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연적 컬렉터 시인 이근배

한국시인협회 전 회장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이근배 시인은 문단에서는 벼루 애호가로 유명하다. 친·외가 모두 선비 집안으로 어려서부터 묵향과 가까웠던 그는 젊어서부터 벼루를 모아왔다. 1000여 점이 넘는 이 시인의 벼루 컬렉션의 세계로 안내한다.
[The Collector]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 보낸 40년
몹쓸 벼루 귀신에 씌어
저자 거리를 헤맨 지 마흔 해
용케 붙잡은 오백 년 저쪽
우리네 장인이 깎은
천하 으뜸의 신연에 짝 지울
연적 하나 못내 찾았더니라
어허, 이제 오셨구나
오랜 마음 씀이 헛되지 않아
인사동 경매장에 튀어나와
뻔쩍! 내 눈에 불을 댕겼으니
순백 달항아리 한 허리를 베어낸 듯
둥실 반달로 뜨는 백자 연적이라

… 중략
[The Collector]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 보낸 40년
이근배 시인이 조선백자 반월형연적을 얻고 남긴 동명의 시다. 시인이 벼루와 연적에 얼마나 매료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벼루와 연적 컬렉터로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시인을 만난 것은 마포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오피스텔에 들어서자 서재를 빼곡히 채운 책 사이로 어지럽게 널린 벼루와 연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비 집안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친숙했던 묵향

“오늘 눈이 호사를 누릴 겁니다”라고 말문을 연 시인은 오피스텔 곳곳에 숨겨둔 벼루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선보인 컬렉션은 평안북도 위원 지방의 화초석을 만든 벼루. 선비와 농부, 소와 연꽃 등이 세밀하게 조각된 벼루는 벼루라기보다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여말선초의 것입니다. 보세요, 조각이 정말 뛰어나죠. 조각이지만 농경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 있잖아요. 흡사 단원과 혜원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잖아요.

이 정도의 회화성을 가진 벼루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니 제가 벼루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The Collector]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 보낸 40년
시인은 스스로 벼루에 미쳤다고 고백했다. 벼루에 대한 그의 광기는 제법 근원이 깊다. 할아버지는 충남 당진서 유명한 유학자였고, 외조부는 최익현 문하의 큰선비였다.

그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과 가까웠고, 묵향과 친숙했다. 젊어 한때는 명필이었던 외삼촌을 따라 붓글씨에 빠지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벼루에 정신이 팔린 것은 1973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주최한 ‘명연전’을 본 직후였다. 당시만 해도 벼루가 청자나 백자처럼, 골동품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던 때였다. 국내의 명품 벼루를 식견한 그는 ‘나도 저런 벼루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 컬렉션의 시작은 대부분 미적 허영심에서 출발하게 마련이다. 시인도 그랬다.

그즈음 시인은 허영심을 누르지 못하고 큰일을 저질렀다. 월급이 10만 원도 안 되던 그가 100만 원짜리 벼루를 덜컥 손에 쥔 것이었다. 이중섭의 소 그림 하나가 30만 원쯤 하던 때였으니, 지금 가치로는 아파트 한 채 값은 족히 됐을 듯하다. 벼루 사고 얼마나 기뻤던지 잔치도 벌였다. 친구들 불러 술상도 내고, 시묵회도 가졌다.

중국 골동품 시장에서 큰손으로 행세
[The Collector]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 보낸 40년
그때부터 그는 벼루를 찾아 떠돌기 시작했다. 서울 인사동을 비롯해 벼루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지방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인사동에서 벼루를 다루는 골동품상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좋은 벼루를 얻기 위해 그는 중국을 찾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가 중국 골동품 시장에 떴다 하면 ‘한국에서 큰손이 왔다’고 상인들이 줄을 섰어요. 그때만 해도 1000달러면 좋은 벼루 하나를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가격이 너무 올라서 몇만 달러는 줘야 합니다.

그마저도 좋은 벼루가 별로 없어요. 저더러 되레 팔라고 하는데, 뭐하러 그럽니까. 제가 팔려고 산 것도 아니고.”

벼루를 컬렉션하면서 연적도 함께 모았다. 그는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연적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예술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고 했다. 그 탓에 집에서는 이제 내놓은 사람이 됐다. 밖에서는 1만 원짜리 한 장 갖고도 아웅다웅하는데, 컬렉션을 할 때는 이상하게 통이 커진다고 시인은 말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통장이 잔고가 없어도 좋은 벼루와 연적을 보면 손이 올라갔다.

이렇게 1000여 개가 넘는 벼루와 수십 개의 연적을 모았다. 그중 한국 벼루가 500여 점, 중국 벼루가 500여 점 정도다. 한국 벼루는 15, 16세기에 만들어진 위원화초석(渭原花草石)과 장생문일월연(長生文日月硯) 등을 걸작으로 꼽는다.
[The Collector]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 보낸 40년
중국 벼루는 당, 송, 명, 청 등 시대를 아우른다.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 등의 황제가 사용하던 벼루에서 조맹부, 유용, 이홍장 등 명사들이 사용했던 기록이 새겨진 벼루 등이 그의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

특히 그는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이라는 글귀가 적힌 벼루에 애착이 간다. ‘정조대왕사은연’의 뒷면에는 벼루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사연이 재밌다. 글에 따르면 이 벼루는 청나라 건륭제의 11번째 아들이자 명필로 이름을 날린 성친왕이 쓰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이 조선으로 넘어와 정조의 손에 들어갔고, 정조가 다시 이를 대제학 남유용에게 하사했다는 것이다. 남유용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의 사부였다.

한국 벼루의 예술성 알리는 책 준비 중
[The Collector]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 보낸 40년
안타까운 것은 중국에서는 벼루의 가치가 높아졌지만, 국내에서는 점점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벼루가 푸대접받는 현실을 개탄했고, 그 연장선에서 글을 숭상하던 전통문화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벼루는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선비정신이 깃든 문화의 한 단면입니다. 그런데 아직 국내에는 변변한 연구 책자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한국의 벼루는 청자, 백자 못지않은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도자기가 중국에서 왔지만, 청자와 백자가 그것을 뛰어넘었 듯이 벼루도 한국의 것이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현재 한국 벼루의 예술성을 알리기 위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 책이 나오는 대로 중국과 영문판도 낼 계획이다. 이를 통해 그는 벼루 종주국인 중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을 심산이다.

글 신규섭 ·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