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미와 함께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사회적 규범, 지역적 생활환경의 특성이 잘 반영돼 있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23년 독일 선교사가 찍은 서울 어느 대갓집 바깥마당 풍경이다. 독일 오버바이에른에서 발행된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r Der Morgenstill)’에 수록된 사진 설명에는 일요일 예배 미사를 마치고 찍었다고 기록돼 있다. 비록 인쇄가 흐릿해 인물의 표정과 의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누가 봐도 조선 사람들이다. 아직 나뭇잎이 나기 전의 초봄 양지바른 사랑채 마당에서 남녀노소가 의관을 갖추고 자세를 잡고 있는 모습이 우리네 이웃을 보는 듯하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풍경 속에 한국의 미가 스친다. 한옥과 한복 그 속에 한글과 한식이 있다.
조선목가구는 조선청화백자, 조각보와 함께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미술품이다. 여기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미와 함께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사회적 규범, 지역적 생활환경의 특성이 잘 반영돼 있다. 완벽함보다는 성근 맛이 있고, 장식적이기보다는 순수함이 배어 있는 것이 조선목가구다.
상큼한 비례미
삼복의 무더위도 지나고 매미 울음소리 끝이 짧아지면 가을이 문 앞에 성큼 다가온다. 여름의 수박화채도 좋지만 가을의 포도송이도 눈부시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아니더라도 안동 군자마을 후조당 사랑채 문갑 위에 올려 놓은 ‘포도문청화백자대접’에 갈바람이 분다. 분합문 사이로 보이는 사방탁자와 서안의 상큼함에 세월을 잊는다.
우리는 한국의 산천에서 자라는 초목으로 입고 먹고 만든다. 한반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먹감나무, 박달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 가래나무, 피나무 등 조선 나무로 만든 조선목가구는 한옥의 일부다.
자연적인 나뭇결의 아름다운 판재를 좌우대칭으로 구성해 화려한 칠과 장식을 대신했는데, 이는 가능한 인공적인 면을 줄이고 자연과 순수미를 추구하는 한국적 미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의 사계절을 닮은 나무들, 나이테가 성글고 옹이가 많고 비틀리고 메말라도 나무의 본성을 좇아 성품에 거슬리지 않고 만든 소목 장인들의 야무진 손끝과 따듯한 눈길을 나는 사랑한다.
조선목가구는 어머니의 손맛이다. 조선목가구는 작고 단아하다. 조선목가구는 크지 않다. 미감은 크기로 결정짓지 않는다. 미감은 디테일과 비례가 중요하다. 작지만 상큼한 비례와 완벽한 결구, 이것이 조선목가구의 미다.
예술에서 미감을 규정짓는 것은 크기나 양의 문제가 아니다. 비례와 디테일이 미감을 완성한다. 모든 미의 종결은 비례다. 그리스 ‘비너스상’의 아름다움이나 A4 용지의 크기에는 모두 황금비율이 숨어 있다. 비례가 시각에 무한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한옥의 문틀과 창호는 작지만 아담한 비례가 있다. 조선목가구 사방탁자가 지닌 텅 빈 공간의 상큼한 비례는 한옥의 대청과 정자의 비례를 쏙 빼어 닮았다. 창호의 아름다움이나 규방의 보자기 등에서 볼 수 있는 디테일의 아름다움은 잘 만들었기도 하려니와 한국인의 빼어난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정겹다.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문갑의 의연한 자태는 한국인만이 만들 수 있는 솜씨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미감이 사랑방 가구다. 사방탁자와 문갑, 책장, 서안, 의걸이장 등은 작고 단아하다. 여기에 종이와 붓, 벼루, 연적으로 품위를 갖춘다. 유교의 절제미가 장식성을 배제했다.
심플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단순함, 조선이 사랑한 미감이다. 미감의 정점은 단순함이다. 철학적 명제는 한마디로 끝난다. 중언부언(重言復言) 설명이 필요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등 진리는 거창하지 않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분다’, ‘꽃이 피고 물이 흐른다’ 등 이 모두가 진리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단아한 맛, 단순한 멋. 고급은 단순하다. 절제된 단순함은 아무리 쓰고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다. 세월이 가고 고졸함이 묻어나는 사랑방 가구의 잘 생긴 사방탁자 같은 맛이다.
