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박원규 & 이진선

하석 박원규는 40년 동안 ‘서예 한 길’을 걸어온 대표적인 서예가다. 서예가로 드물게 다섯 차례의 대형 개인전을 열기도 한 그가 파주 헤이리 북하우스에서 ‘자충천(字中天)-하석 박원규 기획전’을 열고 있다. 한국 서예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전시장에 후배 서예가 이진선 박사와 30년 지기 김언호 한길사 사장이 먼 길을 찾아왔다.
왼쪽부터 박원규 작가, 이진선 박사, 김언호 한길사 사장
왼쪽부터 박원규 작가, 이진선 박사, 김언호 한길사 사장
하석 박원규 선생은 전북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배재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를 마쳤다. 강암 송성용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배웠고, 대만에 유학해 독옹 이대목 선생에게 전각을 배웠다. 한학의 대가 긍둔 송창, 월당 홍진표 선생을 사사했고, 지금은 지산 장재한 선생에게 수학하고 있다.

서예가로 1978년 제10회 전북도전에서 금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듬해 제1회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1984년 <계해집>을 시작으로 총 25권의 작품집을 출간했는데, 1985년 출간한 <마왕퇴백서노자임본>은 현재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그는 서울 옥수동에서 ‘작비서상’이라는 서예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압구정동 석곡실에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Friends] 서예의 미래를 논하다
‘자중천’ 전을 보기 위해 헤이리를 찾은 날, 전날 내린 눈이 눈부신 겨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북하우스 지하 갤러리에 들어서자 하석 선생과 이진선 박사, 그리고 기획전을 주최한 30년 지기 김언호 한길사 사장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친 김 사장은 연방 “대단하네, 대단해”라며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별관 갤러리까지 둘러본 후 세 사람이 북하우스 카페에 마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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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인 서체에 현대적 감각을 입혀 탄생한 글

김언호(이하 김): 제가 책을 만들면서 1980년대엔 한글 바로 세우기에 중심을 뒀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한문을 공부할 때잖아요. 사실 우리 문화유산의 대부분이 한자잖습니까. 외국 바이어들도 부채에 한자 몇 자를 써주면 무척 좋아하거든요. 이게 바로 동양, 그리고 한국의 문화인 거죠.

이진선(이하 이): 서예란 게 그런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거죠. 서예는 인문학과 예술학의 총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 그런 의미에서 박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제가 <혼불>을 쓴 최명희 선생을 통해 박 선생님을 알게 됐어요. 그게 벌써 30년도 더 됐습니다.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박 선생님은 좋은 학생이자 스승이며, 또 예술가입니다. 지금도 독선생 두고 공부하는 분입니다.

박원규(이하 박): 문자가 예술의 시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훈이나 써주는 정도로 전락했어요. 예전에는 문(文)과 사(史)와 철(哲)이 모두 하나였는데 말이죠. 우리 때부터 그런 전통이 무너지기 시작한 듯합니다.

이: 선생님이 그걸 지키고 계신 분이잖아요. 제가 두 분 몰래 전시장을 둘러봤거든요. 지하에 있는 작품은 상당히 원시적인데 현대와 너무 잘 어울린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헤이리를 몇 번 왔다 갔어요. 헤이리라는 곳이 30, 40대 젊은 층들이 많이 찾는 곳이잖습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있고요. 그분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 이걸 선택한 겁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암각화처럼 재미있게 써보자 작심한 거죠. 한자 중에는 아직까지 뜻을 풀지 못한 글자가 약 1300자가 있습니다. 그중 28개 골라서 쓴 거죠. 다행히 많이 좋아하시는 듯해요. 이렇게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써야 한자가 박제화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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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의 풍모를 가진 기인 서예가

이: 선생님은 서단에서 잘 쓰지 않는 서체를 많이 쓰세요. 한나라 때 대나무에 쓰던 한간체 등이 대표적이죠. 1988년에 교수님과 전시회를 찾았는데, 선생님의 재주에 아주 반해버렸어요.

박: 이 선생은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학위는 한문학으로 받았어요. 서예가로도 촉망받는 분이고, 저와는 한문 공부를 같이 한 동문이기도 하고요.

이: 제 선생님이 정인보 선생의 따님인 정양원 교수님이셨어요. 그분을 만나면서 서예에 재미를 붙였죠. 그전까지는 서예라면 지루한 걸로 알았었죠. 정 선생님이 박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한번은 월당 선생님 댁에 한문을 공부하러 갔는데 박 선생님이 벼루를 하나 들고 오셨어요. 당시에 700만 원하는 벼루였어요. 월당 선생님이 그걸 보고 1400만 원짜리 집에 700만 원짜리 벼루를 들고 왔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셨죠. 그 일 말고도 선생님은, 고무신에 점퍼를 입고 다니는 좀 특이한 분이셨어요.

김: 사실 박 선생님의 첫인상은 서예가라기보다 팝 아티스트에 가까웠어요. 워낙 다이내믹한 삶을 사셔서 가끔 이분을 소재로 영화를 하나 만들어도 괜찮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도 색을 쓴 건 선화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벽에 걸어두기 참 좋을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출판도시를 하면서 문자전에 관심이 많은데, 이걸 어떻게 좀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이: 저는 헤이리가 많은 문화인들이 모여서 담론을 만드는 그런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예맥이라는 게 상당히 중요하잖아요.

