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엔드라 쿠마르 삼양사 의약BU 상무 부부


한국과 연을 맺은 지 35년. 인도 여인은 집안에서 결정해 준 예비 남편을 따라 한국까지 왔고, 딸 아들 낳고 서울살이에 스펀지처럼 스며든 지도 30년이다. 인도인 쿠마르(Kumar) 상무 부부가 마련한 오리지널 인도 가정식 요리에 흠뻑 빠졌던 즐거운 시간으로 초대한다.
“김치찌개,미역국이라면 한국 사람 못지 않죠”
“여보세요~?”

“Can I…. 아, 안녕하세요. 쿠마르 박사님….”

지인이 건넨 전화번호를 들고 섭외차 처음으로 통화를 하던 날의 상황이다. 어설픈 영어를 섞을 필요도 없이 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그는 급기야 “그런데 우리가 뭐 인터뷰를 할 만한 사람들도 아닌데 쑥스럽네요”라는 겸양의 멘트까지 건넸다.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사람 좋아 보이는’ 사티엔드라 쿠마르(Satyendra Kumar) 씨는 현재 삼양사 의약BU(Business Unit) 상무로 재직 중인 인도인이다. 성남시 외국인학교 파트타임 교사로 일하는 아내 가야트리 데비 쿠마르(Gayatri Devi Kumar) 씨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부부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 아침에 집을 방문한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쿠마르 상무 부부는 마치 동생이 찾아온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박사 과정 학생에서 대기업 임원까지

사실 인터뷰를 앞두고 내려놓을 수 없었던 고민이 하나 있었다. 강산이 세 번하고도 반이 바뀔 시간 동안의 역사, 그 물꼬를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틀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일단은 시계를 35년 전으로 돌려놓아 본다.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인(쿠마르 여사는 한국어 말하기가 듣기에 비해 약하다) 세 사람의 대화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기 시작했다.
“김치찌개,미역국이라면 한국 사람 못지 않죠”
머니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되셨나요.

사티엔드라 쿠마르(이하 남편) 정확히 1976년 9월에 서울에 왔는데 당시에 인도에서 약학으로 석사 과정까지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미국으로 갈까,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서울대에서 1년간 특별 장학금을 지급하는 약학 박사 장학생을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장학금도 준다고 하니 미국 대신 한국을 선택했죠.(웃음)

머니 35년 전에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셨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도 하기 전인데요.

남편 아버지가 제 출신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였는데(인도 필라니 브릴라기술과학대는 미국으로 치자면 MIT 정도의 명문)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역사도 들으면서 자라 한국은 제게 그리 낯선 나라는 아니었어요. 양국은 사실 불교로도 교류가 많았던 나라들이지 않습니까.

머니 서울대로 옮길 때 한국어 실력은 어느 정도셨나요. 적응은 빨리 하셨나요.

남편 한국어를 전혀 모르고 왔었죠. 초기에 아주 짧게 한국어를 배우고 나머진 그저 ‘생활 한국어’로 습득했죠. 박사 과정 공부할 때 외국인 학생 기숙사에 매니저로 일했는데, 그 기숙사 학생 대부분이 재일교포들이라 서로 한국말 모르는 건 피장파장이었어요.(웃음) 다행스럽게도 언어 습득이 빠른 편이라 쓸 줄은 몰라도 말은 빨리 늘어 생활하는 데 지장이 크게 없었어요.

머니 그러면 부인은 언제 한국으로 오신 겁니까.

남편 한국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와이프는 내가 선택할 테니 너는 공부에만 집중해라” 하시더라고요. 그러시더니 정말로 며느릿감을 점지해 주셨어요. 인도는 커뮤니티 안에서 부모들 간에 자녀들의 짝을 정하는 풍습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죠. 아내는 저랑 결혼하러 서울로 온 셈이죠.

머니 30년 전이면 부인께서도 꽃다운 나이 아니셨나요.

가야트리 쿠마르(이하 아내) 네, 스물세 살이었어요. 저는 뉴델리 사람으로 상과대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어요. 사실은 한국으로 오기 전에 남편을 알고는 있었어요. 부모님들이 혼사를 결정하신 후에 인도에서 만나기도 했으니까요.
결혼 초 전라도 월출산 여행 때 찍은 사진
결혼 초 전라도 월출산 여행 때 찍은 사진
쿠마르 여사는 30년 전 얘기를 쑥스럽게 이어가다 거실에 놓인 액자 하나를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스물다섯, 스물일곱의 ‘쿠마르 커플’이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머니 사진은 연예할 때 인도에서 찍은 건가요.

남편 아, 아니에요. 저기가 아마도 전라도 월출산인가 월추산인가…(정답은 ‘월출산’) 헷갈리는데 거기로 여행 갔을 때예요. 결혼 후에 여행을 갔었는데 해가 떠오르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죠.

머니 부인께서는 남편 따라 무작정 건너온 한국에 쉽게 적응이 되던가요.

