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옥상 & 디자이너 이상봉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을 제작한 임옥상 작가는 한국 민중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다. 임 작가는 ‘미술은 자연의 부름, 역사의 소리, 윤리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8월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 동네 주민이자 오랜 지기인 디자이너 이상봉이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예술은 왜 중요한가. 이에 대해 1967년 독일 연방의회는 다음과 같이 그 해답을 찾았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성을 표현하며 추구할 만한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대체 불가능한 정신적 의미를 지닌다.’
예술에 대한 이 같은 정의의 연장선에서 현대의 예술가는 예술로서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이며 부단히 나은 사회를 희구해야 할 책무를 가진다. 이 대목에 이르면 바로 생각나는 이가 임옥상이다.”
![[Friends]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의 정겨운 이야기](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5234.1.jpg)
임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 여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도로를 촉촉이 적셨다. 평창동에 자리한 임옥상미술연구소는 3층 건물의 2층을 쓰고 있었다. 연구소에 들어서자 한편에 작업 중인 회화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200호는 족히 될 법한 유화 작품을 보는 사이 3층 살림집에서 그가 내려왔다.
인사와 함께 이상봉 선생이 일이 생겨 작업실을 일찍 나서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임 작가는 “그 친구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디자이너일 거야”라며 웃었다. 자신도 전날 홍콩에서 돌아왔다고 근황을 전했다. 가나화랑을 통해 알게 된 작가 고영훈, 박영남, 사석원 등과 부부 동반으로 중국과 홍콩을 돌고 왔다고 했다.
지난해에도 베이징 비엔날레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을 찾았었다. 지난해와 올해 중국과 홍콩을 보며 임 작가는 부러움이 앞선다고 했다. 경제와 함께 급성장한 중국의 미술시장이 부러운 것이다.
경제 성장에 비해 답보 상태인 한국의 미술시장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하다. 그는 ‘돈이면 다’라는 생각이 문제라며, 언제쯤 그 자리에 문화와 교양이 자리 잡을지 앞이 안 보인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발전하고 작가는 전시를 이어가야 한다. 올 8월 예정인 전시는 크게 흙, 돌, 쇠, 물, 살 등 5원소를 주제로 잡았다. 5원소의 중심에 흙이 있다. 첫 전시 후 25년 가까이 임 작가는 흙을 사회로 봤다.
그가 사회적 문제에 천착한 이유다. 지금은 흙(사회)에서 대지(우주)로 고민이 확장됐다. 임 작가의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디자이너 이상봉이 비를 뚫고 작업실 문으로 들어섰다.
![딱히 뭘 그리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그리기 시작했다. 색깔은 색깔을 부르고 모양은 모양을 부른다. 이리 가라 저리 오라 그래도 길은 있다. [나는 동사(verb)다], 캔버스, 2011년, 5.6×1.5m](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5235.1.jpg)
이상봉(이하 이): 같은 동네 사니까 자주 보죠. 평창동엔 제가 먼저 터를 잡았고, 임 선생님이 저보다 늦게 왔죠. 작업실을 평창동으로 옮긴 후에 처음 만났으니까요.
임: 아까도 잠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정확한 기억이 없어요.
이: 저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선생님이 평창동으로 오신 후에 제가 작업실을 찾아가서 만났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갤러리 아트사이드 이동재 대표를 통해 선생님을 알고 있었죠. 이동재 선생님 의상을 해드렸더니 그 대가로 그림을 주셨거든요. 두 분 작품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는데, 제가 선생님 작품을 골랐거든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작품으로 먼저 만난 거죠.
임: 무슨 작품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데….
이: 판화였어요. <남녀호응도>라는 제목이 붙은…. 폭이 1m, 높이가 1.8m나 되는 대작입니다.
임: 그 작품 갖고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걸 갖고 계시군요.
이: 그 뒤에 아는 분을 통해서 선생님을 만났죠. 저는 평창동으로 이사온 지 20년이 넘습니다만, 그렇다고 텃세를 부리진 않았죠?(웃음)
임: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선생이 평창동에 20년 넘게 살아도 집에 있었던 시간은 얼마 안 되잖아. 거의 강남 작업실에 계시잖아요.
이: 여기서 강남 가는 데 차 막히면 2시간 가까이 걸리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낮에 평창동에 있는 건 집에 불이 났을 때 이후로 오늘이 두 번째일 거예요. 임 선생님 인터뷰라니까 무리해서 찾아온 거죠.(웃음)
임: 이전에 저도 이 선생 인터뷰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 있어요. 이상봉이 인터뷰 한다니까 나간 거지, 나도 잘 안 나가요. 그러니까 품앗이라고 칩시다.(웃음)
이: 네. 그러시죠.
임: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주 만나요. 서로 생일 파티도 열어주고. 그전에 이 선생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제가 결혼을 두 번 했어요. 두 번째 결혼식 때 이 선생이 신부 드레스를 만들어준 인연이 있어요.
이: 그게 2004년이었죠? 사실 제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웨딩드레스는 안 만들어요. 초창기에 유명한 연예인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준 적이 있는데, 얼마 못가서 그분이 이혼을 했어요. 웨딩드레스에 나쁜 기운이 들어가서 이혼을 했나 하는 자책도 들었어요.
