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옥상 & 디자이너 이상봉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을 제작한 임옥상 작가는 한국 민중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다. 임 작가는 ‘미술은 자연의 부름, 역사의 소리, 윤리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8월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 동네 주민이자 오랜 지기인 디자이너 이상봉이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작가 임옥상(왼쪽)과 디자이너 이상봉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작가 임옥상(왼쪽)과 디자이너 이상봉
임옥상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가다. 민중예술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왔지만 이후 보여준 다양한 작품 경향은 미술예술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임 작가와 오랜 교류를 이어온 건축가 승효상은 그의 예술이 한갓 민중예술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현대의 정통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예술은 왜 중요한가. 이에 대해 1967년 독일 연방의회는 다음과 같이 그 해답을 찾았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성을 표현하며 추구할 만한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대체 불가능한 정신적 의미를 지닌다.’

예술에 대한 이 같은 정의의 연장선에서 현대의 예술가는 예술로서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이며 부단히 나은 사회를 희구해야 할 책무를 가진다. 이 대목에 이르면 바로 생각나는 이가 임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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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말은 임옥상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현대미술에서 점하는 위치가 어느 곳인지 짐작하게 한다. 승효상의 말이 아니더라도 작가 임옥상은 “예술이라는 숙명적 도구를 통해 우리의 선함과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되새기게 하는 지식인”임에 틀림없다.

임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 여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도로를 촉촉이 적셨다. 평창동에 자리한 임옥상미술연구소는 3층 건물의 2층을 쓰고 있었다. 연구소에 들어서자 한편에 작업 중인 회화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200호는 족히 될 법한 유화 작품을 보는 사이 3층 살림집에서 그가 내려왔다.

인사와 함께 이상봉 선생이 일이 생겨 작업실을 일찍 나서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임 작가는 “그 친구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디자이너일 거야”라며 웃었다. 자신도 전날 홍콩에서 돌아왔다고 근황을 전했다. 가나화랑을 통해 알게 된 작가 고영훈, 박영남, 사석원 등과 부부 동반으로 중국과 홍콩을 돌고 왔다고 했다.

지난해에도 베이징 비엔날레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을 찾았었다. 지난해와 올해 중국과 홍콩을 보며 임 작가는 부러움이 앞선다고 했다. 경제와 함께 급성장한 중국의 미술시장이 부러운 것이다.

경제 성장에 비해 답보 상태인 한국의 미술시장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하다. 그는 ‘돈이면 다’라는 생각이 문제라며, 언제쯤 그 자리에 문화와 교양이 자리 잡을지 앞이 안 보인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발전하고 작가는 전시를 이어가야 한다. 올 8월 예정인 전시는 크게 흙, 돌, 쇠, 물, 살 등 5원소를 주제로 잡았다. 5원소의 중심에 흙이 있다. 첫 전시 후 25년 가까이 임 작가는 흙을 사회로 봤다.

그가 사회적 문제에 천착한 이유다. 지금은 흙(사회)에서 대지(우주)로 고민이 확장됐다. 임 작가의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디자이너 이상봉이 비를 뚫고 작업실 문으로 들어섰다.
딱히 뭘 그리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그리기 시작했다. 색깔은 색깔을 부르고 모양은 모양을 부른다. 이리 가라 저리 오라 그래도 길은 있다. [나는 동사(verb)다], 캔버스, 2011년, 5.6×1.5m
딱히 뭘 그리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그리기 시작했다. 색깔은 색깔을 부르고 모양은 모양을 부른다. 이리 가라 저리 오라 그래도 길은 있다. [나는 동사(verb)다], 캔버스, 2011년, 5.6×1.5m
임옥상(이하 임) : 어, 오셨어요. 같은 동네 살아도 낮에 보기는 거의 처음인 거 같은데요. 저녁에 파티를 자주 하는데 이 선생은 그때도 10시가 넘어야 도착해.

이상봉(이하 이): 같은 동네 사니까 자주 보죠. 평창동엔 제가 먼저 터를 잡았고, 임 선생님이 저보다 늦게 왔죠. 작업실을 평창동으로 옮긴 후에 처음 만났으니까요.

임: 아까도 잠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정확한 기억이 없어요.