여백의 멋
미감은 정신적인 것이다. 미감은 언뜻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주 보고 의식해야 비로소 보인다. 일상에서 미감을 살펴보는 쉬운 방법은 물건을 사는 일이다. 내가 쓸 물건이기에 모두 자세히, 열심히 살펴보고 산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물건의 미감을 찾고 재질과 경제적 가치를 분석한다. 장보기의 즐거움은 물건을 산다는 기쁨도 있지만 새로운 미감을 알아가는 기쁨도 그 안에 있다. 조선목가구도 마찬가지다. 우리네 어렸을 때 어머니 무릎에서 듣던 다듬이 방망이 두드리던 그 장단도 자세히 보면 박달나무 다듬이 받침에서 나는 소리다.
단순한 통나무 덩어리 같지만 실은 나무 안을 오목하게 파서 소리를 공명시켜 맑고 청아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일상의 사소한 노동에도 즐거움과 미감이 숨어 있다. 우리 전통이라도, 우리 속에 있지만 자주 의식해서 생각하고 보지 않으면 대부분 모르고 스쳐간다. 자세히 관찰하고 기억해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덕목이라면, 일상에 숨어 있는 우리의 미감을 알고 사랑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조선목가구에는 무덤덤한 맛이 있다. 언뜻 봐서 화려하거나 세련된 맛과는 다르다. 세련은 날카로운 직관과 같은 것이다. 직선과 자로 자른 것처럼 날카로운 선은 보는 맛이 없다. 무덤덤한 맛은 융통성을 갖는다. 조선 건축의 자연석 덤벙주초의 무던함이나 한두서너 번의 셈법 같은 두루뭉술한 문화가 한국의 미를 완성시켰다.
완벽은 정신을 긴장시키지만, 넉넉함은 창의적 사고를 유도한다. 놀면서 공부하는 게 그것이다. 잘 놀아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창의적 사고를 한다. 조선목가구도 덤벙덤벙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빛나는 선인의 지혜가 녹아 있다.
조선목가구는 오늘의 모던한 주거공간에도 잘 어울린다. 미감은 비슷비슷한 패턴의 조합도 아름답지만 정반대의 극과 극도 잘 어울린다. 철과 콘크리트, 유리로 지은 미니멀한 현대건물과 조선목가구는 나무와 무쇠와 무장식성의 단순함으로 공간이 조화롭게 빛난다.
시공을 넘나드는 미감은 어디서든 각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한국인과 한옥, 한복, 한글, 한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이다. 마치 내 몸을 이루는 피와 살, 뼈와 정신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한국의 자연 속에서 살고, 한국말을 하고, 한국의 미감 속에 푹 젖어 산다. 그래도 한국의 미가 무엇인지 알기 쉽지 않다.
가구는 건축에 귀결한다. 건물의 크기가 가구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조선 한옥의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풍수의 주거 형태는 남향의 햇빛을 방 안에 끌어들여 오기 위해 창과 문을 크게 내게 했다. 방 안을 환하게 만들고 마루를 널찍하게 구성해 여름과 겨울을 분리해 사용했다.
겨울 난방용 땔감 때문에 뒷동산 크기로 가옥의 크기가 결정되고, 궁가와 민가를 엄격히 구분해 칸수를 제한하다 보니 일반 사대부들의 집 크기는 자연스럽게 작아졌다. 한옥은 소나무와 온돌 구조로 이루어져 좌식 생활에 적합하게 구성됐다. 조선목가구의 크기는 아무리 크다 해도 2m를 넘지 않는다.
보통 한옥 방 한 칸의 크기가 가로, 세로 2.4m임을 감안한다면 높이는 높아야 2m 내외다. 넓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사이에 가구가 있다. 벽은 문과 창 사이로 좁은 공간이다. 그래서 액자보다는 두루마리 족자 형태의 그림이 적합했고 대청이나 마당에 예식용으로 병풍이 발전했다. 크기는 쓰임의 필요를 결정한다. 한옥의 크기는 가구의 미감도 좌우한다.
