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모론(oxymoron·모순어법)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oxy-moros(옥시모로스·똑똑한 바보)’에서 유래했다. 글자 그대로 옥시모론이란 어휘 자체에 의미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모순어법은 서로 상반되거나 의미가 일치하지 않는 어휘를 조합해 독특한 상황을 강조하려는 표현기법이다.
은퇴 후 일한다(working retired)는 것도 모순어법의 또 다른 사례다. 은퇴란 직장에서 물러나거나 일을 그만둔다는 의미인데, 어법상 분명히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어법은 이 시대의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은퇴 후에 일과 단절해 편안한 휴식과 여가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주된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완전한 은퇴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과도기 상태를 경험한다.
또 다른 도전과 기회의 영역, ‘새로운 중년기’
현재 퇴직을 시작한 약 720만 명의 베이비부머들도 다르지 않다.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베이비부머는 부족한 노후 소득을 보충하거나 자기실현을 위해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더 길어진 인생을 건강하게 보내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은퇴는 건강한 중년기의 단절이자 노년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장수의 혜택으로 인생의 지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중년기와 거의 동일한 새로운 인생 영역이 출현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중년기와 진정한 노년기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인생 영역을 새로운 중년기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사회철학자 피터 라슬렛(Peter Laslett)은 인생을 4연령으로 구분해 ‘인생의 새로운 지도’를 설명했다. 라슬렛의 연령 구분에 따르면 직장과 가정 중심의 중년기인 제2연령기는 55~60세까지 지속된다. 제3연령기는 중년기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인생 단계로서 80세까지 지속되는 인생의 절정기라고 규정했다. 새로운 인생 영역의 출현으로 전통적인 은퇴의 개념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게 됐다.
과거에 은퇴는 건강한 중년기의 단절이자 노년기의 시작을 의미 했다. 그러나 이제 장수의 혜택으로 인생의 지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
분명히, 새로운 인생 영역은 또 다른 도전과 기회의 영역이다. 미지의 인생 영역은 회사 중심의 현역시절과 전혀 다르다. 많은 베이비부머들이 삶의 새로운 인생 영역으로 입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회사형 인간으로 살아오느라 진정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다.
과거의 직장에서 직책과 지위는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됐다. 오랜 직장을 떠나 자율적이고 새로운 인생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삶의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동안 끈끈했던 인간관계는 물론 내 자신의 강점과 재능을 표현할 목표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 인생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라며 끝없이 자문한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년기를 지나면 생애 후기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지금까지의 경험, 경력을 되돌아보고 남은 생애에서 자신이 바라는 삶의 방식과 인생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해돋이보다 해질녘을 응시한다.
심리학자 폴 발테스(Paul Baltes)는 “사람들은 중년기를 지나면 시간의 관점이 바뀌어 죽음을 더 가깝게 인식한다. 즉,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살아온 연수보다 앞으로 살아갈 연수를 계산한다. 그리고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삶의 의미를 재평가하려는 심리적 압박이 커진다”고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자인 로라 카스텐센(Laura Carstensen)은 ‘사회정서적 선택(socio-emotional selectivity)’이라는 발달이론을 통해 이러한 사고를 뒷받침했다. 나이가 들면 인생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느끼면서 더욱 더 삶의 중요한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삶의 통찰력이 생기고, 인간관계는 더 깊어지면서 더 큰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노년은 노력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
내 소중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삶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다.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절박한 마음이 솟구친다.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인생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인생에서 보다 중요한 것을 선택한다. 누구나 죽음 앞에 서면 모든 기대, 자만심, 실패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진정 중요한 것만 남는다.
칼 융은 인생의 전반부는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위해 살았다면, 나머지 후반부는 소중한 삶의 의미를 성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생 후반부는 자연의 선물이며, 이 시기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동기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회사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느라고 소중한 내 꿈을 접고 살았다면, 이제 남은 인생에서 내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온 내 소중한 꿈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며 의미 있는 일을 찾는다. 앞으로 많은 베이비부머들은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인생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할 것이다. 일과 여가시간을 조정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다양하게 선택할 것이다.
사회공헌 활동, 자기개발, 취미활동의 적극적 여가생활을 통해서 진정 자신이 꿈꾸던 소중한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천직을 찾아 일과 생활을 균형을 추구하는 의미 추구형, 계속해서 회사형 인간으로 일하는 현역형, 생계 목적상 일에 종사하는 소득 보충형 등으로 다원화될 것이다.
미국의 최고령 비행사로 일한 존 글렌(John Glenn)은 장래 고령자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글렌은 77세에 우주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지구에 귀환했을 때 “고령자도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적인 우주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글렌을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사회는 반세기 전에 설정한 연령 기준을 적용해 지금의 고령자를 바라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화폐가치를 인플레이션율로 조정하듯이 고령자의 기준과 생산 가능인구라는 통념도 평균수명에 따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엘레노어 루즈벨트 전 미 대통령은 “아름다운 젊은이는 자연의 우발적인 산물이지만, 아름다운 고령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자료 ‘Historical perspectives of middle age within the life span’, Hans-Werner Wahl and Andreas Kruse, 2005
이형종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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