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 Lichtenstein 로이 리히텐슈타인

만화 같은 세상이다. 아니, 세상이 만화다. 요지경 세상. 폭우에 하늘이 무너지고 날벼락으로 물에 잠기더니 하루아침에 주가가 폭락하고, 이틀이 멀다 하고 세상이 바뀌는 웃지도 못할 현실. 코믹 만화 같은 세상이다.

뉴욕 출신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97)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풍선껌 포장지에 그려진 만화 캐릭터를 심심풀이로 그려주다가 아이들과 즐겨보던 미키마우스 만화를 크게 확대해 캔버스에 재현했다.
Oh, Jeff. I Love You. But…, 1964년, 캔버스에 오일 마그나, 121.9×121.9cm, 시애틀 개인 소장
Oh, Jeff. I Love You. But…, 1964년, 캔버스에 오일 마그나, 121.9×121.9cm, 시애틀 개인 소장
그는 디즈니 만화 주인공뿐 아니라 전화번호부의 작은 광고 그림, 우편주문 카탈로그의 상품 일러스트레이션, 더 나아가 성인 취향의 순정 만화나 전쟁 만화 같은 평범하고 상업화된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만화 그림은 이렇게 사소하게 시작했지만 1962년 2월 뉴욕 최고의 화랑 가운데 하나인 레오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이때 뉴욕의 콧대 높은 평론가들은 콧방귀를 뀌며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평가 절하했지만 공식적인 전시를 하기도 전에 안목 있는 컬렉터들에게 모두 팔렸다. 그는 만화로 그려낸 팝아트의 세계로 미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만화의 주인공
Roy Lichtenstein
Roy Lichtenstein
리히텐슈타인은 1923년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동산 중개업자로 집안에 예술적 소양을 가진 유전인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열두 살 때까지 공립학교에 다니고 이후 사설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집에서 취미로 유화를 그릴 정도였다.

이 무렵 재즈에도 관심이 많아 할렘의 아폴로 극장과 52번가의 재즈클럽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1939년 리히텐슈타인이 16세 되던 해 맨해튼 57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개설한 여름 강좌에 등록했다.

이곳에서 그는 맨해튼 풍경, 카니발, 권투시합, 그리고 롱아일랜드의 해변 등 뉴욕 생활 특유의 단편들을 스케치했다. 아울러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회화와 드로잉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94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향 뉴욕을 떠나 미술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오하이오주립대에 입학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부모는 아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돼 현실적인 직업을 갖도록 일반 대학에서 교직을 이수할 것을 권했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는 미술 교육기관으로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학위를 수여하진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은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학사를 마치고 석사 과정에 입학해 이후 10년간 강사로 일했다.

이런 지적인 경험은 그로 하여금 회화를 분석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9년 이사벨 윌슨과 결혼, 아내의 직장이 있는 클리블랜드로 이사해 6년간 살았다. 리히텐슈타인은 토목설계사, 창문장식가, 금속판 디자이너 같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에드워드 호퍼 같은 아메리칸 리얼리즘의 인체 모델이나 도시 풍경 혹은 정물화 같은 주제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피카소와 브라크 같은 유럽 모더니즘 아티스트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1950년대 리히텐슈타인은 정기적으로 뉴욕에서 전시를 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 당시 뉴욕 화단에는 추상표현주의의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에다 물감을 통째로 들고 뿌리는 액션페인팅으로 화가의 에너지를 발산했고, 윌렘 드 쿠닝은 즉흥적 기법의 붓질을 거침없이 해댔다. 반면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같은 화가는 형태와 색이 주는 느낌에 깊이 몰두했다. 이들은 모두 화가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감정에 깊은 관련이 있었다.

리히텐슈타인도 뉴욕 화단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 주류와 관계를 맺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러한 고민은 리히텐슈타인에게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벅스 버니 등 디즈니 만화 주인공들을 그리게 했고, 그의 추상표현주의 화폭에 만화 주인공이 대신 자리 잡게 하는 동기가 됐다.

