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파괴적이다. 기존 강자와 옛 질서를 깨뜨리면서 등장한다. 소비의 최전선인 유통업계에서는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아마존Amazon이 불러온 유통 혁신은 100년 전통을 이어온 백화점 시어스Sears, 세계 1위 완구 회사 토이저러스Toysrus 등 유통 기업의 쇠락을 가져왔다. 빠르고 편리한 온라인 플랫폼이 오프라인 업체의 숨통을 조이는건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변은 있다. 온라인 시대에 오프라인만의 매력을 앞세워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가는 ‘반전의 영웅’들이다. 온라인 서점과 전자책의 공세 속에 무너지던 오프라인 서점 체인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오프라인 기반 유통업체가 온라인의 약점을 파고들어 역으로 테크기업을 위협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 새로움이 넘쳐난다. 이럴 때는 오히려 본질을 되짚는 게 해답이 될 수 있다.
뜻밖의 즐거움이 있는 장소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란 없다.” 지난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이 오프라인 서점 체인 ‘반스앤드노블Barnes and Noble’의 부활에 대해 남긴 말이다. 반스앤드노블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마존의 ‘전리품’ 취급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라인 유통 공룡’ 아마존의 출발이 다름 아닌 온라인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1994년 미국 시애틀의 한 차고에서 온라인서점으로 시작한 아마존은 가전, 의류, 식품 등 사업 영역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며 미국 전자상거래 시장의 압도적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존은 출판 시장과 독서 패턴 자체를 바꿔놓았다. 아마존은 2007년 전자책 전용 기기 ‘킨들Kindle’을 출시하며 전자책 시장의 성장을 이끌었다. 미국 출판업계 등에 따르면 미국에서 팔리는 책의 40%는 아마존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전자책의 경우 아마존의 점유율은 80%에 달한다.
오프라인 서점의 위기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미국 전역에 500개 이상 매장을 거느리던 미국 서점업계 2위 보더스Borders는 2011년 파산했고, 1873년 문을 연 역사적 서점 체인 반스앤드노블은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반스앤드노블은 2000년대 들어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2019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Elliot Management에 팔리기 직전 1년간 1억2,500만 달러(약 1,672억 원)에 달하는 순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외신들이 일제히 반스앤드노블의 부활을 외쳤다. 지난해에만 매장 20곳을 새로 열며 매장 수가 약 10년 만에 순증한 것이다. 제임스 돈트James Daunt CEO는 “우리는 이제 이익을 내고, (이로 인해) 다시 매장을 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선언했다. 반스앤드노블이 회생한 건 가장 서점다운 서점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기에 매장을 리모델링하며 이 기간을 기회로 활용했다. 2019년 취임한 돈트는 ‘본업에 집중한다’는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돈트는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히는 돈트 북스Daunt Books 창업자다. 그는 책이 안 팔리자 ‘벼룩시장’으로 변해버린 매장에서 잡화 진열대를 빼고 매장을 책 중심 공간으로 되돌려놓았다.
큐레이션 기능도 강화했다. 대형 서점은 보통 눈에 띄는 곳에 책을 진열하는 대가로 출판사로부터 돈을 받는다. 반스앤드노블은 이 수입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 대신 각 매장 직원에게 큐레이션 권한을 돌려줬다. 그러자 지역사회의 관심사에 맞는 특색 있는 책 추천이 가능해졌다.
또 지역 예술가와 협업해 서점을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아마존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반스앤드노블은 본업의 가치를 깨닫고 변화를 이끌었다. 책과 사람, 공간에 집중하면서 온라인 서점은 결코 줄 수 없는 재미와 발견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돈트는 “우리는 뜻밖의 행운과 즐거움을 느끼는 장소가 돼야한다. 그게 온라인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의 진정한 가치는 즐거움
아마존 제국에서 살아남은 또 다른 전사는 바로 월마트다. 온라인 시대에도 월마트는 승승장구 중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아마존의 총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5.7% 증가한 1,733억9,000만 달러(약 232조652억 원)를 기록했다. 시장 예상치(약 228조6,656억 원)를 웃도는 숫자다. 월마트가 주목한 건 온라인의 약점이었다. 온라인은 편리하고 빠르다. 그러나 친절할 수는 없다. 소비라는 행위가 즐거운 기억으로 남으려면 빠르고 편리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월마트는 ‘월마트 아카데미’를 만들고 직원 재교육을 강화했다. 매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경우의 수를 예상해 적절한 응대법을 교육시켰고, 온라인 서비스와 접목했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고객이 차량에 탄채 매장에서 물건을 찾아갈 수 있도록 했고, 쇼핑 후 주차된 고객의 차 트렁크까지 물건을 갖다주는 고객 맞춤형 쇼핑 도우미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도 도입했다.
온라인 기업으로부터 배울 점은 배웠다. 심지어 “월마트가 구글을 위협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월마트는 자사 앱에 생성형 AI 검색 기능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구글을 통하지 않고 물건을 검색하거나 구매하면 구글의 광고 수익이나 트래픽 등 업계 영향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월마트는 TV 제조사 비지오Visio도 인수했는데, ‘아마존의 광고 부문과 경쟁하려는 시도’라는 것이 외신들의 평가다. 물론 아마존은 가만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아마존과 월마트는 서로를 치열하게 모방하는 중이다. 온라인 유통강자 아마존은 미국 최대 유기농 식품업체 홀푸드 마켓Whole Foods Market을 인수하며 오프라인을 강화하고, 오프라인 강자 월마트는 제트닷컴 등 온라인 업체를 인수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 온라인 유통 기업의 오프라인 공략법은 ‘소형화’, ‘전문화’로 요약할 수 있다. 고객의 일상에 더 가까이, 타깃에 더 정확하게 다가가겠다는 것이다. 아마존 홀푸드는 올해 뉴욕에 첫 번째 소규모 매장 ‘홀푸드 마켓 데일리숍’을 연다. 기존 홀푸드 매장보다 절반 이상 작은 규모에 엄선된 제품과 자체 브랜드 상품을 판매다는 구상이다.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은 따분하게 들린다. 대학 수학능력시험 고득점 비결을 묻자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고 답하는 수험생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기본에 충실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30여 년 전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든 것을 바꿔라”라며 호통쳤을 때, 그 경영 혁신의 방향이란 결국 ‘전자제품 회사는 불량 없는, 믿을 수 있는 제품을 팔아야 한다’는 가장 본질적인 주문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CEO가 신경영 선언까지 해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는 뜻이다. 그리고 수십 년 뒤 그 본질에 집중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현재 스마트폰 시장에서 차지한 위치를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세계적 리더들의 인생을 바꾼 최고의 질문 다섯 가지를 꼽으면 제일 첫 번째로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제시했다.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되짚는 데서 모든 게 출발한다는 깨달음은 CEO에게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 구은서(문화 칼럼니스트)
출처. 미래에셋증권 매거진(바로가기_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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