 ‘죽음의 도시 브루게’를 읽고 나서였는데 크노프는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브루게의 풍경을 떠올렸다고 한다.

크노프의 말년은 어땠을까. ‘자아의 성전’에서 고독을 씹으며 행복하게 살았을까. 천만에. 그는 이 다소 엽기적인 그림들 덕분에 너무나 유명해져 벨기에 최고의 화가로서 명성을 누리게 된다. 그에게는 최상위의 기사 작위가 수여됐고 밤낮없이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신세가 된다.

‘자아의 성전’은 호사가들의 방문으로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고독의 세계에 은신하려 했던 크노프의 꿈은 부질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세상을 뜬 지 얼마 안 돼 자아의 성전마저 헐리고 그 자리에 볼품없는 기능주의 양식의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정지된 나만의 세상을 꿈꾸던 크노프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고 무심한 세월은 그가 세운 고독의 전당마저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버려진 도시’의 운명은 곧 크노프 자신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정석범 _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