아내 한국과 인도 문화는 서로 닮은 점이 많아요. 가족 중심적인 것과 타인에게 친절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풍습이 매우 비슷했어요. 하지만 해프닝도 많았어요. 저는 물이 먹고 싶어서 물을 달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보리차’를 주는 겁니다. ‘차’는 약으로 알고 있던 터라 왜 사람들이 저한테 자꾸 약을 주는지 의아했었죠.(웃음)

머니 말이 통하지 않아 이웃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아내 처음 두어 달간 한국어학원을 다녔는데 어려워서 포기했어요. 지금도 대강 알아듣긴 해도 말하는 건 어려워요. 한국 사람들이 워낙에 친절해서 그런지 이웃 아주머니들도 따뜻하게 대해줬어요. 그런데 그런 문화가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결혼 초기에 아이가 없을 때 이웃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왜 아이가 없느냐며 병원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어찌나 저를 설득하시던지요. 애가 빨리 안 들어서는 걸 문제로 생각하시더라고요.(웃음)
큰딸 스와티 양의 졸업식에서. 스와티 양은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현재 월스트리트에서 애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큰딸 스와티 양의 졸업식에서. 스와티 양은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현재 월스트리트에서 애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울살이에 적응해갔다. 시간은 흘러 이웃 아주머니의 우려는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건강하고 예쁜 딸과 아들, 슬하에 1남 1녀도 두게 됐다. 지금 아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지낸다.



머니 박사 과정을 마치고 바로 취업하셨나요.

남편 예, 첫 직장은 대웅제약이었어요. 사실 전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아 연구보다는 약의 효능 검증, 수입 약품의 라이선싱 업무가 체질에 맞더라고요. 대웅제약에서 16년가량 신제품 개발과 해외 영업, 수입 약품 평가와 라이선싱 등의 업무를 주로 했어요. 그러다가 인생에 한번쯤 변화가 필요할 것 같아 지금의 직장인 삼양사로 옮겼어요. 삼양사 제약사업부에서의 업무 역시 기술 평가와 우리 제품의 외국 세일즈와 라이선싱 등이죠.

머니 구수한 한국어 덕분에 회사에서 인기도 많으시겠어요.

남편 제가 원래 사람을 좋아해요.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매일 밤 귀가 시각이 11시, 12시라 아내가 걱정도 많이 했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은 ‘우리’ 문화가 강하잖습니까. 일도 같이 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에 술자리도 같이 하니 혼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죠. 밥 많이 먹는 거, 술 많이 먹는 거 어디 가서 자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좀 그랬어요. 하하하.



한국의 직장인, 한국형 부모로

임원이다 보니 쿠마르 상무는 회식은 물론 직원들 결혼식까지 꼼꼼하게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오후에 직원 결혼식이 있어 ‘맥주 한 잔’이 예약돼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영락없는 한국형 직장 상사다.



머니 만약 인도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다면 어떠셨을까요. 인도와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남편 대학 3학년 때 인도에서 한 회사에 인턴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식당에서 톱 매니지먼트층, 중간관리자층, 일반 직원이 각각 따로 분리된 좌석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게 됐어요. 한국은 어떻습니까. 구내식당에 가보면 직급의 상하구별이 없어요. 계급이나 신분 등을 그리 따지지 않는 평등주의적인(equalitarian) 문화가 저는 더 좋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의 두 가지 펀더멘털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첫 번째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다이내믹한 사회라는 것, 또 하나는 평등한 문화예요. 한국 사람들이 급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이 있어요. 항상 무슨 일이든 벌어지고 있죠(something’s going on).

아내 아이들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도 한국은 참 좋았어요. 마약 문제가 심각하지 않고 안전하니까요. 저 같은 경우엔 아이들 어릴 때 한국 문화도 익히고 한국어도 배우게 할 겸 한국인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보냈어요. 그 덕에 아이들이 한국인 친구도 많고 특히 딸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요. 작은아이는 좀 서툴지만요. 큰아이가 뉴욕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거기 갔다가 지하철 타 보고 혀를 내둘렀어요. 어찌나 지저분하던지요. 한국은 어딜 가나 깨끗하잖아요.

머니 자제분들 얘기 좀 해주시죠.

남편 큰딸 스와티(Swati)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후 현재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어요. ‘스와티’는 산스크리트어로 ‘북두칠성’이란 뜻이에요. 둘째 아들 고탐(Gautam)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남가주대에서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머니 ‘자식 농사’도 잘 지으셨는데, 쿠마르 여사님의 특별한 양육법이 있었다면 귀띔 좀 해주시죠.

아내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타입이에요. 고탐이 수학에 좀 약했는데(쿠마르 여사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주로 수학 또는 과학), 그래서 애를 살짝 먹었어요. 일단 책을 주고 풀게 한 뒤 틀린 부분을 체크하는 게 다죠. 그런데 공부를 게을리 하면 해야 할 숙제가 점점 늘어나게 되겠죠. 그럴 때마다 아들은 “엄마, 사랑해요”를 남발했어요.(웃음) 한번은 시험지 대신 종이에 ‘엄마, 사랑해요’란 말을 가득 써서 내밀길래 제가 한 술 더 떠서 ‘I love you very, very, very(엄청나게 많이 나열했다고 한다) much’라고 편지를 써 줬더니 그 다음에 아들이 아무 말 없이 편지 아래에 시험지를 붙여 주더라고요.

