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피노 누아르(pinot noir)와 생소(cinsaut)의 교배로 탄생한 피노타주(pinotage)다. 하지만 남아공 와인의 진정한 매력은 쉬라즈다.
안타깝게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와인은 단 한 번도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그럴 만한 사회적 이슈가 전혀 없었다. 먼저 맛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마셔볼 것을 권장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와인 매장에서도 겨우 모퉁이 공간에서나 발견된다. 비단 피노타주뿐 아니라 남아공 와인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아공 와인을 수입하는 회사들 중 누구 하나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지 않는다. 국내 와인 시장에서 갈수록 자리를 잃고 있는 이유다.
고백하자면 필자 역시 남아공 와인은 굳이 내 돈 내고 마셔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식을 바꾸게 된 것은 최근 맛본 남아공 쉬라즈 덕분이다.
그날 맛본 쉬라즈는 필자 입맛에 가장 맛있는 와인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각국의 쟁쟁한 시라, 쉬라즈 사이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남아공 와인이 발전을 한 거지’하는 놀라움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남아공, 2009년 영국에서 와인 소비량 프랑스 제쳐 남아공은 17세기부터 와인을 생산했다. 이미 19세기에 ‘뱅 드 콩스탕스(Vin de Constance)’라는 스위트 와인으로 유럽 왕실 및 지식인들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남아공에 처음 포도를 심은 사람은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17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피난 온 프랑스인들 덕에 이 나라 와인 발전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포도 재배 및 와인 제조 노하우가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다. 19, 20세기를 거치며 독일, 이탈리아 이민자들까지 몰려들면서 자연스레 이들 나라의 와인 문화까지 적극적으로 전파됐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병충해,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이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남아공 와인 산업은 오랜 기간 방치되다시피 했다. 본격적인 발전은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던 1994년 이후부터 급속히 이루어졌다.
작년 6월 세계 포도 재배 및 와인 협회(OIV)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남아공 와인은 생산량과 수출량에서 모두 8위에 올랐다. 칠레보다 많은 생산량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칠레 와인의 인기가 대단하다 보니 이 결과를 의아스러워할 수 있겠지만 유럽에서 남아공 와인의 위상은 우리의 예상치를 훨씬 웃돈다.
시장조사 전문 기업 AC닐슨은 작년 한해 영국인들의 남아공 와인 소비량이 2008년보다 12%가 증가, 총 1227만 케이스의 와인이 판매됐다고 발표했다. 이 결과 남아공 와인은 영국에서 호주, 캘리포니아, 이탈리아 다음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와인을 제친 것이다.
남아공 와인의 힘은 포도에서 비롯된다. 남아공 남서쪽, 케이프타운 근방은 천혜의 포도 재배지다. 일찍부터 전해진 유럽의 앞선 양조 기술은 남아공 와인 발전에 튼튼한 밑거름이었다.
여기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와 인건비 덕에 가격경쟁력까지 갖출 수 있었다. 이곳의 진가를 먼저 눈치 채고 한걸음에 달려온 이들은 미셸 롤랑을 비롯한 보르도 사람들이었다.
1990년대 말, 보르도의 에드몬드 드 로트칠드 남작은 남아공의 안톤 루퍼트와 파트너십을 맺고 루퍼트앤드로트칠드 와인 브랜드를 론칭했다. 스텔렌보시와 함께 남아공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꼽히는 팔에서 지금은 이들의 아들들이 레드 와인 2종과 화이트 와인 1종을 생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샤토 디켐과 슈발 블랑의 디렉터를 맡고 있는 피에르 뤼르통은 모겐스터 와이너리와 손잡고 역시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남아공 와인의 힘을 보여주는 쉬라즈
케이프타운 남쪽으로는 남아공의 와인 역사를 말해주는 콘스탄시아가 위치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뱅 드 콩스탕스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지금은 남아공 최고의 소비뇽 블랑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콘스탄시아에서 좀 더 동쪽으로 들어가면 스텔렌보시가 나타난다. 이곳에 남아공의 유명 와이너리들이 대거 몰려있다. 모겐스터 와이너리도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전 세계 골프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개리 플레이어, 얼마 전 방한했던 ‘빅이지’ 어니 엘스도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을 이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루퍼트앤드로트칠드 와이너리가 있는 팔은 스텔렌보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져 있다. 와인 생산량도 많고, 지금은 민영화돼 남아공 와인 발전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남아공 포도 재배자 조합 KWV도 여기에 있다.
피노타주는 누가 뭐래도 남아공 와인을 말하는 키워드다. 하지만 남아공은 이 품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재배 면적은 눈에 띄게 줄어들지도, 그렇다고 늘어나지도 않고 있다.
대신 보르도 스타일의 레드 와인 인기 덕에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관련 품종 생산량이 늘고 있다. 쉬라즈는 남아공 와인 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비 후보다. 마냥 제자리걸음인 피노타주와 달리 세계적인 평론가나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듣는 남아공 와인은 이 두 종류의 레드 와인이다.
슈냉 블랑(Chenin Blanc) 생산량은 남아공이 세계 1위다. 한때 전체 포도밭 중 25%에 달하는 포도밭에서 슈냉 블랑을 키웠지만 지금은 생산량이 감소하는 추세다. 대신 샤르도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소비뇽 블랑은 1980년대 초반에 처음 심어져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다.
월드컵으로 따지면 남아공 와인은 어느새 본선 출전권 획득은 물론 16강도 자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혹 그들이 정말 이렇게 주장한다 하더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들은 세련되게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와인 강국으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아놓은 상태다.
혹자는 남아공 와인이 구대륙 와인과 신대륙 와인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말한다. 즉 양 사이드의 강점만을 취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와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남아공 와인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