이: 저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선생님이 평창동으로 오신 후에 제가 작업실을 찾아가서 만났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갤러리 아트사이드 이동재 대표를 통해 선생님을 알고 있었죠. 이동재 선생님 의상을 해드렸더니 그 대가로 그림을 주셨거든요. 두 분 작품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는데, 제가 선생님 작품을 골랐거든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작품으로 먼저 만난 거죠.

임: 무슨 작품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데….

이: 판화였어요. <남녀호응도>라는 제목이 붙은…. 폭이 1m, 높이가 1.8m나 되는 대작입니다.

임: 그 작품 갖고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걸 갖고 계시군요.

이: 그 뒤에 아는 분을 통해서 선생님을 만났죠. 저는 평창동으로 이사온 지 20년이 넘습니다만, 그렇다고 텃세를 부리진 않았죠?(웃음)

임: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선생이 평창동에 20년 넘게 살아도 집에 있었던 시간은 얼마 안 되잖아. 거의 강남 작업실에 계시잖아요.

이: 여기서 강남 가는 데 차 막히면 2시간 가까이 걸리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낮에 평창동에 있는 건 집에 불이 났을 때 이후로 오늘이 두 번째일 거예요. 임 선생님 인터뷰라니까 무리해서 찾아온 거죠.(웃음)

임: 이전에 저도 이 선생 인터뷰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 있어요. 이상봉이 인터뷰 한다니까 나간 거지, 나도 잘 안 나가요. 그러니까 품앗이라고 칩시다.(웃음)

이: 네. 그러시죠.

임: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주 만나요. 서로 생일 파티도 열어주고. 그전에 이 선생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제가 결혼을 두 번 했어요. 두 번째 결혼식 때 이 선생이 신부 드레스를 만들어준 인연이 있어요.

이: 그게 2004년이었죠? 사실 제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웨딩드레스는 안 만들어요. 초창기에 유명한 연예인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준 적이 있는데, 얼마 못가서 그분이 이혼을 했어요. 웨딩드레스에 나쁜 기운이 들어가서 이혼을 했나 하는 자책도 들었어요.

그 뒤로 웨딩드레스는 안 만들었어요. 딱 두 번 예외가 있었어요. 한 번은 제 딸을 위해 만들었고, 또 한 번이 임 선생님 결혼식을 위해 만들었어요.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내가 해야겠다’ 싶었어요. 둘 다 제가 아는 분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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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저야 고마울 따름이죠.

이: 실제로는 임 선생님이 저보다 선배세요.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저는 친구라고 생각해요. 임 선생님이 전시회를 할 때도 화환에 ‘이상봉과 친구들’이라고 써서 보내거든요. 디자이너 초창기에 미국에서 사귄 유대인 변호사가 있어요. 저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데도 저를 “친구, 친구”하며 잘 지냈어요. 그 뒤로 친구라는 게 참 좋더라고요.

임: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웨딩드레스까지 만들어줬는데….(웃음) 사실 제가 일반적인 웨딩드레스를 아주 싫어하거든요. 그 웨딩드레스는 단아하면서도 샤프한 느낌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웨딩드레스가 이런 느낌을 줄 수 있구나’ 다시 생각하게 됐죠.

이: 웨딩드레스도 그렇고, 결혼식이 정말 드라마틱했다고 하던데요.

임: 여행 중에 결혼식을 올렸거든요. 같이 간 멤버가 몇 있었는데 결혼식 한다는 사실을 안 건 건축가 승효상과 시인 박노해밖에 없었어요. 프랑스 여행 중에 시골에 있는 성당에 도착했는데, 제가 “저기서 결혼식 할 거다”라고 했죠.

평소에 제가 농담을 잘 하니까 사람들이 전부 농담으로 들었어요. 그럴 법도 한 게 나도 웨딩드레스 말고는 준비해 간 게 없어요.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분들이 들꽃을 꺾어 와서 부케를 만들고 승효상이 즉석에서 주례 겸 사회를 보고, 다른 분이 축가를 부르고 그랬어요. 눈물 나는 결혼식이었어요.

이: 예식장이 중세풍의 성당이었으면 무척 고풍스러웠겠어요.

