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deo Modigliani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강한 자의식과 알코올, 마약에 사로잡힌 불행한 그는 ‘이탈리아의 도스토예프스키’였다. 파리의 흐린 아틀리에 불빛 아래 모든 여성을 긴 목과 갸름한 얼굴로 여리게 그려낸 화가, 서른여섯 청춘에 어릴 때부터 달고 다녔던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한 서럽고 안타까운 보헤미안.
1. <잔 에뷰테른>, 1919년, 캔버스 위에 유화, 91.4×73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1. <잔 에뷰테른>, 1919년, 캔버스 위에 유화, 91.4×73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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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다음날 아내 잔 에뷰테른(Jeanne Hebuterne·1898~1920)은 22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 곁으로 떠나 순애보의 주인공이 됐다. 모딜리아니는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를 만난 후 그의 작품의 단순미에 경도돼 4년간 붓을 놓고 여인의 두상 제작에 몰두한다.
2. 모딜리아니. 파리 몽파르나스 아틀리에에서 1915년 화상 폴 기욤이 찍었다. 가난과 술, 폐결핵으로 몸은 피폐해 갔지만 젊은 예술가의 당당함은 눈빛에 가득하다.
2. 모딜리아니. 파리 몽파르나스 아틀리에에서 1915년 화상 폴 기욤이 찍었다. 가난과 술, 폐결핵으로 몸은 피폐해 갔지만 젊은 예술가의 당당함은 눈빛에 가득하다.
그러나 돌조각의 분진으로 인해 폐결핵이 악화되자 조각을 그만두고 대신 브랑쿠시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길고 갸름한 인체 표현을 시도하고 평단으로부터 ‘모딜리아니의 긴 얼굴’이라는 창의성을 인정받는다.

파리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선술집에서 시인과 문인, 화상과 어울리며 시와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여인들을 모델로 선정적이고도 요염한 누드화를 그려 파문을 일으킨 화가, 하지만 모두들 그의 여인 그림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한 시인과 화가, 화상들에게 그의 죽음을 아프게 했던 화가, 피카소의 급진적 입체보다 세잔의 묵직한 색채를 더 사랑해 폴 세잔을 스승처럼 품고 다녔던 이성적인 화가, 그가 바로 모딜리아니다.




3. <머리>, 1911~13년, 라임스톤, 71.8×18.4×20.6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3. <머리>, 1911~13년, 라임스톤, 71.8×18.4×20.6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 1911~13년, 라임스톤, 71.8×18.4×20.6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모딜리아니 그림의 세계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세잔의 색채와 분석적 기법, 인물의 자세, 그리고 사물의 구성이 담겨 있고,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은 길게 늘여지고 단순화된 인체의 형태와 무표정한 고요가 들어 있다. 그가 남긴 나부 상에는 시정의 화장기 진한 분 냄새 대신 인간의 심오한 정신이 투영돼 있다.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의 정신을 환기시키는 듯한 모델의 눈빛은 모딜리아니 자신의 생을 불태우는 마지막 투혼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 10년간-좀 더 정확하게는 1886년 3월 파리 시절부터 1890년 오베르 쉬르 와즈의 보리밭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4년간-불후의 명작을 남겼듯, 모딜리아니도 브랑쿠시 아래에서 조각을 그만둔 1914년부터 죽기 전 1919년 겨울까지 그의 모든 명작을 빚어냈다.

그의 작품들에는 화상 폴 기욤부터 시인 장 콕토, 화가 피카소 그리고 무명의 소년 소녀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델로 등장하는데 그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아내 에뷰테른이다.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유대인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유지니아 가르신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모딜리아니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 절망적이었지만 슬기로운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10세 때까지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11세 때는 늑막염을 앓았고, 14세에는 장티푸스로 고생했으며, 16세 때에는 결핵에 걸렸다. 이때 걸린 결핵은 결국 그를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됐다.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나폴리,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등을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의 감수성을 키웠다.
4. <누워있는 나부>, 1917년, 캔버스 위에 유화, 59.7×92.1cm, 윌리엄 코흐 소장
4. <누워있는 나부>, 1917년, 캔버스 위에 유화, 59.7×92.1cm, 윌리엄 코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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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모딜리아니는 파리로 갔다. 당시 파리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였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사는 라 바토 라부아르(La Bateau-Lavoir) 지역에 작은 스튜디오를 빌려 정착했다.

파리에 도착한 지 1년이 채 안 돼 그의 품행과 평판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모딜리아니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야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몽마르트에 싫증이 나 있었고, 거기 있으면 뭔가 파묻혀 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신의 환기가 필요했다.

그의 새로운 갈망은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몽마르트가 과거의 인습과 퇴폐, 타락으로 물들어 있는 데 반해 몽파르나스는 예술과 문학이 빛을 발하는, 어느 곳보다도 화려한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 ‘돔’과 술집 ‘로통드’를 드나들며 데생을 하고 술을 마셨다. 그가 살고 있는 몽파르나스 아틀리에는 누추했고, 그는 점차 보헤미안 예술가의 외모로 변해 갔다.

