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할 만한 와인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와인보다 비싸게 마련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와인의 가격은 품질이 결정한다. 품질 좋은 와인은 산도와 당도, 타닌, 알코올 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와인이다. 그렇다면 투자할 만한 와인은 정말 품질로만 승부하는 것일까.


20세기 들어서서 프랑스 이외의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과 같은 훌륭한 와인을 생산하고자 있는 힘을 다했다. 그 결과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면 프랑스 와인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와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와인이야말로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능가하는 와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그러한지 증명해 보이겠다고 도전장을 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파리의 심판’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프랑스는 세계의 와인 시장을 지배했다. 와인 업계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프랑스 와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와인들은 프랑스산이다.” - 알렉시스 리신

“비록 수많은 지역에서 와인이 생산될지라도 위대한 와인은 오직 특수한 장소에서 제한된 양으로 만들어진다. 그곳이 바로 프랑스다.” - 엘렉 워

“프랑스는 근접할 수 없는 와인의 여왕이다.” - 휴 존슨

[와인 재테크] 파리의 심판과 와인 가격
와인 아카데미 홍보의 일환으로 시작된 파리의 심판

하지만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와인업자들은 이런 프랑스 위주의 와인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도 충분히 고급 와인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와인 제조기술을 발전시켰고, 지역별로 독특한 토양의 느낌을 살린 와인을 만드는 데 혼신을 다했다.

그렇다고 1976년 파리 시음회가 이런 캘리포니아 지역 와인 제조업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세상에 알리고자 해서 마련된 것은 아니다. 파리의 심판은 파리에서 와인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가 자신의 와인 아카데미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여기에 미국 와인을 이용한 이벤트를 연 것이었다.

개최자인 스퍼리어 역시 캘리포니아 와인보다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주 매출 상품으로 삼고 있었다. 이 행사는 그저 특이한 이벤트를 기획한 것이지 미국인들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 제조업자들의 와인 매출을 신장하고, 그들의 노력을 찬양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행사는 1976년 5월 24일 오후 3시에 파리 시내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개최됐다. 주최 측에서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프랑스의 르 몽드, 르 피가로 등 주요 언론사에 행사를 알리고 초청장을 보냈지만 다들 관심이 없었다. 이 행사는 넌 이벤트(non-event) 또는 넌 스토리(non-story) 즉,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행사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취재하러 온 유일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타임지의 파리 특파원, 조지 테이버(George Taber)였다. 그도 역시 다른 곳에 취재하러 가려다가 일정이 갑자기 변경되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 파리의 심판을 취재하러 오게 됐다.

이 행사는 와인 라벨을 가리고 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진행됐다. 원래 11명의 심사위원이 있었는데 주최자인 영국인 스퍼리어와 미국 와인 아카데미 회장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빠지고, 오직 프랑스인 전문가 9명이 테이스팅을 하게 됐다. 이 행사에 참가한 모든 전문가들은 프랑스 와인과 캘리포니아 와인을 품질로 완벽하게 구분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레드 와인 부문과 화이트 와인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한 테이스팅 과정에서 두 부문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와인 재테크] 파리의 심판과 와인 가격
30년 후의 재대결, 그리고 현재 와인 가격

파리의 심판이 있고 30년이 지난 2006년에 파리의 심판을 기념하기 위한 역사적인 재대결이 있었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은 적어도 30년은 숙성해야 제 맛이 나는데 1976년 파리의 심판 때는 제대로 숙성도 되기 전에 와인을 시음해 미국 와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출품된 와인과 그 빈티지로 재대결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더 참담했다.

1등부터 5등을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차지한 것이다. 숙성되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던 프랑스 와인은 이번에도 코가 납작해지고 말았다.

그러면 이 결과를 와인 투자에 적용해보자. 과연 이 10개의 리스트에 들어 있는 캘리포니아 와인에 투자해 두어도 좋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상당히 신중해야 할 것 같다. 현재 이 와인들의 가격은 어떠할까. 와인서처(Wine-Searcher)를 통해 조회해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와인 재테크] 파리의 심판과 와인 가격
파리의 심판 때 사용했던 그 빈티지의 와인 가격을 비교해보면 3위였던 하이츠 와인 셀러 마르타스 빈야드(Heitz Wine Cellars Martha’s Vinyards)의 가격이 764달러로 가장 비싸다. 파리의 심판으로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비싸진 것일까. 이를 좀 더 확인해보기 위해 1980년, 1990년, 그리고 2000년 빈티지의 와인 가격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캘리포니아 와인들의 가격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반면 프랑스 와인들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와인 재테크] 파리의 심판과 와인 가격
품질로만 와인 가격이 결정된다면 1970년대의 빈티지 와인 가격이 그 이후로도 이어져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파리의 심판 그 빈티지의 와인은 특별한 이벤트의 영향으로 확실히 다른 빈티지의 와인보다 가격이 비싸다. 하지만 다른 와인 가격은 프랑스 와인이 전반적으로 더 높다. 해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다시 하면 결과가 달라질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 해석하는 것보다는 와인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품질 말고도 다른 요소들이 더 있다는 해석이 맞을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브랜드’의 가치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아니라 와인 라벨을 보고 와인을 마시면 ‘확실히’ 프랑스 와인이 더 맛있다고 평가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파리의 심판을 폄하한다면 이것이 마치 루이비통 핸드백과 가파치 핸드백의 품질을 라벨을 떼고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품질이 더 좋다고 하더라고 가파치 핸드백을 루이비통 핸드백보다 비싸게 지불하고 살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와인의 품질은 와인 병에 담긴 그 와인으로만 판단할 수 없고, 이미 그 라벨 자체에도 상당한 부분의 ‘품질’이 포함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재현 하나금융그룹 WM본부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