임: 성당에 달린 10평 남짓한 크기의 방이었어요. 크기는 작아도 하늘에서 햇빛이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 여행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임: 사회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박노해가 수도원 기행을 제안했어요. 건축하면 승효상이니까 그 친구가 여러 수도원을 조사하면서 수도원 순례가 시작된 거죠. 결혼식을 올린 성당은 ‘라 투레트(La Tourette)’라는 성당인데, 낭트에서 산골로 들어간 마을에 있었어요.

시골의 작은 성당이지만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작품으로 그의 건축에서 전환점이 된 곳이라고 하더군요. 거기서 제 삶과 작품도 전환점을 맞았으니까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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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말 드라마틱한 결혼식이었네요. 그 뒤로 제가 볼 때는 선생님 작품도 변화가 있었던 듯해요.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 변하신 듯도 하고요.

임: 그렇게 보였어요? 이 선생이 그렇게 봤다면 진짜 그런 건데….

이: 선생님을 뵙기 전에 작품을 먼저 봤잖아요. 선생님 작품을 보고 첫 느낌이 ‘세다’였어요.

임: 언제 제 작품을 처음 보셨어요?

이: 1회 광주비엔날레였어요. 의상전에 참가하기 위해 갔다가 선생님 작품을 처음 봤어요. 그때만 해도 선생님이 사회문제에 천착할 때였으니까 ‘세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결혼 후에는 사랑이 주요 테마가 된 듯한 느낌이에요. 색감도 그렇고요.

임: 변하긴 했죠. 예전의 꽃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죠.(웃음) 저는 변하지 않는 예술가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예술가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그림뿐 아니라 글도 바뀌셨어요.

임: 그런 걸, 이 선생이 느꼈다니 놀랍기도 하네요. 그동안 내 작품을 유심히 안 보는 줄 알았거든.(웃음) 앞서 제가 흙에서 대지로, 작품이 영역을 넓혀간다고 했잖아요. 그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사회문제에 천착한 것도 결국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바탕에 깐 거니까요.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개념이 좀 더 확장됐다고 할까요.
이상봉은 작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얻은 후 작품의 경향이 바뀌었다고 했다. 작가는 친구의 말이 맞다고 인정한 후 작품 영역이 보다 확장된 듯하다고 부연했다.
이상봉은 작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얻은 후 작품의 경향이 바뀌었다고 했다. 작가는 친구의 말이 맞다고 인정한 후 작품 영역이 보다 확장된 듯하다고 부연했다.
이: 작품이 변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같은 디자이너들은 순수예술하시는 분들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디자이너들은 1년에 2번은, 패션쇼 준비하느라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6개월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일에 매달려야 하는 거죠. 언젠가는 저도 그런 위치에 서지 않을까 기대는 해봐요.

임: 그래서 제가 연하장을 보내잖아요. 전시회 쉴 때 저희 같은 사람들 잊어버릴까 봐요.

이: 보내주신 연하장 모두 보관하고 있어요. 임 선생님 연하장은 특별하거든요. 직접 판화 작업을 한 작품을 보내주시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웨딩드레스, 고맙다고 주신 선생님 작품과 함께 제 중요한 소장품 중 하나예요.

임: 무슨 작품이었죠. 그때 드린 게.

이: 페인팅 작품이었는데 말 안 할래요. 아주 나중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요.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작품을 보겠습니다. 임 선생님이 제게는 정말 소중한 분이거든요. 일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지만 정기적으로 만나는 분은 임 선생님을 포함해 몇 안 되거든요.

임: 그 멤버들이 모여서 매년 연말 파티를 해요. 그게 벌써 몇 년이나 됐죠.

이: 정확히 세 보지는 않았지만 꽤 됐죠. 150~200명 정도 참석하는 파티인데요,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호화롭지 않은 파티예요. 쇳대박물관 같은 곳에서 돈도 별로 안들이고 하는데, 그 느낌이 참 좋아요.

이야기가 끝날 즈음 디자이너 이상봉이 여의도에서 촬영이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상봉은 작업실 앞마당을 바라봤다. 마침 초여름비가 잦아든 후 찾아온 햇살이 작은 뜰 안을 채웠다. 그 모습에 취한 듯 이상봉이 “여기서 파티를 해도 되겠어요”라고 제안했고, 임 작가는 “그것도 좋죠”라고 응대했다. 자연스레 다음 파티 장소를 정한 두 사람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