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zco & Machu Picchu in Peru

페루를 이야기할 때면 흔히 잉카를 필두로 한 찬란한 문명들과 제국의 패망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연금술과 염색 기법, 그리고 석조 건축술로 대표되는 잉카문명이 지금 보아도 워낙 수준 높은 데다 제국의 영광을 마감한 과정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다.
[The Explorer] 잉카의 옛 영광을 반추하다,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페루의 면적은 한반도의 6배. 방대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역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연환경이 무엇보다 드라마틱하다.

페루는 크게 태평양 연안과 사막 지역, 안데스 산지, 아마존 지역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각의 개성과 특징이 너무나 뚜렷해 마치 떨어져 있는 여러 대륙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돌로 만들어진 계단식 공간들이 신비롭게 보인다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돌로 만들어진 계단식 공간들이 신비롭게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페루를 여행하면서 지구상의 다양한 자연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나라라고 말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이 모든 자연들을 경험할 수 있다면 분명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페루 여행의 백미를 꼽자면 잉카문명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쿠스코(Cuzco)와 마추픽추(Machu Picchu)로의 여행이라 하겠다.

페루를 상징하는 거대한 아이콘, 잉카

역사상 이처럼 흥미로운 성과 쇠가 있을까.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숭엄한 제국의 최후는 느닷없는 충격이자 허무한 작별이었다. 첩첩이 쌓인 역사의 갈피를 아무리 들추어도 이만큼 해괴한 끝맺음이 또 있을까 싶다.
1만 명이 거주할 정도로 다양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던 마추픽추는 각 공간마다 테라스가 만들어져 있다
1만 명이 거주할 정도로 다양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던 마추픽추는 각 공간마다 테라스가 만들어져 있다
페루의 역사와 문화에서 ‘잉카’라는 단어를 제외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잉카는 옛 남미에 번성한 제국의 이름이자 제국을 통치한 왕의 호칭이다.

또 가장 화려했던 문명을 의미하기도 하며 멸문지화를 당한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현재의 페루를 이해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교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마추픽추에서는 라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추픽추에서는 라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잉카제국은 1400년대부터 1500년대 초까지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에 해당하는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지방을 지배했던 왕국이었다. 그들의 문명이 유장한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잉카문명인 것이다.

11세기부터 쿠스코를 중심으로 발흥한 잉카제국은 15세기 초 제9대 파차쿠티 황제 시대부터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해 중부 페루 고원과 에콰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기에 이르렀다.

잉카인들은 태양의 아들인 망코 카팍을 선조로 섬겼으며, 제국의 영광은 알타우알파 왕이 스페인의 침략군에 무릎을 꿇기까지 12대에 걸쳐 지속됐다.

잉카제국은 무엇보다 석공 기술이 발달했다. 직물·염색, 황금 세공과 더불어 잉카의 ‘3대 예술’로 불릴 만한데 쿠스코에 있는 황금이 가득한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와 삭사후아만 요새 등을 비롯해 수많은 대형 건축물을 남겼다.

거대한 돌을 종이 한 장,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정교하게 다듬고 짜 맞춘 솜씨가 경탄스럽기 짝이 없다.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거석을 어떻게 운반했느냐 하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역사의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아쉬운 것은 어떻게 위대한 건축물이 나올 수 있었는지 아직 전모를 모른다는 점이다. 모두들 정확한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의 기록들을 야만적이고, 또 악마의 영혼이 깃든 것이라 여겨 대부분 파괴했기 때문이다. 사라진 기록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픈 역사 속에 숨겨진 잉카의 흔적들
[The Explorer] 잉카의 옛 영광을 반추하다, 페루
잉카제국은 1532년 11월 16일 스페인 사람 피사로에 의해 마지막 숨통이 끊겼다. 이후 남아메리카는 본격적으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수백만에서 10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많은 백성들이 어찌 소수의 스페인 군대에 힘없이 무너진 것일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피사로가 승리한 데는 물론 스페인의 신무기와 기마병을 이용한 전술이 주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기상학자들은 날씨도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페루의 해안과 구릉 지역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곳이며 안데스 산맥은 추위와 함께 강풍이 몰아치는 곳이다.

그런데 기상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당시에는 엘니뇨현상으로 해안과 구릉 지역에 비가 많이 내려 물과 식량 사정이 좋았고 안데스 산맥 또한 그리 춥지 않았다고 한다.
마추픽추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행객의 모습. 그는 분명 잉카의 옛 영광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으리라
마추픽추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행객의 모습. 그는 분명 잉카의 옛 영광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으리라
이런 기상 조건 때문에 스페인군이 페루의 북부로부터 남부 산악 지역인 마추픽추까지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기후는 면역력이 없던 잉카인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기도 했다.

잉카제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췄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은 앞서간 잉카문명을 완전히 절단할 수 없었다. 정복자들의 문화보다 한 수 위이기도 했지만 문명이라는 게 워낙 생명력이 질겨서 누르고 부수고 생채기를 내도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대신 400년 넘게 자행됐던 스페인의 광포한 ‘잉카 박살 내기’는 결과적으로 피지배자와 지배자 간의 기묘하고 부적절한 동거를 창출했다.

잉카를 정복한 침략자들은 태양의 신전 안에 가득했던 황금을 거두어가고 그 위에 산토 도밍고 성당을 세웠다. 태양의 처녀집은 수녀원으로, 제국의 힘과 웅장함을 웅변하던 왕궁은 성당으로 야멸차게 바꿔버렸다.

