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은 음악의 도시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브람스, 그리고 말러가 활동한 곳이 빈이다. 이런 이유로 오히려 다른 분야의 훌륭한 예술적 가치들은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물론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와 에곤 실레 등의 화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19세기 파리와 런던에서 일었던 디자인 혁신운동에 못지않은, 오히려 그보다 더 개성 넘치고 세련된 빈 공방의 디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황금빛 예술과 여유로운 문화의 이중주, 빈](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5334.1.jpg)
당시 빈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의 중심지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200만 인구의 국제도시로서 빈은 이미 철도가 운행되고 자동차 등 현대 사회로서의 틀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또한 빈의 카페와 살롱에서는 철학과 과학, 심리학, 전위 문학가들의 지적인 대화로 활기가 넘쳤다.

1848년 왕위를 계승한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가 다스리던 19세기 말에 이르러,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제국의 실상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이룩한 파리 개조 프로젝트를 모방해 1860년대 건설된 환상(環狀) 도로인 링 스트라세(Ring strasse)는 제국의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오래된 도시를 말발굽 형태로 싸고도는 간선도로 링 스트라세 주변에는 국회의사당, 오페라 하우스, 극장, 교회, 박물관 등 호화로운 공공건물들이 지어졌지만 건물들은 고전주의,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과 같은 과거의 영광스런 양식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했다. 후에 이 시대는 리바이벌 시대 혹은 절충시대라 부르게 된다.
세련되고 부유한 중산층들이 살고 있는 도로 안쪽과는 달리 바깥쪽으로는 말단 군인, 상점 점원, 공장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유럽 최악의 빈민가가 형성됐다. 이는 빈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가 산업화되면서 겪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상대적 빈곤은 결국 대다수의 하층민들을 절망케 했다.
미술계 역시 파리에서처럼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1861년 창립돼 대다수 화가들이 속한 ‘빈 미술가연맹(Genossenschaft bildender Kunstler Wiens·Kunstlerhaus)’은 빈의 유일한 전시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보수적인 전시위원회는 공공기관의 공식적인 인정과 후원을 얻어내고자 안이하고 정치적인 전시회를 조직하는 데 급급했다.

세상은 그들을 분리파라고 불렀다. 분리파(secession)라는 용어는 ‘분리된 서민(secessio plebis)’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사에 따르면, 특권 귀족계급 (partiscius)의 지배에 저항하는 로마의 서민계급(plebis)이 도시 외곽에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러한 저항의 몸짓이 바로 ‘분리’를 의미했다.
이처럼 제도권에서 탈퇴함으로써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총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분리’의 움직임이 19세기 말 유럽의 젊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독일의 뮌헨 분리파(1892), 베를린 분리파(1898), 그리고 빈 분리파(1897)를 꼽을 수 있다.
신성한 봄, 베르 스크럼

빈에서는 사각의 격자 속에 비너 베르크슈태테(Wiener Werkstatte)를 자주 목도하게 된다. 이는 빈 공방이라는 뜻으로 모저의 의지가 담긴 브랜드인 셈이다. 모저는 화가 겸 장식예술가였다.
1885년 빈미술아카데미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공부했으며 1888년부터 그는 렌베그(Rennweg)에 개인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때에는 주로 빈 패션잡지를 위해 패션 디자인과 삽화를 그렸다.
1892년 그는 빈응용미술대로 옮겨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1894년에는 뜻이 통하는 젊은 화가들과 토론 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에 일곱 명으로 시작해 이를 지베너클럽(Siebener klub)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주로 링 슈트라세에 있는 카페 슈페를(Cafe Sperl)에서 모였다. 이 모임은 1897년 설립된 빈 제체시온의 모체로 옮겨간다. 이때 모인 아티스트들이 오토 바그너, 호프만, 아돌프 로스, 올브리히, 클림트 등이었다. 이는 베를린 제체시온과 뮌헨 제체시온의 모델이 됐다.
모저는 1904년 제체시온에서 떨어져 나와 비너 베르크슈태테를 결성했다. 비너 베르크슈태테, 즉 빈 공방은 우수 공예품 제작을 모토로 했으며 공예품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제작자의 마크를 표시토록 했다. 모저의 작품은 흑과 백의 그리드(grid) 패턴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 선두에서 존 러스킨과 모리스가 실천적 선언으로 선두에 나선다. 이 흐름은 결국 전 유럽과 빈의 예술가들에게도 철학적 각성을 제시한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영향에도 빈만의 고전적 전통이 녹아 있는 공예품, 디자인과 그림들은 높은 안목의 컬렉터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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