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Special] 디자인 경영으로 기아차 부활 주도 이재용 사장과는 호형호제
지난 1월 10일 미국 디트로이트 코보센터에서 개막한 2011 북미국제오토쇼(디트로이트모터쇼).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41)이 현대차 전시부스에 올랐다. 쏘나타, 제네시스, 에쿠스, 싼타페 등 현대차를 대표하는 차량들이 화려하게 전시된 그곳엔 이미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백 명의 기자들이 정 부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 부회장은 유창한 영어로 현대차의 미래 비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현대차의 새 브랜드 슬로건 ‘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도 이때 처음 발표됐다.

그는 “현대차는 단지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회사이며, 우리의 목표는 가장 많이 판매하는 자동차회사가 아니라 가장 사랑받는 자동차회사이자 고객의 신뢰를 받는 동반자”라고 강조했다.

정 부회장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처음 접한 몇몇 한국 기자들은 놀라워했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에다 자신감 넘치는 제스처 등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기아자동차 사장 때부터 규모가 큰 해외 모터쇼에서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맡아 왔고, 발표에 앞서 따로 시간을 내 연습을 한 덕에 정 부회장의 영어는 수준급 이상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은 정 부회장은 유학시절과 이후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2년간 근무하며 본토 영어를 익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틀 뒤인 1월 13일 저녁 정 부회장이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나타났다.

그는 디트로이트모터쇼 프레젠테이션을 마치자마자 귀국길에 올라 5세대 그랜저 신차 발표회를 주관했다. 그전까지 그랜저, 제네시스, 에쿠스 등 대형 신차 발표회는 정·재계와 언론·문화계 등 많은 외부 손님들을 초청한 가운데 정몽구 회장이 관장했으나 이날은 정 부회장이 나서 손님을 맞이하고 행사를 이끌면서 주목을 받았다. 정 부회장의 광폭 행보가 관심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Special] 디자인 경영으로 기아차 부활 주도 이재용 사장과는 호형호제
기아차 부활로 경영능력 입증

정 부회장은 그러나 언론 등에서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다. 그룹 경영을 총괄하는 아버지 정몽구 회장에게 혹시라도 누가 될까 해서다. 현대·기아차의 글로벌 5위 메이커 성장은 정몽구 회장이 지난 10년간 숱한 고뇌와 땀, 그리고 열정으로 이뤄낸 성과로 자신은 아직 더 배워야 한다며 몸을 낮춘다.

행사장 등에서 만나는 기자들이 간혹 맡고 있는 분야가 아닌, 그룹 경영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그는 “회장님을 더 배워야 합니다”라는 답을 내놓기 일쑤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 경영, 현장 중시 경영철학은 정 부회장의 첫째 가치이기도 하다. 기아자동차가 정 부회장의 ‘디자인 경영’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기아차 사장에 선임된 정 부회장은 소비자들로부터 홀대받던 기아차 재건을 위해 제품 라인업을 새로 구축하는 작업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평가받던 아우디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도 직접 만나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경영자 정의선의 실질적 출발이었다.
[Special] 디자인 경영으로 기아차 부활 주도 이재용 사장과는 호형호제
그는 현대·기아차의 신차 개발의 심장인 남양연구소를 수시로 찾아 엔지니어들과 얘기하며 개발 방향을 점검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아차가 준중형차 포르테를 개발할 때는 세세한 마무리까지 챙겼다.

연구소는 물론 상품기획팀 등에선 그가 쏟아내는 날카로운 질문에 진땀을 흘린 이가 적지 않았다. 현장에서 꼼꼼하게 챙기는 것은 정몽구 회장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게 현대·기아차 임직원들의 전언이다.

3년 6개월간 기아차 사장을 지낸 정 부회장은 포르테를 시작으로 K5, K7, 스포티지, 쏘울 등 히트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회사를 부활시켰다. 지금도 정 부회장이 기아차 임직원들로부터 신망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야근 중인 사무실에 피자 등을 돌리며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친밀도를 높였다. 삼겹살집에서 격의 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를 기억하는 직원들도 많다.

