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tra Pak
스웨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스웨덴은 북구 스칸디나비안 반도의 나라, 노벨상, 팝 그룹 아바(ABBA)의 고향, 세계적인 가구회사 이케아(IKEA), 볼보자동차, 의류회사 H&M,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 생소하지만 너무 익숙한 종이팩 제조사 테트라팩(Tetra Pak)의 본고장이다.
노벨, 아바, 이케아, 볼보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익숙한 이름들이지만, 테트라팩은 일반인은커녕 디자인 전문가도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마시는 우유의 직육면체 포장이 대부분 테트라팩 제품이다.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테트라팩의 제품은 각각의 제품이 담긴 내용물을 만든 회사의 상품으로 디자인돼 있어 우리는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게 지나쳐 버린다. 서울우유는 서울우유가, 베지밀은 정식품이, 델몬트 콜드주스는 롯데칠성음료가 포장부터 내용물까지 모두 만든다고 생각한다. 무심이 무지를 만든 결과다.
하지만 테트라팩은 ‘소중한 것을 지킨다(Protects What’s Good)’라는 기업 모토를 가진 엄연한 글로벌 기업으로 전 세계 170개국 이상에 수출하는, 2010년 현재 전 세계 판매수익이 약 15조8000억 원의 거대 기업이다. 종이팩으로 출발해 식음료 포장재 및 공장 설계, 가공처리 등과 같은 식음료제품 제조의 전 과정을 다루는 통합 시스템을 운영하는 보이지 않는 포장재의 큰손이 바로 테트라팩이다.
테트라팩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테트라가 ‘4’를 뜻하는데, 초창기 삼각형 우유팩인 테트라 클래식이 ‘사면 종이상자’나 ‘삼각뿔 종이상자’로 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요즘도 편의점에 가면 커피우유의 사면체 삼각뿔 플라스틱 비닐제품으로 판매하고 있는 그 형태다. 단순한 사각형 용기지만 한 장의 평면 종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포장하는 포장 기술의 결과물이다. 어쩌면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도 여기서 착안해 김밥 모양을 디자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테트라팩은 유통기간이 짧은 우유나 음료를 편리하게 유통할 수 있는 20세기 음료 패키지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혁신적인 성과물이다.
왜 상하기 쉬운 유제품과 주스를 테트라팩에 담을까. 방부제를 섞지 않고도 6개월을 견딜 수 있는 테트라팩만의 독특한 무균포장기술(aseptic technology)과 디자인 덕분이다. 사각형 팩부터 육각형, 팔각형으로 디자인된 테트라팩 제품은 손에 들기 편하고, 운송에 적합하며, 내용물 보존에 탁월한 친환경 제품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술과 과학이 녹아들어 있다. 전 세계 어디서든 편리하게 마시는 진로소주팩도 바로 테트라팩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기술이 이를 가능케 했는가, 여기에 어떤 디자인이 담겼는가. 스웨덴의 혁신적인 음료 패키지
테트라팩은 1951년 스웨덴의 루벤 라우싱(Ruben Rausing·1895~1983)과 에릭 발렌베리(Erik Wallenberg)가 우유나 주스 같은 비탄산 음료를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종이 용기에 저장하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에서 시작됐다.
1940년대 스웨덴에서는 병 우유가 전용 소매점을 통해 광범위하게 소비되고 있었으나 유리병은 제작비가 많이 들고 깨지기 쉬워 유통에도 불편했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원자재 부족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 새로운 용기에 대한 요구는 더욱 절실해졌다. 라우싱은 미국에서 밀랍으로 코팅한 종이 용기에 우유를 담아 판매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밀랍 코팅 용기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고 판단한 라우싱은 저렴하고 위생적인 일회용 종이 용기를 고안하겠다고 마음먹는다. 1944년 발렌베리는 정사면체 입체 용기에 착안했다. 종전의 원통형 종이 용기는 뚜껑과 바닥면이 옆면과 수직으로 접합하는 두 군데의 이음새를 밀봉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비해 정사면체 종이 용기는 여러 층으로 쌓아두거나 보관하는 데 적합했다. 이 제품의 개발은 1944년 오켈룬드 라우싱(Akerlund & Rausing)이라는 회사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실질적으로 본궤도에 오른 것은 1951년에 테트라팩을 새로 설립하면서부터다.