사방탁자처럼 사방을 뻥 뚫어놓아서 크다 해도 크지 않게, 막힘이 없어서 답답하지 않게 만든 것이 조선목가구의 미감이다. 마치 부석사 안양루 누각처럼 허공을 가르는 여백의 멋을 누가 가르쳐 주거나 말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한다. 잘 빠진 사방탁자 위에 개구리연적에 서책 몇 권 놓아두면 천하의 호사가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현대디자인의 뿌리
미술사는 양식사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조형이 다르게 변한다. 양식은 패턴이나 패션 그런 것들이다.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문화요, 예술이다. 조선시대는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과거다. 통일신라나 고려는 역사지만 느낌은 멀기만 하다. TV 드라마 사극도 조선시대 배경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모두 우리 이야기의 뿌리다. 하지만 조선시대만큼 쉽게 느낌이 다가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은 단절된 역사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이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 가족을 만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관혼상제를 가족과 이웃이 함께 나누는 삶이 그것이다.
유교의 절제와 예절은 도덕을 낳았고, 조선시대 문화의 뿌리를 간직하고자 하는 한자 교육의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어쩌면 오늘날 비약하는 정보기술(IT) 기기와 첨단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해 줄 것만 같지만 생활의 편리함과 정신적 지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 될 수 없고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조선의 가구는 조선의 미감이다. 의자는 입식 생활을 한 중국이나 유럽의 전유물이다. 문갑이나 사방탁자처럼 앉아서 바라볼 수 있는 눈높이의 미감을 발전시켜 온 조선에는 의자가 없다. 온돌구들과 마루평상의 좌식 생활을 한 까닭이다. 미감을 모르니 만들 수 없다.
만들어도 어설플 뿐이다. 그래서 현대 의자 디자인의 명품은 대부분 유럽이 원산지다. 그에 반해 문갑과 사방탁자는 한국의 자연에서 쓰임으로 만들어 편함과 불편함을 다스려 이어온 조선의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필요에 의해 생산되는 미감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조선시대 유물로 일상을 함께한다. 가장 친근한 것 가운데 하나가 소반이다. 밥과 반찬을 올려놓고 하루 삼시세끼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데 밥상만큼 유용한 가구는 드물다. 소반은 지역에 따라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는데 대표적인 전라도 소반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맛이 일품이다.
강원도 소반은 산지의 투박함과 우직함이 두드러지고, 강화도의 숭숭이 반다지와 같이 통영 소반은 조선시대 남도수군의 화려한 무인풍의 장식이 특징이다. 소반 가운데 여인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것은 해주반이다. 전후좌우의 장식성 조형은 중국의 풍미까지 엿보게 한다.
1923년 독일 선교사가 해주에서 찍은 반가의 회갑연에 한상씩 받아든 며느리들의 화려함에서 다시금 조선의 미감을 읽는다.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자태에 우리가 한국인임을 실감한다.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또 그 어머니들이 살아왔던 오롯한 삶의 풍경이다. 조선목가구의 작고 단아한 아름다움은 21세기 오늘날 한국 첨단 디자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작지만 디테일이 완벽한 첨단 기기들은 마치 두뇌와 같아 일목요연한 회로와 정리된 단정함이 필요하다. 사방탁자의 여백의 미처럼 가득 찼지만 텅 빈 듯 단순한 디자인은 이제 일상이 됐다.
휴대전화, 가전, 타이포그래피 등 디자인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한국인의 감각과 끈기와 열정이 어우러져 만든 한국 디자인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다. 눈을 크게 뜨고 일상을 보자. 한옥추녀의 사뿐한 곡선처럼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무한한 변화의 한 자락이 조선의 미감이다.
조선목가구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국 디자인의 뿌리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방 서안에 벌여 놓은 벼루 위로 더딘 늦여름이 천천히 지나간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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