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민주평통 북미주 부의장
32년 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공항에 한 ‘경상도 촌놈’이 발을 디뎠다. 이후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그는 의류, 부동산 등의 사업으로 ‘코메리칸 드림’을 일궈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성공 스토리보다 더 강하게 공명을 일으키는 사연이 있다.이민생활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어려운 한인 유학생들을 후원해 온 것. 올해 그는 사재 100만 달러를 쾌척, 장학재단 설립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눔에 대한 신선한 자극을 던져준 김영호 민주평통 북미주 부의장의 이야기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이자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의 제15기 해외 간부위원 워크숍이 열린 지난 6월 28일, 서울 잠실의 한 호텔에서 김영호 민주평통 북미주 부의장을 만났다.
김 부의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두 명의 해외 부의장 중 한 명으로, 14기(임기 2년)에 이어 2011년 7월 출범하는 15기에서도 북미주 부의장으로 연임됐다. 민주평통 부의장은 대한민국 장관급 대우를 받는 명예직. 2600여 명에 달하는 민주평통 해외 자문위원들이 세계 각국 각 분야에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이른바 ‘성공한 한인’들임을 감안한다면 김 부의장의 현재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서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인을 통해 당장 만나자는 요청을 넣었다. 서울을 찾는 일이 잦지 않은 것도 이유였지만 30년 재미교포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드라마의 중심에는 2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재를 털어 한인 유학생을 도운 ‘나눔’이 있다.
25년 후원의 결정체 장학재단 설립
“지난달 말에 청와대 친수식에서 15기 북미주 부의장 임명장을 받았는데, 연임하는 만큼 어깨도 무겁습니다. 의장이신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해외에서 더욱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각오예요.”
기자의 축하인사에 대한 김 부의장의 화답이다. 그는 지난 2년간 민주평통 14기 북미주 부의장으로서 크고 작은 ‘나랏일’에 손을 걷고 나섰다.
천안함 사태 때는 미주 각 지역협의회와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희생 장병들을 위한 추모펀드 10만 달러를 보내왔고, 지난해 말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담 때는 G20 회원국에 있는 1.5세 혹은 2세 교포들을 행정 및 의전 자원봉사자로 참여시키기도 했다. 타히티에 지진 참사가 발생했을 때에도 해외 동포들과 함께 10만 달러를 모금해 유엔과 타히티에 전달했다.
1979년에 도미했으니 이민생활 32년. 그가 한국 사회에 조금씩 알려진 것은 최근의 행보 때문이겠으나, 사실 김 부의장은 미국 한인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저명인사다. 의류사업과 부동산사업 등으로 성공한 스토리도 유명하지만, 25년간 꾸준히 한인 유학생들을 지원해 온 감동 스토리 때문이기도 하다.
“1987년이 출발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동부나 서부로 유학 온 학생들은 넉넉한 집 자녀들이고, 텍사스 주처럼 중부 또는 중남부로 오는 학생들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박사과정이나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밟으러 온 나이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죠.
결혼해서 오거나 가족과 함께 오는 유학생들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형편들이 어려웠어요. 당시 한국서 의류를 수입해다 팔 때였는데, 우리 가게에 한국 유학생들을 파트타임으로 고용했어요. 학생들이 일을 잘해주니 장사도 잘 되고 해서 고마운 마음에 가게서 일하던 8명한테 용돈 삼아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지요.”
25년 전의 일이다. 당시 8명이 받은 ‘용돈’은 1인당 1000달러.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처음엔 8명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수혜자도 늘어갔고 물가가 오르니 장학금 액수도 늘어갔다. 김 부의장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10~15명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100% 사재로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수혜자들은 주로 텍사스주립대 알링턴(UT Arlington) 재학생들. 25년간 그의 ‘용돈’을 받은 학생들은 현재 미국과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매년 연말에 유학생과 그 가족들까지 초청해 마련하는 장학금 수여식을 겸한 디너파티도 어느 때부턴가 집이 아닌 식당을 빌려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장학금은 지난 세월 동안 ‘김영호 장학금’이라고 불렸다.
“25년간 사재로 운용하다 보니 세금 혜택도 못 받았고, (웃음) 재단을 설립해서 체계를 잡아두면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고 잘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디너파티를 할 때 오신 손님 가운데 장학금 기부 의사를 밝힌 분들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그 돈은 됐으니 다른 곳에 기부하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장학재단도 다른 분들한테 폐를 끼칠 수 없어 제 사재로 시작합니다. 그때 그 시절 유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도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나눠주면 줄수록 제 사업도 잘 되더라고요. 하하하.”
100만 달러로 시작하는 ‘김영호장학재단’은 현재 미국 내 재단설립 허가를 얻기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12세에 석탄 차 타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
댈러스에서 김 부의장은 ‘민주평통 부의장’이란 직함보다 ‘회장님’으로 더 잘 통한다. ‘영 트레이딩 코퍼레이션’이란 의류회사 대표와 9개의 쇼핑몰 건물을 소유·관리하는 부동산회사 대표, 미국 전역에 38개의 지점을 확보하고 있는 UCB(United Central Bank)의 주주이자 운영이사까지, 사업의 분야가 다양한 이유도 있지만 텍사스 주 댈러스에 대한항공의 첫 취항을 뚫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정도로 오지랖 넓은 전직 한인 ‘회장’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저희 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친구들하고 별별 에피소드가 다 있어요. 자궁외 임신이 된 아내 수술이 급한데 의료보험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학생을 대신해 병원에서 보증도 서 주고, 사네 못 사네 부부싸움 끝에 이혼한다는 유학생 부부를 불러다가 설득해서 화해도 시키고요.(웃음)
그런데 사실 어려운 학생들 도와준 것은 가난했던 저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합니다. 형제가 8남매였는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갈 돈이 없는 겁니다. 열두 살에 석탄 차 타고 무작정 서울로 돈 벌러 갔었지요.”