훗날 한 평론가가 왜 추상표현주의 화풍을 걷어차고 나와 만화 주인공을 그리기 시작했느냐고 묻자 그는 “자포자기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면서 2세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 내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의 색깔을 찾다가 결국 디즈니 만화 그림으로 급선회했고, 기성의 코믹한 만화 이미지를 자기 그림에서 익살스럽게 변형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두 아들은 1954년과 1956년에 태어났다. 그가 풍선껌 포장지에 그리던 만화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한 1950년대 말 아이들은 매우 어렸다. 아이들이 이런 그림에 열광했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주인공이 미국 문화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이들에게 미키마우스를 조그맣게 그려주었다. 그의 사소한 출발은 ‘풍선껌 포장지의 그림을 크게 그려서 어떤지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고, 결국 회화로서의 풍선껌 포장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포장지를 진지한 작품이라고 여기는 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만화에서 회화로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이미지 작품 은 그의 성공 신화를 쉽게 설명한다. 그림의 주제는 전화다. 연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이 한 컷의 만화에 리히텐슈타인은 자기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구현했다.

하나는 붓으로 그려낸 듯한 굵은 선이요, 다른 하나는 망점으로 채워진 단순한 이미지다. 노랑과 분홍, 그리고 보라의 삼색은 모두 당시 컬러 만화 원작에서 보이는 색과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의아해하면서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만화 속의 대화를 말풍선 속에 표현해 마치 배우가 말하는 듯 다가온다. “제프, 널 사랑해. 하지만….” 이 대화 속에 제프는 결국 사랑의 이별을 맛보아야 함을 보는 이는 알고 있다.

그래서 만화 같은 그림이지만 사람들은 그 가벼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신선하고 새롭게 받아들였다.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와 캠벨 통조림 캔을 차용한 팝아트의 가벼움처럼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원작 만화 (소녀의 사랑 이야기 #15), 1952년 1~2월
원작 만화 (소녀의 사랑 이야기 #15), 1952년 1~2월
리히텐슈타인은 자기의 그림이 가능하면 손으로 그린 붓질의 흔적을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제작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원작 만화 <소녀의 사랑 이야기 #15>(Girls’ Love Stories #15)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망점이다.
뉴욕타임스 일요판 광고
뉴욕타임스 일요판 광고
이 망점은 뉴욕 신문 선의 발행인이자 미술가인 벤저민 데이(1838~1916)의 발명품으로 만화에서 특정한 장면만 따로 떼어내 장식하는 유효한 표현 수단이 될 뿐 아니라 만화를 만화답게 만드는 훌륭한 도구였다.

리히텐슈타인은 이를 자신의 만화 그림에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구멍이 뚫린 알루미늄 판을 윤곽선이 그려진 화면의 드로잉 위에 올려놓고 칫솔 같은 거친 붓에 물감을 묻혀 붓질을 해 완성했다. 언뜻 보면 기계로 인쇄한 듯 정교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모두 손으로 일일이 그려낸 작업 공정의 결과물이다.

상업 이미지 예술

만화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 상업 이미지로 리히텐슈타인을 유명하게 만든 그림이 있다. 뉴욕타임스 일간지 광고에 실린 필라델피아 포코노 휴양지 호텔 광고 이미지를 차용한 <공을 든 소녀>(Girl with Ball)다.
공을 든 소녀, 1961년, 캔버스에 유화, 153.7×92.7cm, 뉴욕현대미술관(MoMA)
공을 든 소녀, 1961년, 캔버스에 유화, 153.7×92.7cm, 뉴욕현대미술관(MoMA)
두 팔을 쭉 벋어 상대가 던진 비치볼을 까치발을 하고 받아든 장면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광고는 매우 작았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여자를 거의 실제 크기로 확대하고 원래의 흑백 이미지에서 경제 원칙에 따라 3도 인쇄 즉, 노랑·빨강·파랑으로 제한해 싸구려 인쇄 만화처럼 보이게 했다.