그 뒤로 웨딩드레스는 안 만들었어요. 딱 두 번 예외가 있었어요. 한 번은 제 딸을 위해 만들었고, 또 한 번이 임 선생님 결혼식을 위해 만들었어요.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내가 해야겠다’ 싶었어요. 둘 다 제가 아는 분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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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제로는 임 선생님이 저보다 선배세요.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저는 친구라고 생각해요. 임 선생님이 전시회를 할 때도 화환에 ‘이상봉과 친구들’이라고 써서 보내거든요. 디자이너 초창기에 미국에서 사귄 유대인 변호사가 있어요. 저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데도 저를 “친구, 친구”하며 잘 지냈어요. 그 뒤로 친구라는 게 참 좋더라고요.
임: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웨딩드레스까지 만들어줬는데….(웃음) 사실 제가 일반적인 웨딩드레스를 아주 싫어하거든요. 그 웨딩드레스는 단아하면서도 샤프한 느낌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웨딩드레스가 이런 느낌을 줄 수 있구나’ 다시 생각하게 됐죠.
이: 웨딩드레스도 그렇고, 결혼식이 정말 드라마틱했다고 하던데요.
임: 여행 중에 결혼식을 올렸거든요. 같이 간 멤버가 몇 있었는데 결혼식 한다는 사실을 안 건 건축가 승효상과 시인 박노해밖에 없었어요. 프랑스 여행 중에 시골에 있는 성당에 도착했는데, 제가 “저기서 결혼식 할 거다”라고 했죠.
평소에 제가 농담을 잘 하니까 사람들이 전부 농담으로 들었어요. 그럴 법도 한 게 나도 웨딩드레스 말고는 준비해 간 게 없어요.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분들이 들꽃을 꺾어 와서 부케를 만들고 승효상이 즉석에서 주례 겸 사회를 보고, 다른 분이 축가를 부르고 그랬어요. 눈물 나는 결혼식이었어요.
이: 예식장이 중세풍의 성당이었으면 무척 고풍스러웠겠어요.
임: 성당에 달린 10평 남짓한 크기의 방이었어요. 크기는 작아도 하늘에서 햇빛이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 여행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임: 사회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박노해가 수도원 기행을 제안했어요. 건축하면 승효상이니까 그 친구가 여러 수도원을 조사하면서 수도원 순례가 시작된 거죠. 결혼식을 올린 성당은 ‘라 투레트(La Tourette)’라는 성당인데, 낭트에서 산골로 들어간 마을에 있었어요.
시골의 작은 성당이지만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작품으로 그의 건축에서 전환점이 된 곳이라고 하더군요. 거기서 제 삶과 작품도 전환점을 맞았으니까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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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렇게 보였어요? 이 선생이 그렇게 봤다면 진짜 그런 건데….
이: 선생님을 뵙기 전에 작품을 먼저 봤잖아요. 선생님 작품을 보고 첫 느낌이 ‘세다’였어요.
임: 언제 제 작품을 처음 보셨어요?
이: 1회 광주비엔날레였어요. 의상전에 참가하기 위해 갔다가 선생님 작품을 처음 봤어요. 그때만 해도 선생님이 사회문제에 천착할 때였으니까 ‘세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결혼 후에는 사랑이 주요 테마가 된 듯한 느낌이에요. 색감도 그렇고요.
임: 변하긴 했죠. 예전의 꽃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죠.(웃음) 저는 변하지 않는 예술가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예술가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그림뿐 아니라 글도 바뀌셨어요.
임: 그런 걸, 이 선생이 느꼈다니 놀랍기도 하네요. 그동안 내 작품을 유심히 안 보는 줄 알았거든.(웃음) 앞서 제가 흙에서 대지로, 작품이 영역을 넓혀간다고 했잖아요. 그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사회문제에 천착한 것도 결국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바탕에 깐 거니까요.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개념이 좀 더 확장됐다고 할까요.

임: 그래서 제가 연하장을 보내잖아요. 전시회 쉴 때 저희 같은 사람들 잊어버릴까 봐요.
이: 보내주신 연하장 모두 보관하고 있어요. 임 선생님 연하장은 특별하거든요. 직접 판화 작업을 한 작품을 보내주시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웨딩드레스, 고맙다고 주신 선생님 작품과 함께 제 중요한 소장품 중 하나예요.
임: 무슨 작품이었죠. 그때 드린 게.
이: 페인팅 작품이었는데 말 안 할래요. 아주 나중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요.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작품을 보겠습니다. 임 선생님이 제게는 정말 소중한 분이거든요. 일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지만 정기적으로 만나는 분은 임 선생님을 포함해 몇 안 되거든요.
임: 그 멤버들이 모여서 매년 연말 파티를 해요. 그게 벌써 몇 년이나 됐죠.
이: 정확히 세 보지는 않았지만 꽤 됐죠. 150~200명 정도 참석하는 파티인데요,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호화롭지 않은 파티예요. 쇳대박물관 같은 곳에서 돈도 별로 안들이고 하는데, 그 느낌이 참 좋아요.
이야기가 끝날 즈음 디자이너 이상봉이 여의도에서 촬영이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상봉은 작업실 앞마당을 바라봤다. 마침 초여름비가 잦아든 후 찾아온 햇살이 작은 뜰 안을 채웠다. 그 모습에 취한 듯 이상봉이 “여기서 파티를 해도 되겠어요”라고 제안했고, 임 작가는 “그것도 좋죠”라고 응대했다. 자연스레 다음 파티 장소를 정한 두 사람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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