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예술의 도시, 빈

빈은 음악의 도시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브람스, 그리고 말러가 활동한 곳이 빈이다. 이런 이유로 오히려 다른 분야의 훌륭한 예술적 가치들은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물론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와 에곤 실레 등의 화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19세기 파리와 런던에서 일었던 디자인 혁신운동에 못지않은, 오히려 그보다 더 개성 넘치고 세련된 빈 공방의 디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황금빛 예술과 여유로운 문화의 이중주, 빈
나폴레옹 이후 유럽은 영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구 세력이 갈등을 겪거나 자국의 영토에서 크고 작은 분쟁적 성격의 정쟁을 치르고 있었다. 빈 역시 복고적인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가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팽배해 있었다.

당시 빈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의 중심지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200만 인구의 국제도시로서 빈은 이미 철도가 운행되고 자동차 등 현대 사회로서의 틀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또한 빈의 카페와 살롱에서는 철학과 과학, 심리학, 전위 문학가들의 지적인 대화로 활기가 넘쳤다.
1 클림트가 베르 스크럼에 삽화로 그린 누드 드로잉(좌), 2 모저의 남성 누드 드로잉(우)
1 클림트가 베르 스크럼에 삽화로 그린 누드 드로잉(좌), 2 모저의 남성 누드 드로잉(우)
기존 권력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다

1848년 왕위를 계승한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가 다스리던 19세기 말에 이르러,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제국의 실상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이룩한 파리 개조 프로젝트를 모방해 1860년대 건설된 환상(環狀) 도로인 링 스트라세(Ring strasse)는 제국의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오래된 도시를 말발굽 형태로 싸고도는 간선도로 링 스트라세 주변에는 국회의사당, 오페라 하우스, 극장, 교회, 박물관 등 호화로운 공공건물들이 지어졌지만 건물들은 고전주의,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과 같은 과거의 영광스런 양식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했다. 후에 이 시대는 리바이벌 시대 혹은 절충시대라 부르게 된다.

세련되고 부유한 중산층들이 살고 있는 도로 안쪽과는 달리 바깥쪽으로는 말단 군인, 상점 점원, 공장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유럽 최악의 빈민가가 형성됐다. 이는 빈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가 산업화되면서 겪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상대적 빈곤은 결국 대다수의 하층민들을 절망케 했다.

미술계 역시 파리에서처럼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1861년 창립돼 대다수 화가들이 속한 ‘빈 미술가연맹(Genossenschaft bildender Kunstler Wiens·Kunstlerhaus)’은 빈의 유일한 전시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보수적인 전시위원회는 공공기관의 공식적인 인정과 후원을 얻어내고자 안이하고 정치적인 전시회를 조직하는 데 급급했다.
3 베르 스크럼의 표지 제호. 아르누보의 선형을 느끼게 한다.(좌),4 모저가 그린 금붕어와 수초(우)
3 베르 스크럼의 표지 제호. 아르누보의 선형을 느끼게 한다.(좌),4 모저가 그린 금붕어와 수초(우)
또한 그 독점적 지위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의 전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자 1897년 4월, 당시 35세의 클림트는 빈 미술가연맹에 서한을 보내고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1868~1918),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1870~1956), 요제프 올브리히(Joseph Olbrich·1867~1908) 등 19명의 젊은 작가와 함께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Vereinigung bildender Kunstler osterreichs)’ 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기존의 보수 세력과 분리를 선언한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분리파라고 불렀다. 분리파(secession)라는 용어는 ‘분리된 서민(secessio plebis)’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사에 따르면, 특권 귀족계급 (partiscius)의 지배에 저항하는 로마의 서민계급(plebis)이 도시 외곽에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러한 저항의 몸짓이 바로 ‘분리’를 의미했다.

이처럼 제도권에서 탈퇴함으로써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총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분리’의 움직임이 19세기 말 유럽의 젊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독일의 뮌헨 분리파(1892), 베를린 분리파(1898), 그리고 빈 분리파(1897)를 꼽을 수 있다.

신성한 봄, 베르 스크럼
5 빈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탁상시계. 상앗빛 몸체에 절제된 색상의 장식이 돋보인다. 1900년 모저가 디자인했다.
5 빈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탁상시계. 상앗빛 몸체에 절제된 색상의 장식이 돋보인다. 1900년 모저가 디자인했다.
모저는 제체시온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베르 스크럼(Ver scrum)에 그가 창안한 수많은 디자인 작품을 소개했다. 그는 실로 여러 가지를 디자인했다. 가구, 유리제품, 보석류, 가죽제품, 섬유제품, 서적의 제본, 심지어는 장난감도 디자인했다.

빈에서는 사각의 격자 속에 비너 베르크슈태테(Wiener Werkstatte)를 자주 목도하게 된다. 이는 빈 공방이라는 뜻으로 모저의 의지가 담긴 브랜드인 셈이다. 모저는 화가 겸 장식예술가였다.

1885년 빈미술아카데미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공부했으며 1888년부터 그는 렌베그(Rennweg)에 개인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때에는 주로 빈 패션잡지를 위해 패션 디자인과 삽화를 그렸다.

1892년 그는 빈응용미술대로 옮겨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1894년에는 뜻이 통하는 젊은 화가들과 토론 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에 일곱 명으로 시작해 이를 지베너클럽(Siebener klub)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주로 링 슈트라세에 있는 카페 슈페를(Cafe Sperl)에서 모였다. 이 모임은 1897년 설립된 빈 제체시온의 모체로 옮겨간다. 이때 모인 아티스트들이 오토 바그너, 호프만, 아돌프 로스, 올브리히, 클림트 등이었다. 이는 베를린 제체시온과 뮌헨 제체시온의 모델이 됐다.

모저는 1904년 제체시온에서 떨어져 나와 비너 베르크슈태테를 결성했다. 비너 베르크슈태테, 즉 빈 공방은 우수 공예품 제작을 모토로 했으며 공예품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제작자의 마크를 표시토록 했다. 모저의 작품은 흑과 백의 그리드(grid) 패턴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모저의 장엄한 고전적 모티브를 살린 스테인드글라스
모저의 장엄한 고전적 모티브를 살린 스테인드글라스
이미 영국에서는 ‘예술의 사회화’를 주창하는 그룹이 등장해 대중도 일용할 양식처럼 예술을 호흡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 선두에서 존 러스킨과 모리스가 실천적 선언으로 선두에 나선다. 이 흐름은 결국 전 유럽과 빈의 예술가들에게도 철학적 각성을 제시한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영향에도 빈만의 고전적 전통이 녹아 있는 공예품, 디자인과 그림들은 높은 안목의 컬렉터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격자 모자이크의 연결로 이루어진 암체어로서 인기 있는 모저 디자인 중 하나다.
격자 모자이크의 연결로 이루어진 암체어로서 인기 있는 모저 디자인 중 하나다.
집무용 테이블로서 실버 장식을 통해 목재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고 고급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집무용 테이블로서 실버 장식을 통해 목재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고 고급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김재규 _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