이는 아마도 결핵이라는 난치병에 걸렸을 때부터 자신의 요절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결핵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은 삶이 지속되는 동안 즐기는 것,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쾌락에 빠지는 것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보헤미안적 환경 속에서 여자들과 잦은 애정 행각을 벌였고 독한 압생트와 해시시 같은 마약에 중독됐다. 술과 마약에 빠지며 그는 반 고흐처럼 비극적인 작가의 전형이 돼 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초기 파리 시절, 모딜리아니는 엄청난 속도로 데생과 그림 작업을 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처음에는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1907년경에는 세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브랑쿠시를 만나 조각을 배운 다음부터 어떤 양식의 카테고리에도 포함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5. <파란 눈의 잔 에뷰테른>, 1917년, 캔버스 위에 유화, 54.6×42.9cm, 필라델피아미술관
5. <파란 눈의 잔 에뷰테른>, 1917년, 캔버스 위에 유화, 54.6×42.9cm, 필라델피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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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모딜리아니

유년기의 모딜리아니에게 문학은 미술과 함께 또 다른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했다. 모딜리아니는 외할아버지 이사코 가르신(Isaco Garsin)의 후견 아래 학구적이고 지적인 문학을 경험하면서 니체, 보들레르, 로트레아몽과 같은 문인들의 글을 읽었고 진실한 창조의 길은 오직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믿음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학적 재질과 취향은 화가와 시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1910년대 파리 시절, 시인 앙드레 살몽과 장 콕토, 시인이자 화상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그리고 애인이자 시인이었던 영국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등과의 교유에서 잘 알 수 있다.
6.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1915년, 캔버스 위에 유화, 81.3×46.4cm, 개인 소장
6.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1915년, 캔버스 위에 유화, 81.3×46.4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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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가 헤이스팅스를 처음 만난 것은 1914년 6월 몽파르나스에서였다. 그녀가 런던을 떠나 파리로 온 지 얼마 안 돼 모딜리아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예술 앞에서 겁을 내는 흔해빠진 몽파르나스의 화가, 그것도 부르주아적 습관이 있는 젊은 예술가로만 알고 있었다.

몽파르나스에서 헤이스팅스를 각별하게 친근한 태도로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인이라고 불렸지만 아무도 그녀의 시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격심하게 화를 내는 연인의 열정 앞에서 몸을 굽힐 줄 아는 사려 깊은 여인이었고, 시적인 품위가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시적 의식이 모딜리아니의 천재성을 끌어내어 눈뜨게 해 주었고, 모딜리아니의 재능을 꽃피우게 했다. 모딜리아니는 그녀가 읊는 시를 황홀하게 음미했다.

이국의 언어가 감미로운 음악이 돼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 위에서 꽃을 피웠다. 모딜리아니는 환상과 시정에 젖어 들었다. 모딜리아니는 헤이스팅스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갔다.

“화가에게는 그림을 걸기 위해 벽이 필요하지만 시인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면서 “시는 바람에 날려 오는 아주 작은 꽃가루”라고 말하는 그녀는 모딜리아니에게 “그림을 그리세요, 당신은 화가니까”라는 말과 함께 짧은 2년간의 사랑을 털어버리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아무도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잔 에뷰테른

7. 잔 에뷰테른. 1919년, 작가 미상, 흑백 사진
7. 잔 에뷰테른. 1919년, 작가 미상, 흑백 사진
1919년 늦은 가을, 여기 한 여인이 만삭의 몸으로 힘들게 화가의 모델로 앉아있다. 갸름한 얼굴에 긴 목, 눈에는 표정이 없다. 눈은 파란색으로 옅게 칠해 놓고 눈동자 없이 윤곽선만 그렸다.

좁은 어깨, 긴 코와 다문 작은 입술, 팔을 소파에 걸치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기대어 밀어내듯 기운 포즈는 곧 다가올 불길한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걸까. 초상화의 주인공은 영원한 몽마르트의 보헤미안이자 이탈리아 화가인 모딜리아니의 부인 에뷰테른이다.

1917년 4월,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Chana Orloff)의 소개로 일본인 화가 후지타 츠구하루의 모델이었던 19세의 에뷰테른을 만난다. 모딜리아니와 후지타는 같은 건물에 아틀리에를 두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에뷰테른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수려한 용모에 빛나는 눈빛과 청순한 자태는 모델이라기보다 이성으로서의 사랑이었다. 에뷰테른은 화가 지망생이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적 배경을 가진 그녀의 가족은 모딜리아니가 가난한 유대인 화가라는 점에 반감을 갖고 둘의 만남을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불 같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그랑드 쇼미에르가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서른셋, 에뷰테른은 열아홉이었다.

그런 그녀가 딸아이의 엄마가 됐고, 곧 새로운 아기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에뷰테른은 모딜리아니가 폐결핵으로 1920년 1월 24일 파리 자선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자 다음날 9개월 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어린 딸을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자신의 집 6층 창문에서 몸을 던진다.

그녀에게 모딜리아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처음 모딜리아니를 봤을 때 파도의 격랑보다 더 심하게 뛰었던 그녀의 심장은 3년이란 짧은 시간의 격정 속에 서로의 찬 가슴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모딜리아니를 볼 수 없게 되자 자신도 짧고 모진 생을 마감했다. 생의 절정에서 막을 내린 그녀의 삶은 모딜리아니의 그림보다 더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8.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모딜리아니 작품 <누드>와 <잔 에뷰테른>을 한 소녀가 미술관 가이드헤드셋으로 감상하고 있다. 최선호2010ⓒ
8.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모딜리아니 작품 <누드>와 <잔 에뷰테른>을 한 소녀가 미술관 가이드헤드셋으로 감상하고 있다. 최선호2010ⓒ
와 <잔 에뷰테른>을 한 소녀가 미술관 가이드헤드셋으로 감상하고 있다. 최선호2010ⓒ">
파리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묘비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 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잔 에뷰테른. 1898년 4월 6일 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라고 간단하게 적혀 있다. 모딜리아니와 에뷰테른, 그 둘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말과 글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인생은 그 누구를 돌아봐도 간단하지 않지만, 예술가의 삶과 죽음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애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불꽃처럼 살다간 몽마르트의 보헤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