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의 대표적인 황제라면 고대 로마제국과 중국의 황제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황제라도 두 제국의 황제는 위상이 사뭇 다르다. 아마 고대에 로마 황제가 중국 황제를 알았더라면 동양의 동업자를 무척 부러워했을 것이다.
영어의 황제, 즉 엠퍼러(emperor)의 어원인 로마의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원래 군 사령관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중국 황제인 천자(天子)는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 즉 천하의 주인이었다.
로마 황제는 탄생 과정부터 결격 사유가 있었다. 그 시작은 보통 기원전 27년으로 잡지만 엄밀히 말해 그때 로마의 최고 지배자인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4년 전 악티움 해전으로 정적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최고 권력자가 됐으나 종조부이자 양아버지인 카이사르가 제위를 꿈꾸다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실은 과두정)의 전통이 강력했던 로마는 아직 절대 권력자를 받아들일 만한 정치적 분위기가 숙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절대자를 자칭하지 않았고 원로원도 그런 그의 의도를 감사히 여겨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과 프린켑스라는 직함을 수여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프린켑스(princeps)는 ‘최고 시민’이라는 뜻이니 절대 지존으로서의 황제와는 거리가 있다.
프린켑스라는 말에서 훗날 군주를 뜻하는 프린스라는 말이 나왔지만 당시에는 엄연히 ‘시민의 한 사람’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이때부터 로마에 제정이 성립됐다고 보지만 기원후 3세기 말까지도 황제의 칭호는 어디까지나 프린켑스였다.
실제로 로마 황제의 위상은 절대 권력자에 걸맞지 않았다. 우선 황제가 지닌 진짜 재산(real asset), 즉 부동산은 자기 집과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정복한 이집트 속주밖에 없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최고의 부자일지언정 제국의 오너는 아니었던 것이다. 로마 황제가 때로 사재를 털어가면서 스포츠나 검투 경기를 연 것도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중국 황제는 제국의 절대 권력자이자 단독 소유주였으므로 백성들의 인기를 끄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다. 호칭부터 천자였으니 지상의 지배자를 넘어 천기(天氣)를 받고 천리(天理)를 타고난 인물이다.
반란이 잦고 혈통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로마제국에 비해 중국의 역대 제국들이 수백 년간 중앙집권의 안정을 누리고 제위 계승이 원활했던 이유는 바로 그렇게 권력이 막강하고 지위가 신성시됐기 때문이다.
제국을 건설하고도 원로원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기원전 221년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은 스스로 최초의 황제, 즉 시황제(始皇帝)로 칭하고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짐(朕)’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썼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자식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해 진나라는 다음 대에 무너지고 한나라가 통일 제국의 바통을 잇는다.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북극성을 천자로, 주변의 별자리들을 사대부로 비유했다. 북극성은 고정돼 있고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가 하루 한 바퀴씩 북극성 주위를 돌듯이, 천자의 일인지배 하에 사대부들이 주변에서 보필하는 동심원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를 최선의 체제로 본 것이다.
강국의 조건이 강력한 중앙권력에 있었던 고대에는 그것이 효과적인 권력구조였다. 실제로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양 사회가 서양 세계보다 훨씬 선진적이고 강했던 것은 일찌감치 국가의 짜임새가 조밀했던 덕분이 크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진화하고, 특히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문명권과 교류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들어서면 중앙집권 체제는 오히려 사회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는 독소적 기능을 한다(그래서 15세기부터 동양 사회는 서양에 뒤지기 시작하고 결국 서양의 침탈을 겪게 된다).
그 점과 관련해 우리 역사에서 아쉬운 순간이 하나 있다. 한반도 역대 왕조의 왕들은 중국에 사대했으므로 황제를 칭하지는 못했지만(고려 초와 조선 말에 대외 정세의 변화를 틈타 잠시 황제를 칭한 게 전부다), 나라 안에서는 중국 황제와 같은 절대 권력자이자 왕국 전체의 오너였다.
나라 안팎이 안정적인 질서를 취할 때는 이런 일사불란한 체제가 가장 좋다. 하지만 서양의 선진 제국주의 세력과 일본이라는 새끼 제국주의마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혼돈의 개화기에 이 체제는 산불이 났는데 구멍을 파고드는 격이었다.
1897년 10월 조선의 고종은 독립협회와 조정 친러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자신은 황제가 된다. 고려 초기 광종 이래 1천 년 만에 황제가 부활하는 순간이다. 얼핏 보면 중국과 대등한 제국을 표방했으니 자주적인 자세인 듯싶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일제히 환영하고 나선 것부터가 좋지 않은 조짐이다. 그들이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대한제국을 환영했을까. 물론 아니다. 조선을 집어삼키려면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인 사대관계부터 끊어야 했는데, 마침 고종이 자기 손으로 해결해준 것이다. 적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목욕재계를 한 셈이랄까.
어쨌든 거기까지는 좋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어차피 언젠가는 이루었어야 했고 또 주체 노선은 양면의 칼이므로 잘만 쓰면 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고종은 개혁 군주는커녕 계몽 군주도 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에서 얻은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의회를 설립하려 하자 고종은 그만 꼭지가 돌아버린다.
개화파가 주도하는 정국에서 소외되는 분위기에 겁을 먹은 친러파의 꼬드김이 주효했다. 하지만 결정권자이자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오너인 고종이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무리가 의회를 구성한다면 자신은 바지저고리가 될 게 뻔하다.
그래서 고종은 개혁 세력의 지원으로 얻은 황제로서의 권한을 오히려 개혁 세력의 탄압에 써먹는다. 1898년 11월 그는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물론 설령 그때 의회가 수립됐다 해도 우리 역사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일본은 이빨을 들이댔을 테고 한반도는 일본에 강점됐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강점이라도 과정이 중요하다. 만약 의회가 수립됐다면 국가의 주인이 바뀐다. 비록 군주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의회가 국민을 대표해 국가의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최소한 절반은 국민주권인 셈이다.
그렇다면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그렇듯 쉽게 체결할 수 있었을까. 국민주권이기 때문에 을사오적만 움직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고종이 옥새만 찍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중요한 조약이 절차상으로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의회는 당연히 반대하거나 최소한 강력히 저항했을 것이므로 일본이나 을사오적이 의회의 동의를 얻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일본은 대한제국의 의회를 강제로 해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의회를 해산시키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고 국제적으로도 지탄을 면하기 어렵다.
의회가 있으면 소유권이 분산돼 있다는 것이므로 적에게 침략을 당했을 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단일한 소유권이 큰 힘을 발휘하던 시대는 지났다. 국가든 기업이든, 정치든 경제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보면 무늬만 사회주의일 뿐 황제식 고대 국가 체제를 견지하고 있는 북한이 현대 세계에서 취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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