테트라팩을 창립한 라우싱 박사는 1952년 플라스틱 코팅 종이에 크림이나 우유를 지속적으로 주입할 수 있는 사면체 우유팩(tetra classic) 생산 기계를 고안해 냈다. 이렇게 완성된 종이 용기를 취급이 간편한 사각형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 다음 우유를 멸균 처리하는 시스템도 개발됐다.
테트라팩이 시판되면서 소비자들은 우유를 가정에서 간편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됐다. 1952년에 제1호 설비가 스웨덴 최초로 우유가공업체에 납품됐다. 1959년까지 연간 10억 개의 테트라 클래식 팩을 만들어내면서 우유병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플라스틱 코팅 종이 개발이었다. 테트라팩은 액상 제품의 흡수가 불가능하면서 무취 무미에 인쇄도 가능하고 견고한 종이를 개발하고자 미국의 화학회사 듀폰(DuPont)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개발된 좁고 긴 두루마리형 코팅 시트가 동일한 종이팩 크기에 맞춰 적절한 간격을 두고 펼쳐지면, 정량의 우유가 내입된 후 바닥면이 고정쇠로 봉입되는 자동화 생산 시스템이 완성됐다. 이보다 진화된 진공 패키지는 우유에 거품이 이는 현상을 제거해 유통기한을 더 길게 늘려주었다.
이로써 테트라팩은 플라스틱과 종이, 인쇄에서부터 제품 생산, 유통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대단한 혁신을 이루었고, 이제 스웨덴에서 시작한 팩 우유의 배달 혁명은 가장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칠레, 북미,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장됐다. 세계 최대의 패키지 공급업체로 군림하고 있는 테트라팩이 지금까지 개발해온 다양한 종류의 팩은 여전히 초창기 혁신에 근간을 두고 있다. 무균기술, 테트라팩의 진화
테트라팩의 진화는 단순히 종이팩에 그치지 않고 1961년 세계 최초로 종이팩에 알루미늄 호일 층을 넣는 무균기술(Aseptic)을 개발했다. 무균기술이란 초고온 처리 방식(ultra heat treatment)으로 제품에 수초 동안 재빨리 높은 열을 가하고 급히 냉각시킨 후 완전한 멸균 공간에서 무균 용기에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제품 내용물을 채우는 동안에는 활성화된 미생물이 용기에 들어가지 않는데, 이러한 상태를 ‘상업적 무균상태’라고 한다. 상업적 무균상태는 모든 균을 100% 완벽하게 차단한다기보다는 실제로 부패하지 않고 제품의 음용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만 균을 처리한다는 개념이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제품을 상온에서 보관해도 신선도를 유지하며 제품 음용이 가능해졌다.
종이와 폴리에틸렌, 0.006mm의 박막 알루미늄 호일 등 6겹으로 이루어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종이 같아 보이는 포장재는 0.006mm 박막 알루미늄 호일 층이 내용물에 산소와 빛이 닿지 않도록 보호하는 특수 공법이다. 알루미늄 호일은 포장 재료에 산소와 빛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냉장 보관이나 방부제 없이도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기술을 이용해 내용물을 안전하게 채울 뿐 아니라 우유처럼 유통기한이 짧은 제품들을 알루미늄 호일을 이용해 상온에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개봉해 내용물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팩 상단에 작은 구멍을 내고 알루미늄 호일로 덧씌운 다음 구멍에 빨대를 끼워 마시게 한 작은 아이디어가 빛난다. 어린아이도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고, 흔들리는 차 안이나 길을 걸어가면서도 먹을 수 있는 그 단순한 행위 속에는 디자인과 과학이 만나 이루어낸 작은 기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테트라팩의 종이팩 바닥 표면에는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같은 기하학적 무늬와 약간의 색이 있는 다양한 기호들이 있고, 기호 알파와 비슷한 테트라팩 로고가 있다. 누가 보아도 테트라팩임을 쉽게 알려주지만 그 안에는 생산국과 내용물에 대한 첩보물 같은 정보가 담겨 있다. 그리고 ‘Aseptic’이라 적혀 있는 표시는 그 제품이 무균 포장 시스템으로 제조됐음을 나타낸다. 매일유업에서 생산하는 테트라 브릭 아셉틱 허쉬초콜릿드링크의 유통기한은 1년이고, 진로의 참이슬은 용기 주입 연월일만 적혀 있다.