아자! 신문광고에는 보이지 않는 출렁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치켜 올라 간 머리칼에 젊음의 함성이 화면 바깥으로 퍼진다. 광고의 흑백 이미지가 실감나게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한다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밟아 여는 쓰레기통, 1961년, 캔버스에 유화, 각 82.5×134.6cm, 런던 로버트 프레이저 소장
밟아 여는 쓰레기통, 1961년, 캔버스에 유화, 각 82.5×134.6cm, 런던 로버트 프레이저 소장
그의 또 다른 초기 상업 이미지 작품 <밟아 여는 쓰레기통>도 아마 신제품 쓰레기통에 대한 설명서를 기초로 그렸을 것이다. 쓰레기통이라고 하지만 꽃과 색으로 단정하게 만들어진 둥근 통 앞으로 여성의 다리가 왼쪽에서 비스듬히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

우아한 체크무늬 스커트를 한 이 여인은 리본 장식을 한 하이힐을 신고 살짝 페달을 밟는다. 화면은 자연스럽게 옆 그림으로 옮아가 쓰레기통 뚜껑이 열린 상태로 바뀐다. 광고의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페달을 밟으면 뚜껑이 열려 일일이 손으로 열어야 했던 번거로움과 비위생적인 면을 한꺼번에 해결한 제품의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리히텐슈타인은 <밟아 여는 쓰레기통>을 빨강 단색과 망점을 이용한 신문 인쇄기법으로 완성했다.

레오카스텔리 화상은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의 가벼움에서 큰 매력을 느꼈고 그 매력은 돈과 직결돼 뉴욕의 영향력 있는 아트컬렉터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결국 리히텐슈타인은 상업미술의 감각적 표현으로 예술가들이 경멸했던 상업미술의 싸구려 이미지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나는 어떤 것이 예술이고 어떤 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구분 짓는 기준을 알고 싶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그림들이 오늘날 천문학적 가치를 갖게 된 것 자체가 바로 ‘예술’이라는 기준을 보여준 분명한 증거다.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천천히 일어났다](We Rose up slowly)를 작업하는 리히텐슈타인과 만화 보는 두 아들, 1964년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천천히 일어났다](We Rose up slowly)를 작업하는 리히텐슈타인과 만화 보는 두 아들, 1964년
팝아트의 거장

<타카타카>(Takka Takka)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8월부터 11월까지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에서 가장 큰 과달카날 섬 탈환을 위한 미 해병대원의 실제 전쟁을 만화로 그려낸 것을 리히텐슈타인이 새롭게 해석한 그림이다.
[타카타카]의 원작 만화
[타카타카]의 원작 만화
타카타카, 1962년, 캔버스에 마그나, 173×143cm, 퀼른 루드비히미술관
타카타카, 1962년, 캔버스에 마그나, 173×143cm, 퀼른 루드비히미술관
기관총에서 불을 뿜고 수류탄이 날아오르는 등 화면 위에 더욱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원작 만화에는 총구 근처에 흔들리는 손이 있지만 리히텐슈타인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 따로 없고 마치 무기들끼리 싸우는 것처럼 그렸다.

폭음은 시각적으로 더욱 강렬하게 표현했고 색과 형태를 단순화시켜 차갑고 견고하게 전쟁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 바탕과 중요한 부분에 망점을 두어 만화 이미지를 고양시킨다. 어렸을 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보았던 만화의 향수를 실감나게 그려내어 성인이 돼서 기억과 함께 새로운 상상력을 키운다.

리히텐슈타인은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소리와 촉감 같은 감각을 추상적인 성질의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타카타카’라는 말은 빠르게 발사되는 무기의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다.

시각적으로 표현한 이 말은 소리의 중량감과 거친 느낌까지 내포한다. 상단을 가로로 자르고 화면의 내용을 만화 투의 서체로 적어 놓았는데 노란 배경이 마치 금방 인쇄돼 뉴욕 지하철 신문판매대 코믹 만화 코너에 진열된 모습을 보는 듯하다.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풍자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작품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 작품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나는 작품에 그런 걸 담고 싶지 않다.

나는 사회에 뭔가를 가르치려 하거나, 우리의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주제에는 관심이 없다. 내 모든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다른 예술에 대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만화라 할지라도.”

리히텐슈타인은 언제나 만화의 세속적 미학을 향상시켰음을 강조했다. 진정 어른의 마음을 만화로 풀어낸 팝아트의 거장이었다.


[최선호의 아트 오디세이] 만화로 그려낸 팝아트의 세계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