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마나부 세이코엡슨 노조부위원장과의 대담
일본 굴지의 제조업체인 세이코엡슨 주식회사의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생애 설계와 생활 설계 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 노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합원이 1만2000명 정도인 이 회사 노조의 슬로건은 ‘라이프 업 유니온(life up union)’, 즉 조합원 개개인이 충실한 인생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이 회사 노조가 어떤 계기로 이런 활동을 하게 됐으며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무엇인지 활동을 주도해 온 시미즈 마나부 노조부위원장과 서면 대담을 나누었다.
강창희 소장(이하 강): 우선 세이프엡슨 노조의 라이프 서포트(life support) 활동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 달라.
시미즈 마나부 노조부위원장(이하 시미즈): ‘라이프’에는 생명, 생활, 인생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노조는 근로자의 각 라이프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생활에서 안정을 얻은 근로자가 일에 전념함으로써 회사 성장과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라이프 서포트 활동’은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핵심은 생애 설계와 생활 설계로 구성된다. 생애 설계란 이상적인 인생 목표를 구상하는 것이고, 생활 설계는 인생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생활 설계에서 노조가 신경 쓰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부분은 재무 설계다. 단, 재무 설계에 대해서는 지원은 하되 돈이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노조의 이런 활동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이 무렵부터 노조의 역할이 임금 인상과 노동 환경 개선 투쟁을 위한 파업 중심에서 라이프 서포트 활동 중심으로 바뀌었다. 임금 인상이나 노동 조건 개선만이 근로자의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수단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재무 교육을 통해 불필요한 가계 지출을 줄이고 가계 자산 운용의 효율을 높이는 것 또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 라이프 서포트 활동을 처음 제안했고 그 후 지금까지 이 활동을 주도해 온 분이 바로 시미즈 부위원장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이 활동을 주도하게 됐는가.
시미즈: 나는 원래 프린터 생산라인의 생산직 근로자였다. 어느 날 선배의 권유로 노조 상근으로 가게 됐는데, 상근이 되기로 결심할 당시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조합원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노조 간부들의 기득권이나 지켜주는 노조라면 차라리 해산하는 게 낫지 않을까, 노조를 해산시키는 데 선두에 서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랬던 나의 마음이 신임 임원 연수를 받으면서 바뀌었다. 임원 연수 강사로 초빙된 한 경영컨설턴트의 강의 내용이 나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16년 전에 받은 강의 내용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제 노조 임원은 경영자 이상의 경영 감각이 필요하다. 3~5개 회사라도 괜찮으니 자신이 직접 종목을 골라 주식 투자를 해보고 기업을 보는 안목을 키워라.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읽을 정도의 공부는 필수 과목이다. 역사 소설도 읽어라. 인간과 금융을 보는 눈이 생길 것이다. 노조 조합원들의 생활 설계 상담과 지원이 가능하도록 공부해라.”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 강의에 감동을 받은 나는 노조 활동의 방향을 바꾸는 데 앞장서야겠다는 결심했다. 임금 협상에 매달리기보다는 근로자의 기존 소득을 불려줘 조합원들이 안정적인 생활 설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시작은 미미했다. 첫 작품으로 보험·주택담보대출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담은 소식지를 발간했다. 맞춤형 보험 설계를 위해 세미나도 열었다. 하지만 소식지를 받은 조합원 가운데 도움이 됐다는 답변을 보낸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 세미나 참석자도 5명에 불과했다.
나는 전략을 바꿔 회계 담당 직원을 공략했다. 세이코엡슨은 남성 기술자가 대부분이었지만 회계 담당 직원은 여성이 많았다. 이들이 자산관리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는 나의 판단은 적중했다. 5년 이상 교육을 이어가자 여성 노조원들이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1995년 처음 세미나를 열었을 당시 5명이었던 참석자는 2000년 이후 연평균 2000명으로 늘어났다. 또 세미나에 참석한 조합원들은 거의 100%가 만족한다는 답변을 할 정도다.
강: 그렇다면 현재 세이코엡슨 노조는 어떤 방식으로 근로자의 생애 설계와 생활 설계를 지원하고 있는가.
시미즈: 노조의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다양한 내용의 세미나를 연간 80회 정도 개최하고 있다. 둘째는 생애 설계 및 자산관리와 관련된 개별 상담이다. 평균적으로 1일 1회 또는 한 가족 정도에 대해 상담하고 있다. 셋째는 생애 설계 및 자산관리와 관련된 정보 제공이다. 이를 위해 기관지, 웹, e메일 등과 같은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 기관지는 격월 발행, 기타 정보는 주 1~2회 정도의 빈도로 제공하고 있다. 넷째는 다른 노조나 기업, 지역사회, 대학 등에 세미나 강사를 파견하거나 행사 주최자에게 행사와 관련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세미나 개최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주거나 관련 도구와 웹 시스템도 제공하고 직접 개별 상담에 나서기도 한다.
강: 세이코엡슨 노조는 자산운용사까지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하다.
시미즈: 세이코엡슨 노조가 전액 출자해 ‘유니온 투신’을 설립했다. 현재 ‘유니온 펀드’를 설정해 운용, 판매하고 있는데, 일본 거주자라면 누구든 구입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출자해 회사를 설립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다. 더구나 자산운용사 설립은 일본 최초이자 세계에서도 최초일 것이다. 2012년 2월 현재 유니온 투신 주식회사의 주주는 세이코엡슨 노조를 포함해 총 3개의 노동조합인데, 향후에도 출자에 참여하는 노동조합을 늘려갈 예정이다.
강: 시미즈 부위원장은 인생 100세 시대에 회사나 노조가 근로자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시미즈: 우선 내가 생각하는 기업의 역할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계속해서 만들고 그 결과로 이익과 고용을 늘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경영에 집중해 인류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사람들과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상품,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안정적인 고용을 늘린다. 고용이 늘면 소비도 늘어나 경제가 활성화된다. 한편 ‘생애 설계 지원’은 외부 전문가와 노조에 맡기되, 이를 위한 장(場)을 마련해 주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장이란 회사, 근로자, 지역주민의 생애 설계 교육을 위한 장소, 기회, 시간(근로 시간에 교육 참가)을 말한다.
다음으로 내가 생각하는 노조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조는 전문 스킬을 가진 비영리단체인 점을 이용해 ‘생애 설계는 곧 인생 100세 시대를 사는 방법임’을 전하는 교육자가 돼야 한다. 둘째, 조직력을 활용해 지구환경 보호 활동은 물론, 장애자, 병간호가 필요한 자, 부모가 없는 아이들, 빈곤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원 내용에는 금전 및 필요 물자의 기부, 자원 봉사, 교육 등이 포함된다.
강: 마지막으로 세이코엡슨 노조가 다른 기업이나 사회에 미친 파급효과에 대해 소개해 달라.
시미즈: 다른 노조, 기업, 미디어로부터의 취재, 교류회, 강연 및 세미나에 대한 강사 파견 등과 같은 의뢰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세이코엡슨 노조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다른 회사의 노조 중에도 실제로 세이코엡슨 노조와 같은 활동을 하는 기업과 노조가 조금씩 늘고 있다.
한편, 일본인은 제대로 된 금융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주식 투자는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강하다. 게다가 기존의 대형 금융기관이 고객 본위보다는 수수료 수입을 얻는 데 집중해 왔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반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가계 살림살이를 정부와 회사에만 의존할 수 없다’. ‘자신들의 생활은 스스로 지키고 지탱해가야 한다’는 인식도 싹트고 있다.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향후 파급 속도가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담·글 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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