무균진공 포장기술이 얼마나 유용하고 대단한 기술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무균진공 포장기술로 인해 기존의 유리 용기를 대체해 액상 식품산업의 구조가 바뀌었다. 냉장고를 대체하는 쉽게 상하지 않는 포장재는 다양한 식음료의 개발로 이어지고 장거리 여행과 일상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됐다.
테트라팩의 종류
테트라팩은 크게 무균팩과 냉장팩으로 나뉜다. 형태에 따라 테트라 클래식(Tetra Classic), 테트라 브릭 아셉틱(Tetra Brik Aseptic), 테트라 렉스(Tetra Rex), 테트라 톱(Tetra Top), 테트라 프리즈마 아셉틱(Tetra Prisma Aseptic), 테트라 웨지(Tetra Wedge), 테트라 피노(Tetra Fino) 등으로 제품화돼 생산되고 있다. 테트라 브릭 아셉틱은 벽돌과 같은 직육면체 모양의 패키지로 1969년 출시된 이래 마시기 편리하고 보관 및 운반이 경제적이어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며 다양한 음료군에 사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롯데칠성, 서울우유, 매일유업, 남양유업, 정식품, 진로 등에서 많은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테트라 프리즈마 아셉틱은 맑게 빛나는 프리즘에서 모티브를 얻어 고안된 팔각형 모양의 무균 패키지다. 디자인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손으로 잡았을 때의 느낌도 좋다. 사각의 테트라 브릭 아셉트보다 그립감이 좋고 시각적으로 세련된 아름다움을 준다. 사각에서 팔각으로의 전환이 제품의 품질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냉장용 팩에는 테트라 브릭, 테트라 톱, 테트라 렉스가 있는데 브릭은 무균 팩과 동일한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테트라 톱은 뚜껑이 있어 간편하게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성 제품이다. 각 모서리가 부드럽게 원형 처리돼 안정감이 있다. 테트라 렉스는 윗부분이 삼각형의 지붕 모양으로 돼 있는 사각형의 일반적 우유팩 모양으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제품이다. 가장 일반적인 우유팩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본다. 거리에 넘치는 일회용 용기 속에 숨어 있는 과학의 진실을, 쉽고 편리한 생활은 누군가의 노력과 집념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디자인의 창조와 진화 덕분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새벽에 배달되는 우유팩 속에 세상을 건강하고 편리하게 살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손길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본다. 땅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도 그 자리에 놓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그냥 만들어지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있을 만하니 있고 사라질 이유가 있으니 사라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좀 더 관심과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뀔 것이다. 그게 디자인이다. 1970년대 동네 구멍가게에서 팔던 서울우유 병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둔하고 투박했는지. 다만 당시의 향수로는 우유는 병으로 마시는 맛이 제격이지만, 그래도 팩 우유의 편의성을 따라올 수 없었다. 이젠 아련한 추억이다.
테트라팩은 실용과 과학이 어우러진 첨단 포장 기술에서 시작한 디자인의 혁신이다. 환경과 자원에 대한 각성이 날로 새로워지는 21세기 테트라팩의 친환경 제품은 일상의 편리함을 넘어 세상과 공존하고 있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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