아직도 남아 있는 그의 경상도 사투리는 경북 상주의 그것이다. 상경 후 그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고학생 생활을 했다. 남의 집 일도 하고 회사 사환일도 하며 갖은 고생 끝에 결국 대학까지 마쳤다. 미국 이민은 미군에 근무했던 친형의 소개로 미8군에 근무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미 해군사령관의 양아들로 미국에 먼저 건너갔던 형은 미군부대 근무 3년쯤 될 때 그를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김 부의장의 나이 스물아홉. 한국 미8군에서 미국 현지 미 태평양극동사령부로 발령, 군무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미국 가면 월급도 많이 받을 줄 알았는데, 미 국방성 직원 월급이 얼마 안 되더라고요. (웃음) ‘이건 아닌데’ 싶었죠. 그래서 때려치우고 가발가게를 냈어요. 그런데 운이 없게도 가게가 있던 쇼핑센터에 불이 났어요.
다행히 우리 가게 직전에서 불길이 잡혔는데, 쇼핑몰에 손님이 뚝 끊겨버린 겁니다. 물건을 버릴 수는 없고, 벼룩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뜻밖에 잘 팔렸어요. 처음엔 가발만 팔다가 청바지도 팔고 했던 것이 의류 수출입회사로 성장하게 됐던 겁니다.”
이후 그의 비즈니스 라이프는 순풍에 돛단 듯 성장했고, 그는 현재 미국 7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댈러스에서 대표적인 한인 1세대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성공한 한인 사업가, 그 자양분은 ‘나눔’
댈러스 김 ‘회장님’의 하루 일과에서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활 수칙은 ‘새벽 5시 기상’이다.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는 두 자녀에게도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메시지 또한 ‘부지런하고 정직하라’는 것. 5시에 일어나 7시에 출근해 점심 전까지 모든 업무를 끝내는 것이 그의 시간 관리 비결이다.
“오후에는 또 오후대로 할 일이 많지요. 주로 봉사활동을 다니는데, 미국에도 거지가 많습니다. ‘홈리스(homeless)’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죠. 미국 세탁소는 손님이 옷을 맡기고 1년 동안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처분하게 돼 있는데, 그런 옷들도 모으러 다니고 저희 회사에서 팔고 남은 재고 점퍼랑 청바지도 모아두죠. 그랬다가 추수감사절에 보호소에 홈리스를 초청해서 식사도 대접하고 옷을 나눠주기도 하고요. 댈러스 한인사회에서는 이젠 정기행사처럼 자리를 잡았지요.”
하루 일과가 빠듯하다 보니 댈러스가 아닌 다른 도시에 있는 쇼핑몰 관리는 주로 주말을 이용한다. 주말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것도 아주 오래돼 버린 생활습관. 문득 저렇듯 억척스럽게 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두 자녀의 보다 보장된 미래를 위한 아버지의 희생일까.
“아하, 그건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돈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으니 몸에 밴 습관이죠. 제 자식들은 사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한번은 아들이랑 딸을 불러놓고 물어봤지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해 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큰놈인 아들은 공부시켜 주신 것으로 만족한다며 ‘노 땡큐(No, thank you)’라 그러고, 딸 역시도 재산 물려받는 것도 싫다고 해요. 그럼 엄마, 아빠가 가지고 있다고 사후에 전액 사회 환원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아이들이 흔쾌히 동의하더군요.”
김 부의장의 두 자녀는 현재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일을 하는 엘리트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자녀는 정작 ‘아버지 장학금’ 혜택에서는 예외였다는 것. 아들이 연 5만 달러가 넘는 대학원 학비를 직장에서 지원받자, 아버지는 그에 상응하는 돈을 옌볜(延邊) 교포학생들 돕는 데 쾌척했다.
1990년대 초 우연히 중국 옌볜에 갔다가 그곳 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TV 방송에서 한 학생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중국 교포들의 대학 학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방송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연락처를 알아내 장학금을 지원했던 학생은 칭화대(淸華大)를 졸업하고 현재 한국 고려대 대학원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학비는 물론 생활비 일체를 지원한 그 학생을 두고 그는 “아들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 교포유학생 지원도 시간이 흘러 5명 중에 벌써 3명은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끊임없는 나눔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지금까지 무에서 유를 만들었지요. 열두 살에 혼자 서울로 갔었고, 미국 가서도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했잖습니까, 하하. 저는 지금 이 나이에도 세계 어디를 가도 혼자 살아갈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 재산이 뭐가 필요합니까. 살아온 것 되돌아보면 저는 참 잡초 같았어요. 그러니 지금도 자신이 있지요.”
아름다운 꽃도 주변에 잡초가 없다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 했던가. 다른 사람의 삶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기 위한 그의 ‘잡초’ 같은 삶의 여정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다.
김영호
1949년생
1979년 도미
1992년 댈러스 한인회장
1996년 미 중남부 8개 한인연합회장
전미 한인회 수석부회장
세계한민족대표자회의 미주대표
1998년 민주평통 댈러스 협의회장
2009년~ 민주평통 북미주 부의장(14~15기)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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