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1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필자가 속한 연구소 연구원과 일본의 미쓰비시UFJ신탁은행 담당자 간에 회합이 있었다. 미쓰비시UFJ는 일본 최대 은행의 하나이자, 확정급여형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약 23%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최고의 퇴직연금 사업자다.

3시간에 걸쳐 한·일 퇴직연금 제도와 시장 동향을 주고받는 소중한 자리였다. 이번 회합은 우리나라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근퇴법)이 통과된 지 10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자리였다.

매우 귀중한 정보를 주고받았지만 기분은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의 선진화에 크게 기여할 근퇴법 개정안 마련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충만해야 할 텐데 왜 씁쓸한 기분이 들었을까.

결론은 근퇴법 개정 이후 남은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 이런 과제가 일본에서는 이슈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과제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번 개정안의 주요 내용부터 살펴보자.

신설 사업장 퇴직금보다 퇴직연금 우선 설정해야

근퇴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7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설 사업장의 경우 퇴직연금 제도를 우선 설정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퇴직급여 제도는 퇴직금과 퇴직연금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금까지는 퇴직금이 우선이었다.

즉 퇴직금이 우선 설정되고 퇴직연금을 도입하려면 근로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식이었다. 이것이 이번에 반대로 바뀐 것이다. 새로이 설립되는 사업장의 경우 사업 설립 1년 이내에 퇴직연금을 설정해야 하며 퇴직연금 대신 퇴직금 제도를 도입하려면 근로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둘째, 퇴직연금 제도 설계의 유연성을 강화했다. 기존에는 비록 기업에서 퇴직 시에 지급받을 급여 수준이 정해진 확정급여형(DB)과 사용자가 정해진 금액을 기여하고 그 기여금과 운용수입을 급여로 지급하는 확정기여형(DC)을 동시에 도입하더라도 근로자는 그중 하나만 선택해 가입할 수 있었다.

이는 퇴직급여의 궁극적 수혜자가 근로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근로자의 선택권을 제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이런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근로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준 것이다.

다만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의 가입 비율은 한 기업에서 하나의 비율만 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가입비율이 십인십색으로 다양해지면 제도 운영의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퇴직금 중간정산 요건을 신설했다. 지금까지는 퇴직금 중간정산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요구만 하면 얼마든지 그동안 쌓여있는 퇴직급여를 인출해 사용할 수 있었다.

퇴직연금에는 중도인출 요건이란 게 있어서 이 요건에 합치할 때에만 적립금을 인출할 수 있었는데 퇴직금에는 이런 요건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퇴직금 중간정산은 양날의 칼이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었지만, 미래의 노후자금을 현재의 소비에 당겨쓴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퇴직금 중간정산을 달콤한 독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번에 퇴직금 중간정산 요건을 퇴직연금의 중도인출 요건과 동일한 수준으로 새로이 설정하기로 한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이직 시 적립금이 근로자의 개인형 퇴직연금 계정으로 이전

넷째, 그동안 미약했던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의 급여 지급능력을 대폭 강화했다. 사내에 장부상으로만 기록 하는 퇴직금과 달리 사외의 적격 금융회사에 퇴직급여를 예치하는 퇴직연금의 경우 그 자체로도 근로자의 수급권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외부에 예치한 적립금 규모가 필요로 하는 퇴직부채를 크게 밑돌 경우 자칫 퇴직급여 체불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자산이 부채를 크게 하회하는 상황에서 해당 기업이 도산하게 되면 확정급여형 가입자의 수급권은 커다란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파산을 선언한 굴지의 미국 항공회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이런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정 적립금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를 도입했다.

예를 들어 퇴직연금 사업자로 하여금 확정급여형의 적립금 수준이 법에서 요구하는 최소 기준을 상회하는지 여부를 체크하도록 하고, 그 기준에 미달할 경우에는 근로자 대표에게 통지하도록 하고 있다. 참고로 확정기여형의 경우에는 부담금이 근로자의 계좌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용자의 파산에 따른 리스크는 없다.

다섯째, 퇴직연금의 연속성을 강화했다. 지금까지는 퇴직연금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퇴직을 하게 되면 무조건 그동안 쌓여있는 적립금을 퇴직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했다. 한 기업에서 근로자의 평균 근속기간이 5.7년 정도에 불과한 노동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제도로는 30년 이상 달하는 긴 노후를 대비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마지막 근무지에서 발생한 5~6년 정도의 퇴직연금 적립금만 노후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개정안에서는 근로자가 이직 시 퇴직연금 적립금을 곧바로 근로자에게 지급하지 않고 근로자가 지정한 개인형 퇴직연금 계정(IRP)으로 이전하도록 한 것이다.

자영업자도 개인형 퇴직연금 가입 가능
[Retirement Plan] 퇴직연금 제도 개정안의 주요 내용
여섯째, 개인형 퇴직연금 제도를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개인형 퇴직연금은 전체 근로기간 중에 발생하는 퇴직급여가 계속 쌓이지 못하고 이직 시마다 소멸되는 것을 막아주는 매우 중요한 퇴직연금 통산장치다. 이처럼 좋은 제도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개정안에 담겨 있다.

바로 3층 사회보장 제도의 2층에서 소외돼 있는 자영업자들도 개인형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으며, 이들의 노후 대비는 일부 고소득 자영업자를 제외하곤 매우 낮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제도적 진일보라 할 수 있다.

다만 법 시행일로부터 5년간 유예하기로 한 것은 큰 아쉬움이라 하겠다. 또한 그동안 확정기여형에 가입한 근로자들만 가능했던 추가납입이 개인형 퇴직연금을 통해 확정급여형에 가입한 근로자들도 가능하게 됐다. 이 역시 노후 대비를 탄탄히 한다는 점에서 제도적 진일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퇴직연금 통계 인프라를 강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즉 퇴직연금 주무부서인 고용노동부 장관이 퇴직연금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사용자의 부담금 납입현황 등 금융 거래정보를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동안은 금융거래실명제법에 막혀 퇴직연금 감독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얻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 적립금이 제대로 쌓여가는지, 퇴직연금의 건전성 확보에서 가장 기본인 부담금이 제때 납입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도 이번 개정안은 근로자의 수급권 보호에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개정안에는 둘 이상의 사용자가 참여하는 확정기여형 퇴직연금 제도의 도입, 퇴직연금 모집인 제도 도입, 퇴직연금 제도 폐지 및 중단 시의 처리, 사용자와 퇴직연금 사업자의 책무 강화 등 제도의 선진화에 중요한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퇴직연금 담당자와의 회합에서 진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아직 남은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안 통과로 제도의 선진화는 이뤄냈지만 시장의 선진화는 아직 요원하다.
[Retirement Plan] 퇴직연금 제도 개정안의 주요 내용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