남미를 대표하는 전통 축제, 태양제
쿠스코의 옛 잉카 유적에서 만난 꼬마 아이들
쿠스코의 옛 잉카 유적에서 만난 꼬마 아이들
매년 6월이 되면 쿠스코는 태양제를 통해 다시 한 번 잉카로 부활한다. 태양제인 인티라이미가 열리는 날 쿠스코는 이곳을 찾아온 세계인들의 발길로 활기를 띤다.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 유럽에서 건너온 현대적 축제라면, 태양제는 남미를 대표하는 전통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잉카제국에 있어 태양 숭배야말로 가장 큰 행사인 것이다. ‘인티’는 잉카어로 ‘태양’을 뜻한다.

태양제가 6월에 열리는 이유는 우리와 정반대에 위치한 페루의 6월이 건기이며 겨울철이기 때문이다. 인티라이미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쿠스코는 인근 지역에서 몰려드는 인디오들과 축제 참가자들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전통 춤은 기본이고 그 해 수확한 각종 농산물로 차량을 치장하거나 집에서 키운 가축들도 축제에 참가한다. 축제 복장은 모두가 잉카의 의복으로 색깔과 문양, 형태 등에서 당시의 신분과 계급을 식별할 수 있는데, 화려한 복장일수록 높은 신분을 의미한다.
마추픽추를 둘러보는 여행객들
마추픽추를 둘러보는 여행객들
6월 24일 태양 신전 코리칸차에 태양이 밝으면 왕은 엄숙하면서도 웅장한 목소리로 인티라이미의 시작을 알린다. 왕을 중심으로 각종 깃발을 앞세운 거대한 행렬은 잉카의 성벽 삭사후아만으로 향한다.

쿠스코에서 도보로 40여 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해발 3540m에 위치한 잉카의 대표적인 유적지인데, 쿠스코를 지켰던 성곽으로 쓰였다. 성곽 한가운데 임시로 세워진 제단에서 왕이 그 해에 수확한 농작물을 신께 바침으로써 의식이 시작된다.

잉카의 왕은 태양을 향해 절을 하고 금 지팡이를 바친다. 제례가 무르익는 때쯤 산양의 일종인 라마의 심장을 태양신께 바치며 마지막 의식을 치르는데, 전국 각지에서 엄선한 라마를 골라 잉카의 칼 ‘투미’로 배를 가른다.

잉카인들은 배에서 꺼낸 심장의 혈관이 빨간색일수록 풍요가 찾아온다고 믿었다. 잉카인들이 붉은색을 그만큼 선호한다는 증거다. 이날만큼은 온순한 잉카의 후예들이 신명나게 춤판을 벌이며 융성했던 옛 영광을 재현한다.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을 파는 여인들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을 파는 여인들
마추픽추로 연결하는 잉카트레일

페루에서 꼭 방문해야 한다는 마추픽추를 찾는 일은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높은 고산 지역을 넘나들기에 고산병이 찾아오기 십상이고 기차를 이용해 가는 길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옛 잉카의 심정으로 트레킹을 작정했다면 족히 3~4일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잉카트레일로 일컫는 걷기코스는 사실 고통의 연속이다. 고산 지대에서 한발 한발 내딛는 것 자체가 고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통은 마추픽추와 마주하는 순간이 되면 환희로 바뀌고 고통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로 화답한다.

마추픽추는 그 외형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해발 2400m의 높은 산봉우리 정상을 개간해 만든 도시라는 사실이 놀랍고 계단식 논과 밭, 넓은 시가지, 광장, 서민들의 주거 지역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정교한 석조 건축물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마추픽추는 테라스의 도시이기도 하다. 산비탈은 물론이고 깎아지른 벼랑까지도 테라스를 만들어 농업에 이용했다. 이 계단식 영농은 현재까지 사용될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마추픽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물 관리 능력이다. 물이 귀한 고산 지역이건만 깨끗한 물을 먹고 이용할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었고 정밀하게 조각된 16개의 분수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산에서 내려와 아래쪽 샘에서 모아진 물은 수로를 따라 흘러가면서 16개나 되는 분수로 공급이 된다.

이곳에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도시 곳곳이 치밀한 계산에 의해 계획된 도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옮겼고, 도시를 건설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이곳에 흘렸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잉카의 흔적임을 실감할 수 있다.

잉카의 찬란한 역사 유적을 언덕 위에서 굽어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은 여행자라면 누구나 절로 되는 일이리라. 그리고 그들의 흥과 망, 성과 쇠를 반추하며 페루 여행의 진한 감동을 아주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추픽추로 가는 거점도시인 쿠스코의 메인 광장 모습
마추픽추로 가는 거점도시인 쿠스코의 메인 광장 모습

Travel Tip

가는 방법

한국에서 페루의 수도 리마국제공항까지 가는 직항 편은 없다. 미국 서부 혹은 동부 도시를 경유해 갈 수 있는데, 그중 로스앤젤레스(LA)에서 환승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미국 도시까지 이동한 후 란칠레항공이나 브라질항공을 연결해서 이용한다.

이외에 유럽노선을 이용해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리마까지 이동하는 경우도 있으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항공 요금은 항공사마다 다르나 보통 160만~200만 원 정도 선으로 보면 된다.

여행 시기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6월부터 9월의 건기로 하이킹을 즐기기에 최상의 날씨다. 쿠스코와 마추픽추로 여행하고자 한다면 이 시기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해변 지역을 여행하기에는 12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가장 날씨가 좋다.

음식

사막과 고산, 아마존 등 지역에 따라 전통 먹을거리도 다채롭다. 태평양 연안에서는 라임 즙에 절여 올리브 오일과 양파를 넣은 세비체라는 해물 요리가 인기 1순위다.

고산 지역에서는 지역 동물인 라마, 알파카 고기와 독특한 돼지고기 튀김인 치차론, 매운 피망 요리인 로코토 레예노 등 이색적인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밀림으로 들어간다면 민물 거북이나 보통 1m가 넘는 아마존 생선인 피라루쿠 같은 특별식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