구매부터 마케팅까지 경영수업 풀 코스 완료
[Special] 디자인 경영으로 기아차 부활 주도 이재용 사장과는 호형호제
정 부회장의 경영수업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현대정공(지금의 현대모비스) 자재부 과장으로 입사하며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MBA 공부를 위한 미국 유학을 거쳐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2년간 근무한 뒤 1999년 현대차 구매실장(이사)으로 회사에 복귀했다.

자동차는 2만∼3만 개의 부품이 필요한 종합기계 산업이며, 자재부와 구매실은 소재와 부품 조달을 담당하는 곳으로 사업 전반을 꿰뚫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하는 부서다.

아들에 대한 정몽구 회장의 배려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2005년 3월 기아차 사장으로 선임되기까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기아차를 오가며 영업 및 마케팅, 기획 업무 등을 두루 익혔다.

정 부회장은 2009년 8월 현대차 기획 및 영업담당 부회장으로 승진, 현대차의 경영 전반을 관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 자동차를 잘 파는 회사를 넘어 시장 흐름, 즉 트렌드를 주도하는 회사로 키워가야 하는 게 그에게 주어진 임무다.

올해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발표된 새 브랜드 슬로건 ‘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도 이 같은 흐름에서 나온 그의 작품이다.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의미를 담은 브랜드 슬로건에 대해 그는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고객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고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감성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대차가 나아갈 방향성을 가장 현대적인 ‘현대차’만의 프리미엄으로 정했다. 현대차는 이를 모던 프리미엄(modern premium)이라고 부른다. 지금 미국, 중국, 유럽 등 세계 시장을 질주하는 엑센트,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 제네시스, 에쿠스, 싼타페, 투싼ix 등의 현대차 제품들은 품질과 디자인에서 이 같은 철학을 담아가고 있다.

정 부회장은 해외 출장이 아니면 아침 7시 전후로 서울 양재동 본사에 출근한다. 할아버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이어진 현대가(家)의 부지런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정몽구 회장은 6시 30분 언저리면 회사에 출근한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아침을 함께하며 대화하는 밥상머리 교육으로 유명한 현대가 출신답게 정 부회장은 효심이 깊고 예의가 바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친 이정화 여사가 2009년 10월 작고한 뒤에는 매주 일요일이면 부인 및 두 자녀와 함께 한남동 정몽구 회장 자택을 찾는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소탈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화할 때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편이다.
[Special] 디자인 경영으로 기아차 부활 주도 이재용 사장과는 호형호제
정 부회장은 위로 누나가 셋 있다.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 제일 위고,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과 정윤이 현대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가 둘째, 셋째 누나다. 정성이 고문의 남편은 선두훈 대전 선병원 이사장, 정명이 고문의 남편은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이다.

정윤이 전무는 현대하이스코 사장과 결혼했다. 큰누나인 정성이 고문은 사업적으로 연관이 있어 정 부회장이 이따금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성이 고문이 이끄는 이노션은 현대·기아차 광고 업무와 신차 발표회, 해외 모터쇼 등을 대행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스타일로 업무 외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와 학계 등에 두루 지인이 많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가끔 골프 회동을 갖기도 한다.

2007년 10월 현대차그룹이 운영하는 경기도 남양주시 해비치컨트리클럽에서 함께 골프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다. 윤석민 태영 부회장과 허세홍 GS칼텍스 전무는 휘문고 동문이고 조현식 한국타이어 사장,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은 경복초등학교 동창이다. 대학 은사인 장하성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등과도 가깝다.

골프와 테니스 실력이 수준급이며, 현대차그룹 임원들의 전언에 따르면 폭탄주 10여 잔은 거뜬할 만큼 주량도 상당하다는 후문이다. 옷은 검정이나 짙은 회색 등 튀지 않는 스타일의 정장을 주로 입는다.

넥타이는 요즘 들어 블루 컬러 계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차 로고 컬러를 감안한 선택이라는 얘기가 있다. 기아차 사장으로 있을 때는 기아차 상징색인 붉은 계통의 넥타이를 자주 맸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