박: 지금은 화단과 서단이 단절돼 있잖아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지 화랑에서 서예전을 열지 않아요. 한자를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제 생각에는 고급 아파트 같은데 서예를 걸어두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김: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숨 수(壽)자와 부유할 부(富)자를 잘 써서 걸어두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글자를 쓴 이불을 덮고 잔다면 얼마나 푸근하겠습니까. 결국은 산업과 연결돼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박: 광화문 현판도 그래요. 지금 게 예전 무명의 관리가 쓴 거잖아요. 아주 좋은 글씨라고는 말할 수 없죠. 그 대신에 현재 서예 대가들의 작품을 받아서 선별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국내 A급 서예가들의 글씨는 보통 좋은 게 아닙니다.

김: 글씨의 중요성이 갈수록 흐려지는 게 안타까워요. 몇 년 전에 전시회를 하면서 방명록을 내놨는데, 대부분이 안 써요. 글씨가 서투니까 당연한 거죠. 어떤 면에서 글씨가 반듯해야 사회가 바로 서는 데 말이죠.

박: 마음이 바르면 글씨는 바르게 써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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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시작된 강암 선생과의 인연

이: 사실 저희 때만 해도 서예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게 있거든요. 저도 그런 향수 때문에 서예를 하게 됐으니까요.

박: 저도 법학과를 나왔지만 서예를 하잖아요. 제 경우엔 형님의 영향이 컸어요. 고등학교 시절에 형님 댁에 놀러 갔는데 ‘인지위덕(忍之爲德: 참는 것이 덕이다)’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어요. 글씨는 잘 몰라도 낙관이 너무 멋있더라고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현판을 떼어내서 보면서 모사를 했어요.

이: 자질이 있으니까 흥미가 생기는 거죠.

박: 그러다 형님이 남정 최정균 선생이라고 원광대 한문학과를 만든 분인데, 그분을 소개시켜 주셨어요. 그분이 익산에 초가집에 살고 계셨는데, 찾아뵈었더니 중등학교 글씨본을 주시더라고요. 나는 그것보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더 좋아서, 그런 분들 글씨를 보면서 모사를 했죠.

김: 이력에 보니까 강암 선생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걸로 나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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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그것도 사연이 깁니다. 고등학생이 글씨를 쓰는데 모르는 한자가 많잖아요. 그때마다 한문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물었죠. 어느 날 중학생 하나가 나하고 똑같은 짓을 하더라고요. 그 학생이 갖고 온 걸 보니까 글씨가 참 마음에 들어서 이걸 누가 썼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가 썼대요. 그 길로 찾아가서 그동안 제가 쓴 글씨를 보여드리고 큰절을 올렸죠. 글씨를 보시고는 “어린 놈이 제법이구나” 하셨죠. 그 길로 제자가 됐습니다. 그분이 강암 선생님이시고, 그때 그 중학생이 지금 전주시장을 하는 송하진 씨입니다.

이: 강암 선생님 제자 중에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박: 선생님 문하에 변호사, 판사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갓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죠. 그런 선생님이 계셨기에 제가 있는 거죠. 서예는 독학으로 성취가 어렵습니다. 예맥이 중요한 것이죠.

김: 결국 사람의 손이 하는 것이잖아요. 오랫동안 책을 만들어온 사람으로 저는 ‘손의 철학’을 믿습니다. 장인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구두나 옷을 만드는 사람도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서면 저는 예술가라고 봅니다. 장인은 끊임없는 작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거든요. 선생님을 봐도 알 수 있잖습니까. 40년을 한결같이 글씨만 써왔잖아요. 바른 글이 탄생하려면 정말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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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핵심은 시비가 아닌 선택과 조화

박: 저는 학생들한테 재미있게 쓰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분들이 저한테 그래요. 선생은 심할 정도로 열심히 하면서 후학들에게는 재미로 하란다고요. 그런데 재미가 없으면 열심히 못해요. 재밌고 즐거워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거죠.

이: 글씨는 이상한 마력이 있어요. 저는 자기 전에 글씨를 쓰는데, 하루도 빠진 적이 없어요. 글씨를 쓰면서 붓과 친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거든요. 또 글씨를 보면 제 자신이 보여요.

김: 문제는 잘 안 돼서 탈이죠.(웃음) 자주 쓰다 보면 잘 쓸 수 있나요.

박: 그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글씨는 잘 쓰는 것보다 자기답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법을 너무 강조하면 흥미를 잃고 매진하기가 어려워요. 새로운 것이 나오기도 어렵고요. 작품을 하는 사람은 너무 한 곳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취재수첩은 덮고 잠깐 한담을 나누는 동안 하석 선생은 몇 가지 가슴에 새길 말을 남겼다. “서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생기’, 즉 살아있는 기운”이라고도 했고, “예술이란 막연한 감동이 아니라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감동”이라는 말도 했다. 무엇보다 “예술은 결국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조화의 문제”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