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 역사를 반만년 역사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반만년’이나 됐다는 역사적 증거나 흔적은 거의 없다. 실은 ‘반만년’이라는 근거가 생긴 것도 ‘반만년’은커녕 1000년이 채 안 된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는 것이 근거인데, 그 연대 추정은 고려 말인 13세기 말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몽골 지배기였던 당시 일연과 이승휴가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단군신화를 역사에 포함시켰고, 이를 토대로 몽골이 물러간 뒤 백문보가 공민왕에게 단군기원을 쓰자고 건의하면서 비로소 ‘반만년 역사’라는 관념이 탄생했다.
[Thoughts on…] 허구적 주체성의 시대
그렇게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에서 역사의 기원만 잔뜩 늘려놓았기 때문에 역사의 내용을 채우는 데 허점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고조선만 해도 단군 시대 이후 역사의 공백이 무척 길다.

그 기간을 설명하는 우리 자체의 문헌은 전혀 없고, 중국 역사서에 고조선이 등장하는 것도 기원전 12세기의 기자조선과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위만조선이 고작이다.

중국 측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기원전 2333년에서 1000년간, 또 기원전 12세기까지 1000년간, 도합 2000년의 역사적 공백이 있다.

고대까지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냉철히 살펴보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전통에서 그리 오래된 것은 없다. 예컨대 우리 고유의 음악 장르인 판소리는 18세기 초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며, 19세기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형식이 갖춰져 정형화됐다.

전통 음식 가운데 국제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김치는 그 원형을 본다면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김치라면 고춧가루를 빼놓을 수 없는데, 고추가 수입된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였기 때문이다(아울러 담배도 그 시기에 수입됐으므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라는 말은 그리 오랜 과거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엄격하게 볼 때 우리 역사가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양태를 갖추게 된 것은 바로 17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자체적 개혁인 대동법이 도입됐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주체적 성향이 강한 실학이 등장했으며, 미술에서도 진경산수화가 출현했다.

이렇게 독자적 노선이 여러 방면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생겨난 이유는 뭘까. 사실 이 주체 노선의 배경에는 극히 비주체적인 중화 이념이 있다.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거나 원용하지 않는다, 중국의 학문을 버리고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한다,

중국의 산수를 그리던 과거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의 자연과 산천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등 이런 변화들이 시기적으로 편차를 두고 전개됐다면 우리 내부에서 비롯된 주체 노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면 바깥의 변화가 내부에 영향을 준 게 아니냐고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한반도 바깥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세계적으로는 이른바 제국주의 시대(동양사에서는 서세동점이라고 부른다)가 출범한 것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겠지만, 한반도의 처지에서는 우선 중국 대륙의 임자가 바뀐 것이 중요했다.

15세기부터 내정 문란으로 중앙권력이 힘을 잃은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져 멸망했다. 만주에서 일어난 만주족(옛 여진족)은 1616년 후금을 세우고 중원 정복을 꾀한 끝에 1644년 드디어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제국의 명패를 바꿨다. 20세기 초까지 존속해 결국 중국의 마지막 제국이 되는 청나라다.

중국은 원래 200~300년마다 낡은 제국이 멸망하고 새 제국이 들어서는 역사를 전개해왔으므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다고 해서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문제는 청나라가 한족 제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청나라는 ‘정통’ 중화 제국이 아니었다.

역대 한반도 왕조들은 전통적으로 중국에 사대했으나 그 사대의 대상은 중화 제국, 즉 한족의 제국이었지 ‘오랑캐’의 제국이 아니었다. 비록 고려 말 몽골 지배기에는 몽골이 강제로 속국화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굴복했지만, 그것을 욕된 역사로 치부하는 조선의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은 청나라가 조선을 병합하려 하지 않는 한 오랑캐에게 사대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주족이 대륙을 정복하기 전까지는 후금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당한 변란이 두 차례의 호란이다.

그런데 이제 중국 대륙 전체가 오랑캐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뼛속까지 중화 사대주의로 물든 조선의 지배계급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정신착란으로 대응했다. 현실의 중화세계가 사라졌으니 이제 조선이 중화세계이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문명국가라는 터무니없는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소중화(小中華)’라는 관념인데, 바로 여기서 조선의 주체 노선이 비롯됐다. 실학과 진경산수화는 ‘작은 중화’의 학문적, 미술적 표현이다. 물론 뒤늦게나마 주체 노선이 시작된 것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배경에 소중화라는 시대착오적 세계관이 숨어 있다는 것은 간파할 필요가 있다.

소중화의 광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예송(禮訟)논쟁이 있다. 그 발단은 1659년 조선의 효종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효종은 원래 왕위와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인 인조는 사대부들이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조종하기 쉬운 인물을 골라 왕위에 앉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효종은 인조의 맏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었다(그의 형은 17세기의 복잡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현명하게 헤쳐 나가려는 의욕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사대부들의 음모로 비운에 죽은 소현세자다). 효종의 그런 얄궂은 운명은 그가 죽은 뒤에도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집안의 서열상으로는 차남이지만 나라의 서열상으로는 군주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논란거리가 됐다. 사대부들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 즉 상복을 얼마나 입을 것이냐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장남이 죽었을 때 부모는 3년상을 치르도록 돼 있다. 그러나 차남의 경우에는 복상 기간이 크게 줄어 1년이다. 그럼 집안의 차남이자 일국의 왕인 효종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의견이 둘로 갈린다. 효종이 차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집단은 자의대비가 1년간 복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대의 거물인 송시열을 우두머리로 삼는 서인의 주장이다.

반면 효종이 왕의 신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집단은 아무리 가문의 차남이라 하더라도 일국의 왕을 사대부 집안의 차남과 같은 예법으로 취급할 수 있느냐고 따진다. 이 견해를 채택한다면 자의대비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 허목이 대표하는 남인의 주장이다.

이 사건은 당시 ‘여당’이었던 서인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15년 뒤에는 역전극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효종의 아내인 인선왕후가 죽었는데, 또다시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이 문제가 됐다.

효종의 경우와 달리 왕비의 상이므로 복상 기간은 1년과 9개월로 줄었으나 예전처럼 사대부들은 또 두 파로 나뉘어 싸웠다. 물론 서인이 9개월이고 남인이 1년이었다. 여기서 허목은 1년 복상설을 관철시켜 보기 좋게 역전승을 거두었고 드디어 여야가 바뀌어 남인이 권력을 쟁취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겉으로 보면 예법을 둘러싼 제법 고결한 논쟁인 듯하다. 그러나 왜 하필 17세기 중반인 그 시대에 예법이 중요한 논쟁거리로 떠올랐을까. 예법이야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장남이 아닌 신분으로 즉위한 왕들이 조선 초기부터 적지 않게 있었는데도 그때야 비로소 문제시된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온 천하가 오랑캐 세상이 됐으니 이제 모든 예법을 세계 유일의 문명국인 조선에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주체 노선으로 보이지만 실은 중화 이념의 광기 어린 변형이다.

고려 말 몽골 지배기에는 우리 역사의 기원을 크게 늘려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 핍박을 당하던 시대에는 조선만이 문명국이라는 허구적인 자부심에서 주체 노선이 전개됐다.

그렇게 보면 우리 역사에서 자주성이 고조된 두 시기는 다 역사적 콤플렉스의 소산이다. 그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진정한 방법은 역사를 이데올로기화하기보다 올바른 비판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