남편 고등학교 가서부터는 쉬운 ‘협박’법이 있었어요. 공부를 잘하면 미국 대학에 보내줄 거고, 못하면 인도 대학에 보낼 거라고 했더니 알아서 열심히 하더라군요.(웃음)

머니 스와티 양과 고탐 군은 외국인 학교를 다녔으니 한국의 사교육 환경에서는 다소 자유로웠겠습니다.

아내 아무래도 그렇죠. 외국인 학교에는 미국 학교의 커리큘럼에 근거해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학으로 진로를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희 아이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키운 편인데 지금은 둘 다 미국에 가 있지만 한국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인도 문화를 잊지 않게끔 2년에 한 번씩 온 가족이 고향을 찾는데, 애들이 며칠만 지나면 서울에 가자며 아우성일 정도예요. 얼마 전엔 아빠가 은퇴하고 인도로 돌아가서 살게 되더라도 서울에 집 하나는 꼭 마련해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머니 쿠마르 박사님의 정년이 한국적 기준과 같을까요.

남편 사실 은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을 할 생각입니다.

아내 저는 이 양반이 은퇴하는 거 원치 않아요. 집에서 며칠만 쉬어도 좀이 쑤셔 소파라도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거든요.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제 생활은 끔찍해질(miserable) 것 같아요.(웃음)



남편은 김치찌개, 아내는 미역국의 ‘달인’
손님 식사 준비에 분주한 쿠마르 상무 부부
손님 식사 준비에 분주한 쿠마르 상무 부부
어느덧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 쿠마르 여사는 기자가 시장하진 않은지 몇 번이나 물어봤다. 애초부터 주방에서 풍겨 나오는 카레 향에 배꼽시계가 들썩들썩했던 터다.

쿠마르 여사는 앞치마를 두르고 철판을 달궈 인도 빵 ‘로티(roti)’를 굽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식어버린 음식은 쿠마르 상무가 데웠다.

식탁에는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과 한국으로 치자면 만두랄 수 있는 사모사(samosa), 길쭉한 인도산 쌀을 익혀 낸 밥, 채소를 섞은 요거트 등 이른바 인도식 홈메이드 음식들이 하나둘씩 올라오며 금세 한상이 차려졌다.



머니 평소에도 이렇게 한상 가득히 차려놓고 드시나요.

아내 제가 요리하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 오셔서 조금 더 하긴 했지만 그리 많이 차린 건 아녜요.

머니 한국 요리도 잘하실 것 같은데요. 두 분 주 종목이 궁금하네요.

남편 저는 한국 음식을 하는 것도,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특히 생선 매운탕을 아주 좋아해요. 아시아에서 국물이 풍부한 요리는 아마도 한국의 탕밖에 없을 듯해요. 여름에는 콩국수도 자주 먹고, 빈대떡과 막걸리의 조합도 아주 좋아합니다. 제일 잘 하는 요리는 김치찌개인데, 서울대 기숙사 주방 아주머니가 요리하실 때 곁눈질로 배웠어요. 레시피의 비결은 처음에 마늘과 양파를 기름에 볶다가 고추장을 조금 넣고 다시 볶은 뒤 김치를 넣는 거죠.

아내 저는 미역국이 제일 자신 있어요. 아기 낳고 엄청 먹어서 그런지 쉽더라고요. 일단 미역국은 오래 끓여야 제 맛이 나는 것 같아요.

머니 아이들이 성장해 제각각 자리를 잡았으니 큰 숙제는 해결하신 듯한데, 두 분이 시간을 함께 보내시는 취미생활이 있다면요.

남편 주말에 양재천변 걷기를 꾸준히 하고 있고, 여유가 생길 때마다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스케줄만 맞으면 아이들도 함께 가고요. 저야 출장차 외국을 많이 다니지만 아내는 가고 싶은 나라도 많은 듯해요. 1년에 한 번 정도는 거르지 않고 해외여행을 가는 게 남편으로서의 의무(obligation)죠. 하하하.

머니 앞으로 남은 꿈이 있다면요.

남편 30년 가까이 해 온 일의 전문성을 살려 후배들을 잘 가르치고 싶고, 시간적 여유가 허락된다면 인도와 한국 간 교류에 일조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아내 저는 이미 다 가졌는걸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주말 반나절을 송두리째 빼앗는 듯한 미안한 마음 에 서둘러 나오려는 기자에게 쿠마르 여사는 사모사를 챙겨가라며 싸준다. 안주인의 인심과 배려 역시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치찌개,미역국이라면 한국 사람 못지 않죠”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